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5 |
조선왕조의 모태와 같은 오목대
관리자(2006-05-10 16:12:07)
글 | 홍성덕 전북대박물관 학예연구사
어릴 적 오목대에 기억은 한벽당 밑으로 물놀이 가던 중에 올랐던 산이었다. 옛 남중학교 위 사거리에서 리베라 앞으로 이어지는 오목대 가는 길은 철도 레일 위를 외다리 삼아 장난치기도 하고 때로는 기차가 어디 쯤 오는 지 바닥에 엎드려 레일에 귀를 대보기도 하고, 어쩌다 기차가 오는 소리가 들리면 돌맹이를 올려놓거나 작은 못을 놓아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곤 했던 그런 길이었다.
전주사람들에게 오목대는 특별한 곳이다. 전주를 가장 잘 볼 수 있었던 곳 중의 하나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중바위 자락에서 이어지는 발산이 그렇고 옥류동, 자만동, 간납대 등 전주라는 도시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는 과거의 기억, 역사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옛 모습을 찾기는 무척 어렵지만, 옛 지도를 보면 발산(오목대 뒤 중바위로 오르는 산, 어릴 적에는 고추산이라 부른 기억이 있다)에서 한벽당에 이르는 능선은 여러 갈래로 뻗어 있었다. 전주향교를 중심으로 좌우에 한 곳씩 오목대 처럼 시내를 향해 능선이 튀어나와 있었다. 골짜기 마다 자연부락 형태로 사람이 살았고, 자만동·옥류동 하는 것은 바로 이 계속에 형성된 마을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멀리는 이성계의 선대인 목조 이안사가 살았다는 곳이고 가깝게는 간재 선생의 제자인 금재 최병심 선생이 살았던 곳이다. 이안사는 자만동에서 한벽당으로 멀리는 각시바위, 서방바위 쪽을 무대로 어린 시절을 보낸 듯하다. 친구들과 전주천변 바위 밑에서 놀다가 호랑이를 만나 먹이감 룰렛의 대상이 되어 호랑이에게 먹히려 자리를 피했다가 바위가 무너져 혼자 살아남았다는 호운암의 이야기나 조선이 멸망한 것을 한탄하여 오목대에 올라 통곡을 했다는 금재 선생의 이야기도 이곳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남원 운봉 황산벌에서 왜구를 물리치고 개경으로 올라가던 이성계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주에 들러 종친들을 모아 잔치를 벌이면서 중국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 불렀다는 ‘대풍가’를 읊었다고 전해지는 곳 또한 오목대이다.
이렇듯 오목대는 조선왕조를 세운 전주이씨와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다. 전동성당의 건립 예정지로 거론되었다가 포기한 것이나, 시내가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곳에 세워 일본왕(천황)의 권위를 보이고자 했던 신사가 오목대를 피해 다가산으로 옮겨 간 것도 어쩌면 오목대에 대한 조선시대 전주사람들의 ‘정신적’ 믿음 때문인지 모른다. 조선왕조의 몰락을 거부하고 전통 왕조의 재건을 강건히 하고자 했던 고종황제가 1900년 오목대에 “태조고황제주필유지”라는 비와 비각을 세운 것은 조선시대의 고향으로서 전주라는 도시의 정체성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필(駐 )”이란 임금이 머무른 장소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전주’는 조선왕조의 모태와 같은 곳이다. 세상이 어렵고 힘들 때 뒤돌아 찾아보는 ‘모태신앙’의 대상인 것이다. 그런 때문인지 조선시대 48대 임금 중에 유일하게 전주를 방문한 적이 있었던 임금은 태조 이성계뿐이었다. 마치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민심을 확인하고 천신에 고하기라도 하듯 이성계는 그의 모태를 찾았고, 나라가 망하는 것을 어떻게든 바로 잡기위에 자신의 모태신앙을 확인하려는 고종황제의 마음 역시 그런 점에서 똑같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