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5 |
[포구] 기억속의 포구
관리자(2006-05-10 15:25:30)
모항, 그 아득한 기억이여!
글| 박형진 시인
예부터 조기로 유명한 칠산바다는 법성포와 고군산열도, 중간쯤에서 바깥 바다 쪽으로 멀리 조그마한 섬 일곱 개가 있어 칠미라고도 하는 칠산도를 삼각으로 연결한 그 안바다를 말한다. 이 칠산바다를 향해 얼굴을 내밀고 언제라도 고기를 쫓아 배를 띠울형국으로 서 있는 게 변산반도이다. 변산반도는 다시 격포를 기점으로 하여 북서쪽으로 이어지는 해안의 마을들과 남동쪽으로 품을 벌린 여러 바닷가 동네들을 거느리며, 고창사이에 칠산바다의 자궁과도 같은 곰소줄포만을 두었다.
모항은 이 곰소 줄포만의 길목 어귀에 있는, 오십여 가구의 자그마한 어촌마을이다. 본디 이름은 띠목이다. 띠(茅)풀이 많이 자라는 목(項)이라는 뜻인데 우리나라 땅 이름이 다 한자로 먹칠됐듯이 띠목도 예외가 아니다. 다만 본디 뜻을 모르는 사람들이 모항이라고 했을 때 막연하게 어머니 품 같은 느낌을 갖는, 그런 기억으로 나마 바뀐 이름이 위안을 받는 곳이다.
마을은 산 밑이 아닌 바다 쪽으로 나아가서 앉아있고 오른쪽에 작고 아담한 백사장과 왼쪽 뒤로는 재소쿠리처럼 생긴 또 다른 갯벌로 된 만이 있다. 그야말로 어부들에게는 나아가 어업하기 좋고 들어와 피항하기 좋은, 천혜의 포구이다.
눈 많은 변산의 기나긴 겨울이 가면 남향으로 앉은 이 모항의 봄은 따뜻한 남풍과 함께 칠산바다로부터 온다. 봄바다에서 가장 먼저 잡히는 고기는 주꾸미이다. 이 주꾸미는 일년 내 모아둔 소라껍질을 겨울에 꼬아둔 새끼나 칡덩쿨에 매달아 바다에 넣어두면 정월대보름이 지나고 이월초생부터 잡히는 고기이다.
지금이니까 질긴 나일론 줄에 수입산 소라껍질을 써서 많이 하는 집은 삼사만 개에서 삼십만 개까지 사람을 두고 하지만 옛날이야 그럴 수가 없었다. 고작 몇 백 개에서 많아야 천개를 넘지 않는, 그야말로 한 끼의 끼니를 때우고 남으면 이웃과 나눠먹는 보릿고개의 양식이었을 뿐이었다.
주꾸미 잡이가 끝나는 봄의 끝쯤 해서부터는 오징어가 잡히기 시작한다. 오징어는 등태라고 하는 통발로 잡거나 배에서 그물을 쳐 잡는데 이 등태역시 겨울부터 짬짬이 만들어 두는 어구이다.
오징어는 주꾸미와는 달리 값이 있고 따 말릴 수 있는 고기라서 많이 잡히는 때엔 마을 앞 갯바위에 온 동네 사람들이 새하얗게 나와서 북새통을 이루고 굵은 자갈돌이 뒹구는 장불이나 편편한 바위, 지붕위에까지 오징어 말리는 굿이었다.
일손이 딸릴 때는 우리 같은 조무래기들도 학교 갔다 와서 마루에 책보를 던져놓고 앞장불로 내달아가 오징어 한 뭇을 따는데 십 원씩을 받고 거들어야 할 정도였다. 지금 제철의 어판장에 나와서 마리당 만 오천원 이상씩 받는, 살이 뱃사람들 손바닥처럼 두꺼운 참오징어였다.
이 무렵이 보리누름 철이기도 한데 모항 포구의 어업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때는 바다의 모든 고기들이 살이 오르고 알이 배이는 철이라 잡히기도 많이 잡히려니와 가짓수도 이루 셀 수가 없다. 큰 고기는 큰 고기대로 작은 것은 작은 것대로 잡아서 젖을 담거나 말리거나 상고배에 넘기거나 하고 주체할 수 없이 많이 잡히면 바다에 그대로 버리거나 부엌 아궁이 재를 버무려서 거름으로 쌓아두었다.
지금 시장에서 비싸서 못 사먹는 알 배인 가제나 쏙 개불, 젓 담그기도 모자라서 중국 것을 사다 담그는 젓거리인 고너리 딩팽이들이 그것이며, 심지어는 횟집에서 먹는 광어 같은 것들도 많으면 버리는 고기들이다.
