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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4 |
[캄파넬라'태양의 나라' (1602)] 어둠 속에서 태양을 꿈꾸다
관리자(2006-04-08 15:12:51)

캄파넬라(1568~1639)는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분살(焚殺)된 브루노(1600)나 갈릴레오(1633)와 동시대를 살다간 이탈리아의 인문주의 사상가이자 시인이다. 그 역시 시대의 증상을 온 몸으로 앓은 르네상스의 전위이며, 카톨릭 전제주의의 모진 학대를 겪어낸 수난자이기도 하다. 장장 27년을 감옥에서 보낸 이 불굴의 사나이는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삶의 주인공으로서, 그 자체로 <몽테크리스토 백작>(1844)이나 영화 <빠삐용>(1973)의 극적 흥미와 긴장을 방불케한다. 물론 그가 구상한 <태양의 나라>(1602)는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1516)나 베이컨의 <노바 아틀란티스>(1617)와 더불어 근세 유토피아 문학의 삼발이(tripod)를 이룬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당대의 고관이자 권력자였던 모어나 베이컨의 것에서 찾아볼 수 없는 핏빛 삶의 지향이 스며있다. 아울러, 그가 '태양'을 꿈꾸었던 1602년은 나폴리의 감옥생활이 가장 처절했던 시기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만하임의 출세작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1929)에서 유토피아는 '체제부정적 허위의식'이라고 간결하게 정의된다. 현존재와의 어긋남을 좌절이나 허무 대신 가상적 투기(投己)를 통해 미래화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와 달리 개혁과 해방, 비판과 초월의 정신으로 기능하면서 사회적 불만을 전향적으로 수렴하는 환상적 꼭지점, 혹은 누빔점(point de caption)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호르크하이머나 아도르노 등도 일면 유토피아의 목적론적 타락을 경계하면서도 '부정적 변증법'을 위해 반드시 그 정신을 보존해야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를 포함한 근세 유토피아 문학 일반의 양식은 '없는 땅(u-topos)'이라는 부정적 상상력을 통해 '현실의 땅(topos)'을 비판적으로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영수(零數)라는 빈 터의 지평을 통해 수 일반을 보다 근본적으로 자리매김하는 것과 닮았다. 이를테면 궁박(窮迫)한 현실을 뚫어낼 수 있는 전망이 없을 때, 오히려 그 없음(부재)으로 되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는 상상력이야말로 유토피아적이며, 바로 그 발본성에서 유토피아 의식은 혁명적 부정성으로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1940년 9월 26일, 나치를 피해 망명길에 오른 벤야민은 포르 부(Port Bou)에서 국경관리들에게 봉쇄당한 채 자살한다. 죽기 직전 그는 동행이었던 비어만(Birmann) 부인에게, 자신이 다량의 모르핀을 먹었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이것을 병(病)으로 진술해서 위기를 돌파해 보도록 권유한다. 이를테면 유토피아란 이런 것이다; 단지 공상이 아니라, 육신의 죽음과 그 부재가 역설적으로 되살려내는 새로운 존재에의 꿈이 곧 유토피아적인 것이다. 비록 <태양의 나라>에 드러난 플라톤적 공동체 실험은 당대의 조건과 그 한계를 소박하게 품고 있지만, 존재와 불화할 수 밖에 없는 모든 이들에게 부재의 태양빛을 되새겨보게 하는 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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