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홍성덕 전북대박물관 학예연구사 개발이 앗아간 것은 잘려나간 산자락이나 곧게 뻗어버린 물줄기만은 아니다. 깍여버린 산 능성이는 넓은 도로가 차지하고 앉아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위용을 자랑하지만 결코 대체할 수도, 되돌릴 수 없는 것은 전주사람들이 누린 조망권이다. 다가산이나 오목대가 그랬듯이 곤지산 역시 시내를 바라보는 주요한 포토 포인트였다. 전주에서 가장 많이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남문밖 시장이었다. 물산의 고장이라는 위용을 자랑하기라고 하듯 여기저기에서 몰려든 사람들은 구경하기에 딱 좋은 곳이 바로 곤지산이다. 곤지산은 싸전다리 건너 오른쪽에 위치한 봉우리이다. 곤지산보다는 초록바위로 더 알려진 곳이고 전주천 좌안도로가 뚫리면서 심하게 잘려나간 곳이다. 북쪽의 건지산에 대응하는 남쪽의 봉우리라는 의미의 곤지산으로 전주부성의 북문과 풍남문을 잇는 선상에 위치하고 있어 곤지산에 올라보면 전주부의 중심축을 조망할 수 있었다. 때문에 곤지산은 이래저래 전주사람들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흑석골에서 내려오는 공수내는 곤지산 자락 초록바위에 부딪쳐 방향을 틀어 전주부를 향해 달려드는 형국이었다. 지금은 복개 공사가 이루어져 하천이라기 보다는 하수구와 같은 인상을 주고 있지만 예전에 장마가 지거나 하여 물길이 밀려들 때는 전주천 물길을 북쪽을 밀어 남부시장을 잠기게 하곤 했다 한다. 전주천의 물길이 한벽당을 돌아 서쪽으로 흐르면 남고산상에서 흘러내리는 남고천의 물길과 공수내가 전주천의 물을 남에서 북으로 밀어붙이는 형세여서 전주부성은 범람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이유로 한벽당에서 남문에 이르는 제방은 조선초부터 쌓여지기 시작했다. 곤지산 및 초록바위를 물로 공격한다해서 붙여진 ‘공수내’라 했다하기도 하고, 그 때문에 바위에 늘 이끼가 껴있어서 ‘초록바위’라 하기도 했다한다. 초록바위 앞 전주천변은 전주역사에 회한의 설움을 담고 있는 곳이다. 어린 천주교 신자들이 수장되었고, 동학농민혁명의 한 주역이었던 김개남이 처형된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죄인의 목을 잘라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곤지산 꼭대기에 있는 소나무에 메달아 두었던 효시의 장소로 후대 사람들은 전주의 3대 바람통(바람퉁이)로 손꼽은 곤이기도 하다. 바람이 시원한 세 곳을 가리키는 3대 바람통은 좁은목, 초록바위, 숲정이였다고 한다. 이 세 곳 모두 사실 지형상 시원한 곳임에는 틀림없지만, 초록바위와 숲정이는 게다가 처형된 곳이었으니 구천을 떠돌던 원혼들이 눈을 부리고 있어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한기를 느낄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공수내가 복개되고 좌안도로 확장으로 심하게 잘려나간 초록바위와 곤지산은 그 명성을 모두 잃었다. 꺼져가는 명성을 달래기라도 하듯 그나마 이팝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힘겹게 한해 한해를 넘기고 있을 뿐이다. 역사적 상징공간으로의 부활은 힘들까? 청개천을 하늘에 연 서울을 보면서 초록바위 밑이라도 하늘을 열고 그 앞 삼각지를 사들여 조그마한 사적공원을 만들면 어떨까. 심하게 잘린 그 자리에는 공공미술프로젝트던지 아니면 뛰어난 기술력으로 상징적 의미들을 부활시키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