제철에 나는 제대로 된 것 아니면 이 칠산 바다의 어촌에서는 어디나 막론하고 다 그랬던 것이다.
한달에 두 번 조금이 돌아오면 마을 앞 장불에는 배에서 목그물을 퍼 내려서 산의 갈나무(굴피나무)뿌리껍질을 벗겨다 큰 가마솥 걸고 함께 삶는데 이것은 목그물이 바닷물에 삭지 말라고 하는 갈 인 것이다.
또 한쪽에서는 시뻘건 황토흙 퍼다가 가마솥에 광목천과 함께 삶고 펴 말려서 여자들이 새 돛을 만들거나 헤어진 돛을 꿰매는 게 일이다. 이것도 다 돛이 질기고 바닷물에 삭지 말라는 것이지만 돛을 황포로 만드는 것은 멀리서도 눈에 잘 띠게 함이란다.
어디 이뿐이랴, 조금에 한번씩, 배 밑창에 꾸적슬지말고 좀 먹지 말라고 갈빛보다도 더 검붉은 웃통 벗은 뱃사내들의 연화하는 모습이며 기다란 간짓대로 배의 몸을 쳐대는 배치기, 이것들이 어울려서 바닷가 마을은 흥성하기 이를 데 없었다.
칠산의 대명사인 조기는 이 월경부터 남녘에서 거슬러 오르다가 바로 이 보리누름 철에 이곳에 당도하게 되는데 이때는 조기마다 다 뱃속에 알이 가득 배일 때여서 이곳 칠산에서 잡히는 조기를 최고로 쳤던 것이고 지금도 조기 없인 제사 못 지내는 것이 나라 풍습인 까닭에 해마다 이말 때면 전국의 배들이 조기를 쫓아 칠산으로, 칠산으로 몰렸던 것이다.
그러니 조금 때면 이 동내 배들 말고도 저 아랫녘에서 경상도에서 몰려온 배들이 곰소 줄포만을 가득 채우고 그 중에서도 배 대이기 좋은 모항 포구는 서로 배를 대일려 쌈을 하다시피 했었다. 모항 같은 적은 동네가 그래서 앞 장불에 있는 집들은 거의 다 색시를 대려다 앉히고 장사하는 술집이었고 지금도 더러 그 흔적이 남아있다.
배들이 조기를 잡으러 칠산으로 나갈 때는 너나 할 것 없이 정성을 모아서 마을 앞 커다란 당산나무에 고사를 모셨다. 이 당산나무는 바닷가에서 잘 자라는 팽나무인데 칠산의 배들이 풍랑을 만나고 날이 어두워졌을 때 이 나무를 멀리서 보고 모항을 찾아들었다.
이 당할머니는 딸을 여럿 두어 곰소 줄포만의 여러 당집의 지킴이로 시집을 보냈다는 옛말이 있고, 그것을 증명하듯 얼마 전 어느 대학에서 한 지표조사에서 이곳 일대가 제사유적이었음이 밝혀졌다.
칠산바다의 조기는 잡히는 대로 위도 법성포 군산 줄포로 팔려나갔는데 조기를 잡으면 먼저 하는 게 변산의 고사리를 꺾어다 넣고 탕을 만들고 밥을 지어서 윗목에 차려놓는 것이다. 배에서도 가장 크고 좋은 고기로 배의 성주를 대접한다. 이것이 조기심리라는 것이다. 들녘에서 햅쌀로 하는 올기심리와 같은 것이다.
철철이, 바다면 바다, 산이면 산, 들이면 들에서 그 힘써 거둔 귀한 것을 차려놓고 모든 죽은 것에게나 산 것에게 예를 다하고 자연의 생김에 자신들을 맞추었던 사람들이 다시 조금이 돼서 이 마을에 돌아오면 하루 종일 젓독을 푸고 배를 연화하고 배치기를 하고 갈을 하고 구릿빛 억센 품에 색시를 품고 쌈을 하고 다시 황포 돛을 달아 올려 바람을 등에 지고 곰소 줄포만이 미어터지게 배질을 하던─
그것들은 이제 다 어디로 갔는가?
박형진 | 1992년 <창작과 비평> 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바구니 속 감자싹은 시들어가고』와 『다시 들판에 서서』가 있고, 산문집으로 『호박국에 밥 말아먹고 바다에 나가 별을 세던』와 『모항 막걸리집의 안주는 사람 씹는 맛이제』가 있다. 현재, 모항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