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만의 백제기행 글| 조성진 가족동물병원장 은수의 성화에 밤잠을 설친 주희와 나는 눈을 겨우 뜨고 시계를 본다. 여섯시 반. 오랜만에 맞이하는 새벽이다. ‘꼭 밤톨 깎아 논 것 같다’고 하시는 제 할머니 표현처럼 똑 떨어지게 생긴 것 보다 감사한 일은, 욕심 없고 나눌 줄 아는 마음이다. 저 먹을 거 다른 사람 입속에 넣어주기 좋아하고, 손에 쥔 것 뺏겨도 웃어주니 내가 도리어 은수에게 세상을 배우고 있는 요즘이다. 그런데 이런 은수가 오직 한 가지 양보 안하는 것이 주희 젖이다. 돌도 지나고 태중에 동생도 생기고 있으니 젖을 좀 떼겠다는 주희의 결심에 반항이라도 하듯 보채는 통에 선잠 잔 것이 한 달이 다 된다. 피곤은 하지만 채비를 하려면 좀 서둘러야 했다. 고양이 세수를 하고 짐을 꾸려 집을 나섰다. 여명 뒤의 생명력 가득한 하늘이 갓 뜯어온 상추처럼 싱싱한 맛이다. 아침의 기운과 여행의 설렘에 우리는 마냥 신이 나서 전주로 향했다. 서두른 출발로 생각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입암산성으로 향할 문화저널의 버스 앞에 여행객들의 모습이 보였다. “저 예약은 안했는데, 어제 전화 드리고 지금 군산에서 왔어요. 갈 수 있겠죠?” 갑자기 뛰어든 어떤 놈의 채근에 문화저널 김승민 실장이 좀 당황한다. “내일 몇 시에 가지?” 백제기행을 은수와 함께 가야겠다고 해놓고 출발전날 언제 집을 나서냐는 주희의 물음을 듣고서야 예약을 못 한 것이 생각나 백제기행에 전화를 했다. 이미 자리는 만석이었다. 지난번 12월에는 폭설로 예약한 것을 취소했는데, 제발 이번에는 꼭 가게 해달라는 간청에 친절한 백제기행 여직원이 네 번이나 확인하고 확인하였지만 빈자리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출발당일 못 오는 사람도 두 명쯤은 있겠지 하는 무모한 기대로 일요일 아침 시간 전에 백제기행 출발지인 태평양 수영장 앞으로 그저 와봤던 것이다. 이런 터무니없는 실수가 가져올 난처한 상황을 김승민 실장의 너그러움으로 모면할 수 있었다. 김 실장님은 당신이 보조의자에 앉아 가는 불편을 감수하고 우리 가족에게 기꺼이 자리를 내어 주었고, 덕분에 백제기행 버스는 인원초과 상태가 되었다. 김 실장님의 배려와 수고로 우리 가족은 소중한 여행에 참가하여 새로운 사람, 새로운 장소를 좋아하는 은수는 유년의 추억 하나를 선물 받았다. “자아, 지금부터는 19세 이하 미성년자 청취 불가입니다.” 귀신사(歸信寺) 남근석과 남도의 남근숭배문화에 대해 설명하는 조법종 교수의 재담이 이어졌다. 사자인지 개인지 형체가 불분명해진 석수(石獸)가 있고, 그 위에 대나무 모양의 중간 기둥이 우뚝 서고 귀두가 치솟은 모양이다. 음기가 가득한 모악산 자락의 비구니 사찰이었던 귀신사에 양기를 채우려는 풍수지리와 음양사상의 내력이 있음을 알려주신다. 순간 나는 부처님의 32상중 음장상(陰藏相)이 떠올랐다. 석탑에서 내려 보이는 귀신사 너머 들녘은 찬바람에도 봄을 준비하고 있었다. 처음 문화저널에서 기획한 이번 백제기행의 여정은 정읍을 지나 노령산맥에 오르고 입암산성을 거쳐 백양사와 장성에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일행 중 아이들이 많아 입암산성 오르는 길이 부담스러울 것이기에 귀신사로 길을 돌린다, 하는 조법종 교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차에서 내려 산에 오르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다. 버스는 산세가 비교적 험준하다는 노령산맥으로 향하는 대신 아직 새순이 돋지 않아 마른 가지가 운치 있게 남아있는 국도를 여유롭게 돌아 김제시 금산면에 멈췄다. 대동강도 풀린다는 우수가 지나고 경칩이 낼 모래인데 이월 바람에 김칫독 깨진다는 말을 피부로 느꼈다. 다행이 은수는 춥게 키워 감기도 안 걸린다. 