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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산책자의 몽상>(1782)
관리자(2006-05-10 16:08:00)
산책, 혹은 의도(意圖)의 바깥으로 외출하기
죄(罪)는 돌아가야 할 본래적 지점을 나타낸다’(P. 리쾨르). 접촉관계를 흠의 상징으로 본 리쾨르는 죄를 방향의 문제라고 본다. 이를테면, 죄는 ‘다른’ 길을 걷는 것이고, 속죄(贖罪)는 곧 귀향(歸鄕)에 다름 아니다. 죄에 관한 논설은 이처럼 통속적이다. 그러나 죄가 아니라 상처, 특히 타인들과의 만남이 강박적으로 재생산하는 상처가 가리키거나 나타내는 지점은 대체 어디일까? 이 짧은 소개글의 취지는 바로 이 물음에 대한 극히 실천적인 단상이다.
취지의 요약은, ‘죄가 있거나 없는 사람은 단지 이동(移動)할 뿐이지만, 상처받은 사람은 걷는다’는 것이다. (‘죄’ 대신에 ‘자본’이나 ‘욕심’을 넣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물론 이 ‘걷기’에서 상처의 고유한 성격이 드러날 테지만, 그것은 죄와 달리 ‘방향’이나 목적지(메카)가 없는 것이며 따라서 어떤 경우에든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령, ‘봄날 미친 년’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려 보면서, 그 속에서 상처와 걷기가 주고받는 표정을 상상해 보시라. 죄업(罪業)은 정해진 방향으로의 이동을 독려하지만, 상처는 방향 없이 걷게 할 뿐이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1778)의 루소는 무엇보다도 상처받은 도피자로 나타난다. “나는 바위나 산에 기어오르거나 산골짜기며 숲 속 깊이 숨어서 될 수 있는 대로 인간의 추억이며 사악한 사람들의 공격을 피하려고 한다.”1)
당대 최고의 지식인-신사였던 흄(David Hume)과의 안쓰럽고 비극적인 조우가 말해주듯이, 그의 단독자적 실존은 키에르케고르의 경우와는 달리 고약한 피해망상증을 동반한 것이었다: “나에 관한 문제라면 사람들의 머리 속에 남아 있는 이성의 눈과 사람들의 가슴 속에 있는 공평의 손이 모두 가려지는 것을 발견하였을 때… 나는 비로소 이 세상에서 오직 혼자뿐인 외로운 사람이 된 것을 깨달았다”(144쪽). 그리고 이 도피자 / 단독자의 불행과 상처 속에서 루소는 산책의 의미를 재발견한다: “저 짧았던 성공의 시기에는 오늘날 이렇게도 유쾌하게 느껴지는 고독한 산책이 언제나 우울한 것으로 느껴졌던 것이 이제 확실히 내 머리에 떠오른다.”(152쪽)
자신의 의도(意圖)와 자기정체성이 일치하는 행복하고 오만한 시절에는 걷지 않는 법이다. 그 때에는 순례하거나 이동하고, 등산하거나 여행하지만, 결코 ‘산책’은 하지 못한다. 고쳐 말하자면, 삶의 출발점과 종착점을 임의로 확정하고 고집하는 그 모든 독단주의자들은 걷지 못한다. 산책의 상극(相剋)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독단(dogmatism)이다. 알파와 오메가 사이, 시작과 끝 사이, 전주와 서울 사이를 오락가락할 뿐 산책을 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삶이 선상(線狀)의 이동로이거나 반듯한 격자판일 경우에도 산책은 없다.
무엇보다도 상처는 삶을 미로(迷路)로 만든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상처받은 자는 주행로/이동로가 아닌 미로의 삶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미로를 걷는 것으로서의 산책은 상처가 덧나는 원천인 의도와의 싸움에 다름 아니다. 산책은 상처 입은 미로의 삶이 그 기억(의도)의 바깥으로 나아가려는 외출이며, 우리의 삶이나 주체성이 자신의 의도와 어긋나면서 형성된다는 사실에 대한 극히 흥미로운 메타포다.
1)장 자크 루소,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박규순 옮김 (혜원출판사, 1999), 13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