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진동규 시인 “이봐--” 합바지 저고리에 흰 고무신 허름한 차림의 서 처사다. 맞다. 나를 잡아 세운 것이 그분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어깨를 붙잡은 것도, 그렇다고 소리쳐 부른 것도 아니다. “이봐” 하고 불렀나? 아니다. 그런 소리를 들은 것 같지도 않다. 나를 어떻게 세웠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잡아 놓은 것만은 사실이다. 선운사를 한두 번 갔었던가. 그리고 그 동백꽃을 한두 번 보았었던가. 그런 나를 아무런 힘도 안 들이고, 그렇다.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잡아 세웠다. 큰 기침으로 불러 세운 것도 아니다. 그래 두리번거리고 다시 앞 뒤 살피고 해도 인기척 하나 없다. 이 시는 문장으로 보면 두 문장으로 되어 있다.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디다.’ 여기까지는 그냥 숨도 안 쉬고 군시렁군시렁 혼잣말처럼 토해 놓고, 침 한 번 꼴깍 삼키고는 한 마디 더 보태는 것이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디다.’ 아마 내가 뭔 말인지 잘못 알아듣는 것 같아서 한 마디 더 일러 준다고 글쎄 남았드라니까 하면서 박아주는 말이었다. ‘거 뭐시냐 거 있잖아’ 정도의 도움말 삼아 덧대주는 한 마디가 그것이었다. 선운사 동백꽃을 볼라고 갔는디 근디 안피었응게, 긍게 안 피었으면 말지 어쩌란 말이여! 억장이 무너지는 것은 그거다. 뒤에 나오는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디다.’ 정말이지 이 대목에 이르러서는 ‘처사니임, 서 처사니임--’ 도포자락이라도 붙들고 애원하고 싶은 것이다. 시를 한없이 어렵게 몰고 가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때가 일러 피지 않은 것은 나도 몇 번 경험했다. 그놈의 동백 눈밭에 피어야 동백이지 봄 다 되어서 피면 춘백이지 무슨 동백, 군시렁대기도 했다. ‘때가 일러’라고 하는데 여기서부터 시는 우리가 자칫 그냥 놓쳐 버리고 말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자연의 순환 속에서의 동백꽃의 때가 아직 아니다는 말씀 같은데 나의 성급함을 살가운 눈 흘김으로 탓하면서 선운사 고랑의 동백꽃에 대한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짧은 시에 선운사를 두 번씩이나 등장시키면서 또한 리듬 효과까지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정작으로 그 특별한 가치는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백이 속에 감추어 두고 있었던 것이다. 막걸릿집 주모는 젓가락으로 상을 두들겨 대고 있지만 그 고라당까지 흘러 들어와 동백꽃으로 앉아 있었던 것이다. ‘먼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이었던 것이다. 그 누님이 젊음을 다 바쳐 헤매었을 세월을 어찌 말로 다 할 수가 있겠는가. 서 처사는 이렇게 말한다.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디다.’ 힘도 안들이고 ‘오히려’라고 말하는 것이다. 오히려 라는 부사 뒤에 와야 할 술어로는 ‘발갛다’라든지 ‘피어난다’라든지 여타한 동사나 형용사가 있을 법도 한데 ‘남았습디다’ 해버리는 것이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디다.’로 반복하면서까지 허튼 상념을 말끔히 씻어 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 대목이 우리를 다시 한 번 동백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데 옛날에 보았던 그 동백꽃을 다시 보러 왔다는 그런 낭만의 수준을 훌쩍 넘어 서는 절대적인 무엇인가 하나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선운사 동구’의 미학이 여기 있는 것이다. 그저 막걸리나 한 잔 권하고 그러는 듯한 허심한 친근미 또한 이 시의 매력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이다. 진동규 | 전북 고창출생. 전북대 국문학과와 전주대 미술교육과를 졸업했다. 시집 『꿈에 쫓기며』, 『민들레야 민들레야』, 『아무렇지도 않게 맑은 날』, 『구시포 노랑 모시 조개』, 시극 『일어서는 돌』, 수필집 『바람에다 물감을 풀어서』 등의 책을 내었다. 현재 전라북도 문인협회 회장과 온가람 문화원장을 맡고 있으며 전주예술상, 전북문학상, 자랑스런 전북인 대상, 후광문학상 등등을 수상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