하지만 뺨과 입술이 벌게지는 것이 영 편치는 않은 모양이다. 조법종 교수께서 입암산성 대신 귀신사로 일정을 바꾸신 속 깊은 배려를 버스에서 내려 귀신사를 오르는 길에 이해할 수 있었다. 10여분 걸어올라 들어선 경내에는 귀신사 증축 공사가 한참 이었다. 대웅전을 지나 뒷길로 산중턱에 오르니 차분하게 가부좌 틀고 내려앉은 것 같은 귀신사 삼층 석탑이 눈에 들어온다. 널찍한 기단(基壇)위에 탑신(塔身)이 3층으로 올라 있고 얇고 넓은 지붕돌과 처마가 백제 석탑 양식을 이어받은 고려시대의 석탑 같다고 조법종 교수께서 일러주신다. 백제는 탑신보다 처마가 널찍하여 풍만한 아줌마 같은 탑을 쌓았고, 신라는 상대적으로 처마 폭이 좁아 날렵한 처녀 같은 탑을 올렸는데, 고려에 이르러서는 기단과 탑신이 넓어져 둔중한 모습으로 변해갔다는 자세하고 세심한 강의가 이어졌다. 답사 현장에서 유적과 유물과 경관을 보면서 설명을 직접 듣고 배울 수 있는 이 맛을 느끼려 백제기행에 참가하는 것이겠다. 조 교수님의 설명을 듣고 보니 단순한 석탑이 1000년의 세월 동안 예술과 문화의 향기를 품고 있는 ‘작품’으로 다가온다. 유홍준 선생의 말처럼 알아서 사랑해야 보이게 된다. 석탑아래 낙엽을 밟으며 신나서 아장거리고 돌아다니는 은수를 통해서도 요즘 이걸 배운다. “은수! 저어얼 - , 절 해야지, 저어얼 -” 귀신사를 나와 백양사로 향하는 버스에서 참가자들이 자기소개를 하였다. 인사도중 은수에게 절을 시켰고 은수는 평소 연습 잘 한 대로 어설픈 절을 넙죽 했다. 세심하고 감칠맛 나게 강의와 답사 안내를 해주신 조법종 교수께서 은수에게 백제기행 사상 최연소 참가자라 했다. 역시 이번 기행에도 가족단위 참가자가 많았다. 기획과 배움이 있는 문화답사. 기행 참가자들의 인사를 통해 기억은 학창으로 거슬러 오른다. 노태우 덕분에 매운 공기가 흠뻑 절어있던 88년, 학교 앞 서점에서 오백 원짜리 문화저널을 우연히 발견하고 집어든 것이 백제기행과의 인연이었다. 한동안 월별로 모아두다가 이사를 다니며 사라진 당시 창간 초기의 문화저널은 참 초라한 책이었다. 굵은 주름이 팬 시골장터 상인의 모습과 허리 굽은 할머니의 실루엣 영상이 흑백사진으로 다달이 실리는 단순한 편집, 투박한 종이의 거친 북 디자인. 하지만 그 맛은 김치처럼 싱싱하고 건강했다. 기억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나는 문화저널의 몇몇 기사에 감성과 사상의 자극을 크게 받았던 것 같다. 그 뒤 백제기행을 두 번 따라 갔었다. 한번은 군대 휴가 나온 동기와 함께였고, 한 번은 나 혼자였다. 10년도 넘은 일이다. 변산반도의 반계 유형원 유적지와 조각공원과 내소사의 꽃창살 문양과 화려한 처마 밑 공포(拱包)에 대한 강의가 지금도 생각난다. 그러나 내게 더 깊은 인상을 준 것은 가족단위의 기행 참가자들이었다. 식구가 함께 답사에 참가한 모습은 무척 부러웠고 아름다워 보였다. 시골에서 자란 내게는 여행과 문화와 추억을 답사를 통해 가족이 함께 공유하고 있다는 그 행위가 하나의 문화적 충격이었다. 그때 나는 이미 오늘의 여행을 계획했었다. 결혼하면 꼭 아이를 데리고 문화저널에 참가할 것이다! 아직은 바람 끝에 한기가 남아있는 2006년 2월의 이른 봄날, 살면서 품은 소박한 꿈 하나가 은수와 문화저널을 통해 실현된 것이다. 이뭣꼬. 내 키 두 배는 족히 넘는 큰 석판에 만안스님의 유명한 화두가 새겨져있는 백양사에 이르렀다. 백제 무왕때 흰 석벽 같은 산자락에 터를 잡아 백암사(白巖寺)라는 이름으로 처음 세워진 이 절에서, 조선 선조때 환양선사가 금강경을 설법하는데 흰 양이 산에서 내려와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하여 백양사(白羊寺)라고 개명되었다는 조 교수님의 설명을 들으며 차에서 내렸다. 백양사의 입구는 한산했다. 볕은 따뜻해지고 있는데 바람 끝은 아직도 차가웠다. 밝은 햇살과 찬바람. 음양의 조화. 이제 겨울에서 봄으로 옮겨가는 생동의 기운이 가득했다. 맑은 공기를 마시고 주차장 찻집에 들러 은수 기저귀를 갈아주고 금강경 독송 테이프를 하나 샀다. 