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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5 |
『지리산, 고라니에게 길을 묻다』
관리자(2006-05-10 16:34:10)
『지리산, 고라니에게 길을 묻다』 (글 박두규·사진 이돈기, 삶이 보이는 창 펴냄, 2006) 글 | 김영춘 시인 그리움이 삶의 정처가 되어버린 중년의 한 사내를 읽는다 오래전, 정양 선생님께서 익산에 계실 때의 일이다. 늦은 시간 주막에서 술을 한 잔 기울이다가 두규, 배엽, 남준이의 이야기로 우연히 넘어가게 되었는데, ‘이 세 사람의 젊은 시인들에게서 흘러나오는 형언할 수 없는 동질의 빛깔은 어디서 오는 것이냐’ 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들이 7~80년대를 오랜 벗으로 살아오면서 시를 쓰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어 온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이 나라 어느 구석을 찾아 간들 그 또래의 젊은 시인들이 거의 같은 빛깔로 밤을 새워 술을 마시고 대책 없이 애가 타면서 대책 없이 노래 부르는 한결같은 삶의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말인가. 유치하다 싶은데도 불구하고 유치한 정도를 훨씬 뛰어 넘어 새로운 경지로 들어가 버리는 전라도 사내들의 진달래꽃 빛깔 같은 저 순정성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느냐는 그런 종류의 이야기를 나누다가 웃고 헤어졌었다. “몰락한 백제 시절이나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추쇄꾼들을 피해 고향과 사람들을 등지고 지리산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깊은 어둠을 산에 풀었고 산은 그들의 어둠을 품어 주었다. 스스로 고립된 만큼의 세월이 지리산의 그리움이 되었다. 그리움은 해마다 수수꽃다리며 때죽나무 같은 꽃으로 무리지어 피어났다.” 10년도 훨씬 더 지난 오늘, 나는 그 대답을 이제야 찾는다. 두규 형을 지리산으로 끌고 들어갔던 배엽이도 이미 세상을 떠나고 만 오늘 ‘고라니에게 길을 묻다’를 읽다가 저 턱도 없이 물결로 찰랑여 오던 대책 없는 순정성의 정체를 파악하고 만다. 산이라고 하는 저 거대한 생명체를 통해 그들을 바라보기 시작하자 어슴푸레 밝아오는 새벽처럼 나의 오랜 궁금증은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했다. 박두규 시인의 허연 이마 가득한 그것 ! 가늘고 길게 찢어져 검게 젖어 있던 두 눈 가득한 그것! 그것은 바로 그리움이었다. 원래 문학 안에서 그리움이란 어딘가를 향해 퍼져나갈 때 훨씬 더 많이 외부로 확산되면서 불특정한 대상을 향하게 될 때가 많아서 그 정체가 모호할 때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박두규 시인의 그리움은 특정한 지향점을 분명하게 형성하고 있다. 이 지향점은 바로 박두규 시인의 삶의 정처이며 그가 꿈꾸고 돌아가고자 소망하는 고향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자본에 짓밟히고 빼앗기기 전의 우리들의 품성이다. 모든 약한 것들을 싸안고 스스로 햇빛과 어둠 속에서 빛나던 생명의 세계이다. 결국 시인은 이번 포토 포엠 에세이를 통해 잃어버린 원래 우리들의 품성과 서로 나누던 아름다운 생명의 세계를 그리워하며 걸어가는 동안 내쉬는 숨소리를 우리에게 조용히 내뿜고 싶은 것이다 박두규시인의 그리움을 대표하는 산은 지리산이다. 온 우주와 더불어 함께 할 유일한 벗도 그곳에 있고 삶에 관한 모든 성찰과 사유도 그곳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는 세상의 모든 사물들을 지리산을 통해 바라보며 생각한다. 따라서 지리산을 통해 솟아나는 그리움은 색깔로 말하자면 연보랏빛이 아니라 역사성에 몸을 섞은 선홍빛이 된다. “아 지리산, 앙상하게 드러난 몸뚱어리에 눈보라가 밀리누나. 더는 갈 수 없는 세월, 더는 질 수 없는 역사, 더는 바랄 수 없는 목숨들을 끌고 눈 덮인 마지막 능선을 넘는구나. 눈보라치는 저 능선을 넘으면 젊고 푸른 조국이 있을 것이다. 목숨보다 소중하다던 푸른 들 한 줌의 흙이 있고 사립문을 열고 나오는 늙은 어머니의 얼굴엔 눈이 부시도록 환한 미소가 있을 것이다.” 몇 줄의 시 같은 산문과 몇 장의 시 같은 사진 그리고 정말 몇 줄의 시들은 어려운 시절에 함께 자라나던 고만고만한 형제간처럼 어울리며 아프게, 아프게 속삭여 오는 것이다. 전쟁으로 이어지는 한반도의 역사적 진실과 그 진실의 좌절 혹은 실패를 안고 존재하는 지리산을 통하여 삶과 진실은 무엇이며 그들을 품고 자라던 생명이란 또한 무엇인가 거듭 물어 오고 있는 것이다. 진실이 묻혀가고 짓밟힐 때마다 쓰러지던 생명들…. 드디어 나는 이 대목에 이르러 그리움이 삶의 정처가 되어버린 중년의 한 사내를 읽는다. 정처 없는 이 발길이 아니라 죽어도 떠날 수 없는 삶의 표적이며 깃발이며 고향인 삶의 정처 말이다. 박두규 시인의 그리움은 자신의 평상시 삶처럼 지극한 정성과 섬김으로 가득 차있다. 그가 그리워하는 삶의 정처는 자신의 삶의 정처이자 모든 생명들이 어우러져 피어나는 삶의 정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숨 막힐 것 같은 정성과 섬김의 마음이 다음 몇 줄의 산문 속에 펼쳐져간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대에 대한 두려움을 지울 수 없다. 나는 아직도 그대의 침묵을 품을만한 내 안의 간절함을 일구지 못했다. 아직도 그대를 향해 세 번의 절을 하지 못했고 단 하루도 나는 침묵하지 못했다. 곡진한 정성 하나를 아직도 내 안에 모시지 못했다.” 오, 생명을 품은 저 거대한 생명 앞에서의 두려움이여, 간절함이여. 침묵함이여. 이제 한 인간의 구슬픈 그리움이 구도의 청정한 뜻으로 변화하며 어떻게 저 호젓한 산길을 승려처럼 오르내리게 되는 것인지 화안히 눈 뜨게 되는 것이다. 지리산을 통해 얻은 깨달음으로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 박두규 시인의 구도의 길에는 분명 사람들의 곡진한 삶이 만들어낸 생명과 평화의 바다가 있을 것이고, ‘이렇게 한 번 살아봐!’ 하는 조용한 속삭임 또한 함께 할 것이다. ‘아마 그녀도 그럴 것이다’라고 내가 제목을 정한 4줄짜리 산문을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전하며 이제 박두규 시인의 산을 내려가야겠다. “상선암으로 해서 차일봉을 오르다 멧돼지 네 식구를 만났다. S 곡선을 돌아 갑자기 조우했는데 나도 놀랐지만 그 가족들이 더 놀랐던 것 같다. 그들이 먼저 순간적으로 등을 돌려 왔던 길로 돌아갔는데 그 찰나에 마주친 어미 멧돼지의 눈빛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아마 그녀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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