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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5 |
[포구] 곰소항 기행
관리자(2006-05-10 15:56:41)
만선의 꿈은 기억으로만 남아 글|최정학 기자 유난히 황사가 심한 봄이다. 길을 나서야겠다고 마음먹은 날이면 어김없이 황사가 찾아왔다. 좋은 날 기다리다가는 영영 포구에 못가겠다 싶어, 기어코 길을 나선 날도 차고 건조한 황사가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처음 목적지는 ‘줄포’였다. 한때, 서해의 4대항 중 하나로 꼽힐 만큼 번성했었다는 곳이었다. 띄엄띄엄 줄포의 위치를 가리키고 있는 이정표가 길 안내를 해주었다. 그러다 나타난 시가지의 삼거리, 그곳에 설치된 이정표엔 당연히 있어야할 ‘줄포’란 이름이 없었다. ‘줄포 마트’, ‘줄포 철물점’, ‘줄포 정육점’… ‘이곳이 줄포인가?’ 하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바다의 자취는 보이지 않았다. “줄포 가려면 여기서 어디로 가야해요?” “줄포? 여기가 줄폰디.” “아, 그럼 줄포항 가려면요?” “여기가 전에 줄포항이었어.” 몇 해 전 줄포 시가지의 침수방지를 위해 방조제를 쌓으면서 이미 활기를 잃은 줄포항의 자취마저 사라져 버린 것이라 했다. 아주머니는 친절하게 곰소항에 가면 횟집이 아주 많다고 일러주었다. 이제 바다의 흔적마저 사라져버린 줄포와 관광객들이 회를 먹기 위해 찾아오는 곰소항, 한때 만선의 꿈으로 출렁이던 이 곳들은 이미 ‘뭍’이나 ‘관광지’로 변해 있었다. 아마 서해안의 수많은 포구들이 같은 처지일 터였다. 어쩔 수 없이 목적지는 곰소항으로 변경되었다. 토사로 인해 바다가 매몰되면서 고깃배들의 입출항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자, 줄포항에 있던 어업조합과 부도노조가 이전한 곳이 곰소항이다. 곰소항은 줄포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줄포에서 차를 돌린지 10분쯤 됐을까, 갑자기 바람이 짜졌다. 영락없이 서해안의 개펄 바다냄새였다. 눈으로 곰소항의 존재를 가장 먼저 알린 것은 염전이었다. 유명한 곰소 젓갈을 만들어 내는 소금이 생산되는 곳이었다. 뿌연 황사 속에 보이는 염전과 녹슨 소금창고의 모습이 황량해보였다. 하지만 황사 속에서도 염전은 소금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원체 소금금이 없응게 지금은 반절만 하제. 원래는 저 너머까정 다 염전이었어.” 삼십년 째 곰소염전에서 일하고 있는 박정길(부안군 진서면 진서리) 씨는 오래전 곰소항의 모습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전에는 조금이믄 고기를 일주일을 펐어. 딱 요즘이 조기 무지 날 때였네. 참말로 고기 많었네. 고기들이 어찌나 많았던지 새비 같은 잡어 들은 거저 가져가라고 했어. 그것도 넘쳐나서 말려서 묵고 그랬지. 고기들도 넘쳐나고, 여기서 나는 소금도 깨끗하고 간이 좋았는디 젓갈이 안 유명할 리가 있었겄는가.” 박 씨는 곰소항도 바다가 자연스럽게 메워지면서 10년 전부터는 큰 고깃배들이 들어오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곰소항에 더 이상 큰 고깃배들은 들어오지 못하지만, 여전히 염전의 물레가 바닷물을 퍼 올리고 있는 모습은 더없이 반가웠다. 그곳에서 작은 모퉁이 하나를 돌아가자 즐비한 횟집들 너머로 회색빛 바다가 펼쳐져 보였다. 항구에는 몇 척의 작은 어선들만이 개펄 위에 몸을 뉘이고 있었다. 오랜 세월, 수많은 어부들이 꿈꿔왔을 만선의 희망은 이제 그만큼 많은 횟집 간판에 그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항구의 공터에서 어부 세 명이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모기장처럼 아주 촘촘한 그물이었다. “시라시(실뱀장어) 잡은 그물이여. 그물이 촘촘해서 일명 모기장 그물이라고도 부르고. 이제 슬슬 시라시 잡는 철이 끝나가서 손보고 있는 중이여.” 곰소 앞바다에서 실뱀장어를 잡는 어부들이었다. 4,5십대인 이들은 이곳에서 ‘막내 어부’들이라고 했다. “말도 마, 여기 칠산바다에 안오는 배가 없었어. 조기 잡고, 갈치 잡던 중선배들이 많았지. 부산, 인천, 여수, 삼천포에 있는 배들도 여기 칠산 앞바다에서 고기 잡아서 위탁판매하고 그랬어. 그런데 지금은 큰 배들은 더 이상 안 들어와. 짜잘한 어선들 밖에 없어. 영광원전 들어서면서부터 고기가 엄청 많이 줄었고. 따뜻한 물이 여기까지 올라오거든. 거기다 중국 고대고리(저인망) 어선들이 저기 왕등도까지 와서 싹쓸이 해가버리니 고기가 남아나겠어.” 능숙한 손놀림으로 내년 실뱀장어 잡이를 위해 그물을 손질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마 이들이 곰소항의 마지막 어부가 될지도 모른다. 꿈을 잃었기 때문일까. 뿌연 황사 아래 물결치는 회색의 바다가 쓸쓸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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