내가 무얼 알거나 전공한 바는 아니지만 요즘 성경과 금강경을 함께 이해해보는 재미에 빠져있어 금강경 독송을 백양사에 오면 꼭 하나 사가야지 마음먹었는데, 일상에서 얻는 작은 기쁨 하나를 또 성취한 것이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이 없다는 부처님 말씀은 가히 양이 듣고도 능히 깨달을 것 같은 진리로 다가온다. 은수 기저귀를 갈아 채우고 나서니 일행으로부터 많이 뒤쳐졌다. 석종형부도(石鐘形浮屠)로는 유일하게 한 점 남아 있어 귀물이라는 백양사소요대사부도 앞에 모여 설명을 듣고 있었다. 부도가 줄지어 서있는 풀밭위로 봄볕이 내렸다. 백양사 사천왕성 앞으로 줄줄이 자리를 옮긴다. 육중하게 버티고 서있는 ‘이뭣꼬’, 나는 무엇을 화두로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은수에게는 어떤 화두를 주어야 할까? 하고 속으로 생각해보았다. 백양사 대웅전의 자태는 정말 백암(白巖)이라 불러야 어울릴 은백의 암벽과 딱 맞아 떨어지며 지극한 아름다움을 풍기고 있었다. 차분하게 치켜 올라가는 처마 끝자락과 맑은 하늘 그리고 백색 암벽. 한참을 느끼고 쳐다보았다. 참 근사하다! 저게 우리 건축의 미학인가보다. 조 교수님이 법당건물과 건물의 구조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나는 대웅전 처마 끝자락과 처마 뒤의 백암과 백암 위의 하늘만 감상하고 있어 그 설명을 놓쳤다. 바람은 간간히 차게 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법당의 기둥글, 주련(柱聯)을 풀이하는 말씀이 이어지고 있었다. 잠시 해설을 듣고 있는데 법당 안에서 들려오는 독송. 수리 수리 마하수리 사바하! 스님의 독송은 조 교수님의 설명을 밀치고 귀에 먼저 들어왔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사바하(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라고 귀에서 울렸다. 어쩌면 여기 있는 모두는 피안(彼岸)으로 가기 위해 이 기행에 참가 했을지 모른다. 백양사에서 나는 줄곧 딴생각만하고 있었다. “어머니 한 잔 하세요.” 백양사를 빠져 나온 우리는 점심을 들기 위해 식당에 모였다. 산채정식이 풍성하게 상을 채우고 있었다. 아침을 거르고 시장하던 참에 음식이 퍽 반가웠다. 우리 식구와 마주 앉아 인사를 나눈 군산의료원 정일관 선생이 당신 모친의 소주잔에 술을 채운다. 군산의 월명산과 은파 저수지를 참 좋아하셨다는 정 선생님의 어머님은 꽤 연세가 들어보였음에도 밝은 표정과 맑은 피부로 건강해 보였다. 나는 내 어머니를 모시고 올 생각을 했던가? 노모의 음식을 챙기고 소주를 나누는 모습은 내게 많은 생각을 일으켰다. 인생의 행복은 저런 모습이다, 라고 느끼며 시장기를 채웠다. 주희는 은수에게 밥을 먹이느라 한술도 들질 못한다. 언제부터인가 집을 나와 식사할 때면 내가 서둘러 먹고 은수를 보아야 주희가 먹는 것이 순서가 되었다. 부성보다 모성이 더 큰 사랑이다. 은수 몫으로는 고구마, 잡곡밥, 사과를 싸왔다. 건강하다는 것은 육체와 정신과 영혼이 함께 건강한 것이고, 그 근본이 되는 것이 음식이기에 은수가 생기고부터 우리는 식단을 유기농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단백질 신화의 허상과 동물성 식품에 축적되는 항생제와 호르몬제등의 유해에 대한 임상 정보와 과학 자료를 보아온 나는 가능한 채식으로 바꾸길 주장했고 다행히 주희와 은수가 잘 따라 주었다. 은수는 고기와 과자보다 콩과 과일을 더 좋아한다. 주희도 나물과 채소를 더 좋아한다. 백양사에서의 점심이 산채정식으로 차려진 것은 그래서 더 반가운 일이었다. 정 선생님의 모친께서 늦게 식사하는 주희에게 이것저것 챙겨주신다. 배가 부르니 이제 좀 덜 춥다. 차에 오른 우리는 전남 장성으로 향했고, 우리 식구는 한잠 곤하게 잤다. 