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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4 |
[아산 송하영 유작전]내성(內省)을 통한 평정(平正)의 추구
관리자(2006-04-08 15:05:40)

글 | 이은혁 전주대 겸임교수 필자는 몇 해 전부터 전북서예에 관심을 갖고 그에 대한 정리작업에 힘을 기울여 왔다. 조선초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근600여 년을 몇 차례에 걸쳐 탐색한 결과, 대략 몇 개의 서맥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서맥은 김제를 중심으로 한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의 서맥이라 해야 할 것이다. 19세기 후반에 조성된 이 서맥은 20세기 말 강암(剛菴)과 아산(我山) 등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석정에서 유재(裕齋 : 아산의 先祖考)로, 다시 유재에서 강암과 아산으로 이어지는 서맥은 비로소 전북의 서예가 한국현대서예의 중추로서 자리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시각을 달리하여 조선중기의 서가인 여산인 송재(松齋) 송일중(宋日中)으로부터 서맥의 연원을 찾는 것도 전혀 무관한 일은 아니다. 아산선생은 한말유학자인 유재 송기면의 장손으로서 숙부인 강암선생과 더불어 이른바 국전기에 활약한 현대서가이다. 김제 출생으로 선생의 학예(學藝)가 이처럼 가학에서 비롯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금번에 열린 아산선생의 유작전은 이러한 서맥과 가학의 연원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일반적으로 유작전은 작가가 타계한 후 그의 유족이나 문하생들이 그 뜻을 기리고자 기획하는 전시이다. 따라서 작가의 일생과 예술세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귀한 자리인 것이다. 금번 유작전은 선생께서 타계하신 지 15년 만에 열리는 것으로 만시지탄의 감이 없지 않으나 선생의 고매한 인품과 서품을 돌아보기에 충분하였다. 번화함을 피해 한가히 선생의 유작을 돌아보며 서가보다는 선비로서의 지향과 탈속한 무욕의 삶을 회상할 수 있었다. 유작에서 서품보다는 인품이 묻어나는 것은 비단 나만의 사견이 아닐 것이다. 금번 유작전을 통해서 아산선생의 삶을 반추하는 데에는 대략 두 가지 측면에서 가능하다. 하나는 인물로서의 아산이며 하나는 서가로서의 아산이다. 온유돈후(溫柔敦厚)한 성품으로 유학적 삶을 몸소 실천한 데에는 가학의 영향이 크다. 비록 학자보다는 한의사의 길을 걸었지만 그것이 표피적인 증상보다는 근본을 다스린다는 점에서 보면 유학적 사고와 얼마간 공통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심신에 있어 평정의 추구라든가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헤아릴 줄 아는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 학문이든 의학이든 그 지향점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아산선생의 삶은 유학적 사고 속에서 인술을 통한 사랑(仁)의 실천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 반면 자신에게 있어서는 철저하게 내성(內省)을 일삼아 절제된 삶으로 일관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은 지인들을 통해 한결같이 회자(膾炙)되고 있다. 따라서 이번 전시에서 서품을 통하여 선생의 서학적 근거를 분석하고 또 그것의 가치를 논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이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유작전을 통해서 선생의 서품이 아닌 인품을 먼저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서가로서의 아산선생은 어떠한가. 선생에게 있어서 서예는 내면적 수양의 하나였음이 틀림없다. 이는 선생의 고결한 인품과 일치하는 서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결코 창조적 미의 세계를 추구하지 않고, 담담하게 자신의 내면을 조탁하는 일종의 자기수련의 과정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미를 찾아 나서는 모험적 예술가이기보다는 차분히 평정심을 추구하는 선비였다. 따라서 선생의 서품은 예(藝)보다는 도(道)에 그 지향점이 있으며 외형보다는 내면에 치중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화려한 기교와 수식보다는 단순하고 우둔하며 치밀한 결구가 그것을 증명한다. 대체로 한 서가의 경우 습작기에는 다양한 서예고전을 토대로 핍진한 필법을 숙련하지만, 이후에는 자기세계의 구현을 위해 독창성에 더 큰 관심을 보이게 된다. 보편적 학습을 통한 개성의 창출이며 이것이 이른바 온고(溫故)를 통한 지신(知新)이다. 아산선생의 경우도 이에 다름 아니다. 일생을 통하여 남겨진 작품을 일별할 때, 그 체계면에서 학습기로부터 예술관을 정립하기까지 서가로서 걸어야 할 일련의 과정을 철저하게 탐닉하고 있다. 대체로 그 과정을 살펴보면 당(唐)의 정통성으로부터 송(宋)의 혁신성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외에도 북위서(北魏書)와 한예(漢隸), 더 나아가 전주(篆   )에 대한 천착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총괄해서 말한다면 전자의 경우가 후자에 우선한다. 때문에 선생의 유작은 행초가 주류를 차지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당말 안진경(顔眞卿)으로부터 북송의 혁신파 서가인 황산곡(黃山谷)과 미불(米   )에 대한 혼융이라 해야할까. 그러나 고전을 섭렵하면서도 두드러지게 편향됨이 없이 독특한 자기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다. 특기할만한 것은 그 운필과 결구에 있어 외연(外延)보다는 내함(內涵)을 중시하며 유연한 묵법보다는 치밀한 필법을 고수하고 있음이 발견된다. 서품 속의 하나 하나의 글자가 마치 결혈(結穴)을 이루듯 내밀함을 보이고 있다. 이 또한 선생의 절제된 인품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금번 유작전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아산선생의 고결한 삶과 사랑의 실천이다. 서단의 중심에서 활동하면서도 생전에 전시를 열지 않은 겸손함에서 예술의 추구보다는 독실한 자기수련으로 서를 인식하였음이 자명하다. 특히 금번의 유작전이 선생의 혜안으로 선별된 것이 아닌 후손과 후학들의 정성으로 마련된 자리인 만큼 여기에서 우리는 예술로서의 서품보다 선생의 고결한 인품을 먼저 만날 수 있었다. 오늘, 유작전을 통해서 다시 만난 아산선생은 어쩌면 필자와도 인연이 깊다 할 수 있다. 1980년대 초 학부 재학시절 학과와 서도회의 강의에서 첫 인연을 맺은 이후, 필자가 1990년 비로소 서단에 입문할 때 다시 찾아뵐 기회가 있었으며, 같은 한의사로서 비슷한 성향을 지닌 나의 장인어른과도 매우 돈독한 사이였다. 후에 들은 사실이지만 선생의 투병 중에 장인께서 친구이자 의사로서 쏟은 정성은 미담으로 가슴깊이 새기고 있다. 이러한 인연 속에서 줄곧 한학과 서예에 대해 꿈을 일구던 필자로서는 선생이 감히 바라볼 수 없는 경외의 대상이었음을 고백한다. 비록 필자가 선생께 친자(親炙)할 기회를 얻지는 못했으나 그 고매한 인품과 가르침만은 고이 간직하고 있다. 선생께서 우리 곁을 쉬이 떠나셨지만 금번 유작전의 서품 속에서 초연한 선생의 모습과 잔잔한 음성을 상기할 수 있었음은 후학으로서 큰 감동이 아닐 수 없다. 선생을 굳이 선비라 표현하지 않아도 그 올곧은 삶과 치열한 정신을 서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은혁 | 전북 김제에서 태어났다. 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와 원광대 대학원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성심여대 대학원 한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대한민국 서예대전 대상, 전라북도 서예대전 우수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현재 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과 한국서예포럼 학술위원회 팀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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