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5 |
김성연·김창배 사진전
관리자(2006-05-10 16:03:38)
전북 예술회관에서 있었던 두개의 사진전시회를 다녀와서
글 | 정주하 사진가·교수
1.
다소 낯설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진을 본다는 것은 현실을 먹는’ 일이다. 이는 사진이 복제해 낸 그 현실이 그 사진 안에 그대로 고여 있기에 그렇다. 때문에 전시장 안에서 사진을 보는 관람자는 스스로가 서있는 공간으로부터 조그만 종이 위의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선입관념(이미 경험한) 속으로 쉽게 여행을 한다. 사진 속의 그곳이 어디든 혹은 그것이 무엇을 보여 주고 있든 관람자는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선입된 생각의 형상을 의식 안에 되돌이켜 재생시킨다. 이를 통해 이제 그 재현된 현실은 보는 이의 것이 되고, 이 지점으로부터 그 먹어버린 현실에 대한 관람자의 해석이 시작된다.
하지만 관람자의 해석 이전에 카메라 뒤에서 작업을 하였던 작가의 의식 속에는 그 현실의 재현을 위한 해석이 선행된다. 사진가가 그러한 대상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킨 행위에는 이미 그 대상에 대한 해석이 담보되는 일이기는 하겠으나, 촬영하는 순간의 여러 태도들은 그 해석의 실천으로 결정된다. 흔들어 찍을 것인가 고정하여 찍을 것인가. 서서 찍을 것인가 혹은 앉아서 찍을 것인가 하는 문제와 얼마나 대상에 가깝게 또는 멀리 카메라를 위치시킬 것인가 등의 문제는 대상과 작가 사이에 밀도 깊은 관계가 설정됨을 말해주며 그러한 행위의 태도 안에 사진의 문법은 이미 존재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를 다시 해독하는 일은 온전히 보는 사람의 몫이 되겠으며, 사진의 소비자들이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선행해야 할 학습인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사진을 소비하는 관람자의 입장과 사진을 생산하는 작가의 입장은 언제나 어긋나게 마련이다. 지금 보이는 사진 안의 사실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진을 보고 있는 사람의 생각 안에 그 사실에 대한 선(先) 경험이 어떠하냐가 보는 태도를 결정하기에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2.
나는 인도에 가보지 못했다. 그리고 두만강 근처를 배회하는 ‘탈북 꽃제비’들을 만나 본 적도 없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어쩔 수없이 얻게 된 인도에 대한 시각적 경험이 있으며, 또 중국 변경의 꽃제비들에 대한 매체를 통한 간접경험 또한 있다. 이 두 선입관념과 사진에 대한 나의 경험을 집중해서 이번 두 전시를 보았다. 앞서 이야기한 사진을 보는 입장과 작업하는 입장의 유기적 관계를 유념하면서 말이다. 소감은 이렇다.
인도의 여기저기를 흐르는 김성연의 시선은 ‘사적인 낭만’이 가득하다. 마치 사진이 아니라 작가가 그대로 거기에 있는 듯한 인상이다. 이미 인도에 가기 전에 『인도방랑』을 읽은 듯 방랑이 사진 안에 흠씬 묻어있다. 그의 시선에는 대상이 가지는 현실과의 관계보다는 자신이 보내는 시선의 애정이 훨씬 더 중요하다. 시작도 끝도 없고, 시놉시스도 없고, 내러티브 또한 전혀 없다. 몇 장의 사진에서 보이는 잘 만들어진 화면 구성과 앵글 그리고 순간의 화려한 포착 역시도 그에게는 별로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 역시 그냥 그럴 뿐, 사진으로 주장을 하거나 사진으로 자신의 의견을 강조하려는 모습은 전혀 없다. 디지털로 프린트하여 사진 안에 푸른 기운이 가득 돌아도 무관하며, 붉은 기운이 여기저기에 배어있어도 무관하다. 더욱 보는 이로 하여금 그의 사진에 대해 무관하게 만드는 것은, 그 인도의 방랑 안에 한국 방랑사진이 함께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물음에도 그는 무관하다. 어쩜 전시 전체가 그에게 무관한 일일지 모르겠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무관함이야 예술적 연막이리라 생각된다. 그 연막의 뿌연함을 걷어 그의 의식 안으로 들어가기가 어려울 뿐이다.