중간에 답사지 한 곳을 잠으로 놓치고 필암서원에서 정신을 차렸다. 아담한 서원건물이 조용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홍살문을 지나 확연루 아래 낮은 대문으로 고개를 숙이고 지나 서원 안에 들어섰다. 동네 학생들에게 가르쳤는지 칠판에 문방사우에 대한 글과 설명이 남아있다. 장성 아이들은 지금도 서원에서 공부를 할 수 있다니 이런 것이 유산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선학후묘(先學後廟)라고 서원 앞쪽에 자리 잡은 청절당에서 공부를 하고 뒤쪽에 사당을 두어 제사를 지낸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래, 배움이 먼저다. 제사는 기억이란다. “사교육의 치열함과 피곤함의 대안을 찾는다면 부모가 아이와 함께하는 독서와 여행의 기회를 가능한 많이 가져봐라, 그것이 아이에게 상상력의 토양을 제공할 거다.” 백제기행 다음날 초상집에서 만나 교육전쟁을 염려하는 내게 조언을 해준 문화저널 문윤걸 형의 말에 공감을 한다. 우리 일행은 필암서원에 쏟아지는 오후 햇살을 받으며 종도리 상량문(上樑文)의 연호를 계산하는 방법, 서당은 지금의 초등학교에 해당하고 서원과 성균관은 중고등학교와 대학에 상당한다는 등의 자세한 강의를 듣고 나왔다. “10년 만의 기행소감을 한 번 써보시죠?” 필암서원 앞뜰 자갈밭에서 볕을 받고 있는 은수를 쳐다보는 내게 김승민 실장이 말을 건넸다. 기행문이라니, 별생각 없이 편한 마음으로 오랜만에 나들이라고 온 것인데, 하는 순간 나는 김 실장님의 제안을 감사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말을 들었다. “돌에 아빠와 같이 백제기행을 다녀왔다는 기록은 따님에게 좋은 선물이 될 겁니다. 편안한 글로 써보세요.” 이번 기행이 시작할 때부터 지금 이글을 쓰고 있는 순간까지 줄곧 나는 김 실장님에게 큰 신세를 지고 있는 셈이다. 은수를 위한 소중한 기회까지 선물로 받았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돌아오는 길 황룡면 장산리의 동학농민혁명 황룡전적지에서 큰 굴뚝같은 죽창의 조형을 보기에 앞서 장성 홍길동 테마파크에 들렀다. 백제 땅은 동학에서 광주로 이어지는 의지의 땅인가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홍길동이 조선왕조실록에 실존 인물로 기록되어 있고, 그 출생지가 전남 장성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장성군은 홍길동을 테마로 하여 콘텐츠와 문화상품을 개발하는데 참 많은 노력을 하고 있었다. 역사와 문화는 재생산되어야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홍길동 테마파트에서 캐릭터 인형들을 배경으로 은수 사진을 찍어주고 은수가 시설물의 형태와 조명 변화에 관심 있어 하는 모습을 보면서 군산을 생각했다. 장성군은 문화적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콘텐츠를 발굴하고자 이런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군산은 왜 그렇게 문화적으로 가난한 것일까? 전북의 문화는 오직 전주의 문화로만 집중되어야 하는가? 하는 잠깐의 사념과 함께 허균이 변산에서 홍길동전을 집필하였기에 홍길동의 탄생지는 문학사적으로 부안일 터인데 이제는 장성이 홍길동의 고향이 되어가고 있다는 조 교수님의 설명을 생각하며 전주로 왔다. “4월에는 날씨가 참 좋겠다. 다음에 또 올 거야 ?” 늘 자신의 바람보다 먼저 상대의 의견을 먼저 물어보는 주희에게 4월에 은수랑 다시 오자고 약속을 했다. 4월을 기대한다. 조성진 | 수의학박사. 가족동물병원장과 원광대학교 생명자원과학대학 겸임교수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