이에 비해 김창배의 작업 ‘장마당’의 시선에는 ‘개인적인 욕망’이 가득하다. 그가 다루고 있는 것은 중국 변경을 떠도는 꽃제비들로 정치/사회적 의미가 매우 비등한 주제이다. 워낙 예민한 소재인지라 초기의 작업은 ‘옷 벗은 카메라’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한다. (사람들이 카메라를 알아볼 수 없도록, 일회용 카메라의 껍질을 모두 벗기어 낸 후 사용하였다 한다.) 이처럼 캔디드한 방식으로 작업한 것과 후일 ‘옷 입은 카메라’로 작업한 사진의 조합으로 전시의 모습은 두 테마가 공시(共示)되는 듯 보인다. 때문에 그의 작업에서 시선의 욕망을 느끼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시선의 욕망’은 다시금 사진에 드러나는 치열함으로 환치된 느낌이다. 전시된 사진에 절반은 화면이 잘 구성되어 멋지다. 그리고 나머지 반은 촬영 당시의 긴박감을 드러내듯 흐트러져있고 격렬하다. 전자의 방식에서는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학습된 사진 제작의 완숙도’를 드러내려 애쓴 결과이고, 후자의 방식에는 자신이 작업하던 그곳에서 얼마나 ‘위험이 절실’했는지를 드러내려 애쓴 결과이다. 이 두개의 드러냄이 밧줄의 꼬임처럼 하나로 묶여있다. 작가는 관람자들이 이를 느끼도록 두 부류의 사진을 섞어 놓았다. 격자의 모습으로 보여주기도 하고 전시 사진의 크기를 다르게 하여 보여주기도 한다. 컬러 필름에서 흑백프린트를 만들어내는 솜씨 또한 이를 떠받치고 있어 세심한 관찰이 요구될 정도이다. 물론 작가가 욕망을 드러내는 일은 자연스럽다. 아무도 이 작가의 욕망에 딴죽을 걸 이유는 없다. 다만 그렇다는 것일 뿐이다.
3.
전시된 작업의 소재와 작가의 작업 태도가 여실히 다른 두개의 작업을 보는 일은 어렵거니와 동시에 기쁘기도 하다. 작업들이 하나씩 이해되기도 하지만 두개의 작업을 비교하며 읽어볼 수 있어서 그러하다. 잘 알려진 것처럼 사진은 내가 그곳에 존재했었음의 다른 표현이다. 그것이 디지털이든 혹은 아날로그든 렌즈를 통해 세상을 관찰하는 사진의 방식인 점에서는 다를 리 없다. 김성연과 김창배가 보았던 작업한 두개의 세계는 사실 어떤 면에서는 하나로 읽힌다. 이 둘은 이방의 모습으로 이방의 장소에서 낯선 시선을 통해 그들을 보았다. 적어도, 최근에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곳이고, 그래서 한편으로는 익숙한 곳을 굳이 이들이 다시 조망하고 있는 이유를 내가 알 길이 없으나, 여전히 우리에게 시각적으로 낯선 곳임에는 틀림이 없다. 공통점은 또 하나 있다. 단지 관자의 입장에서 볼 때 두 사람의 작업이 가지는 공통점은 35mm카메라로 작업했다는 점과 최종 프린트의 선택을 흑백으로 했다는 것이다. 시대에 맞게 아지탈(A-gital, 아날로그로 찍어 디지털로 프린트한 사진)로 작업한 듯 보인다. 그러나 내게 시각적으로 다가오는 두 작업의 커다란 차이는 작가들의 대상에 대한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김성연의 작업에서는 ‘사적 낭만’을, 그리고 김창배의 작업에서 ‘시각의 욕망’을 확연하게 느끼게 된다. 아마도 사진을 시작한 동기와 학습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김성연이 완연한 여기(餘技)로써 사진을 시작했다면, 김창배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자 사진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보인다. 사진을 대하는 치열성의 차이 또한 이 지점에서 출발 했을 것이라 짐작해 본다.
문득, 전시를 보고나서 전시장을 나오던 때의 기억이 스친다. 너무도 높은 천정과 열악한 모습의 벽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혀 전시를 고려하고 있지 못하는 조명의 상태가 나를 찌른다. 인구 60만의 조그마한 도시에서 ‘무엇을 더 바라느냐’고 애써 자위해 보지만, 연일 매체에서는 우리나라의 경제적 위상을 떠들어대고, 더불어 정치/경제인들에 의한 수천억의 비리가 우리의 머리 위를 유령처럼 배회하는 현실을 함께 느끼면서 보았던 사진들이 더욱 슬프게 기억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사진을 보는 일은 현실을 먹는 일이니 말이다.
정주하 | 사진가. 독일 쾰른대학교 자유예술대학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쾰른 시립개방대학에서 koeln volkshochschule 사진과 강사를 역임하고 한국에 돌아와 10회의 개인전과 다수의 단체전을 치렀으며 현재 백제예술대학 사진학과 교수로 재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