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06.4 |
전주시립극단 제 67회 정기공연<베니스의상인>
관리자(2006-04-08 15:02:00)

좀 더 높은 곳으로, 진화하라! 글 | 최기우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진화(進化)한다. 작가는 390년 전에 죽었지만, 그의 작품은 오랜 동안 조금씩 변화하여 보다 고도(高度)의 것으로 발전하고 있다. 삶의 본질을 꿰뚫은 서사와 탄탄한 구성, 품위 있으면서도 매혹적인 대사……. 연극인에게 그의 희곡은 끝끝내 정복하고 싶은 산이다. 가장 큰 유혹은 다양한 형태로 변형가능한 극의 상징성, ‘비틀기’가 쉽다는 것이다.(하지만 원작이 워낙 좋아 비틀기도 어느 정도 수준이 된다는 평가를 받기에 너나 할 것 없이 셰익스피어 비틀기에 동참한다는 비난도 피해갈 수 없다) 지금껏 공연된 셰익스피어 작품들도 그의 영원함과 위대함을 확인하게 했지만, 지난해에는 특히 많은 극단에서 한국적 연극과 접목시키며 새로운 해석을 선보여 눈길을 끌기도 했다. 2006년 첫 작품으로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연출 조민철)을 선택한 전주시립극단(3.11~12,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 그러나 극단은 원작에 충실한 극의 전개 ― 사랑과 우정, 보편적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철저히 싸워야 하는가를 정언적 명령법으로 이야기했다. <베니스의 상인>에는 인간의 위선과 허영에 대한 비판과 법의 진정성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 있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결론이 아니라 죽음을 거론하며 깔끔히 정리하는 셰익스피어만의 해법. 권모술수가 난무하고, 무엇이 옳은 것인지 몰라 헤매는 우리가 시대를 초월해 다시금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찾았던 이유도 이 때문인지 모르겠다. 세 차례 열린 공연은 모두 매진. 빼곡하게 들어찬 관객들로 출렁거렸다. 유달리 가족과 대학생 동아리들이 많았던 것이 한 특징이다. 이유는 무엇일까? 셰익스피어라는 브랜드는 그만큼 절대적인 가치이기도 했고, 전주시립극단은 꽤 많은 고정 팬을 확보하고 있었던 탓이다. 그러나 이번 공연에서 무엇보다 돋보인 것은 활기찬 기획이다. 용감무쌍한 젊은 기획자는 공연을 앞둔 4일 동안 배우·스태프들과 함께 대학로에 자판을 벌이며 공연을 홍보했고, 티켓을 판매했다. 최근에는 도무지 상상하기 힘든 아름다운 풍경. 이는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공연관계자와 언론사 기자 등을 대상으로 열었던 시연회(6일 오후 3시 극단 연습실)도 좋은 시도였다. 단순히 홍보용 서비스가 아니라 작품에 대한 진지한 평가를 받기 위한 자리. 그러나 한 언론에서 시연회를 본 후 소개한 작품의 내용 ― ‘한 인물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다양한 등장인물들로 시선을 나눈 시립극단의 ‘베니스의 상인’은 정통에 충실하면서도 시대에 맞지 않는 부분에서는 살짝 비켜섰다. 샤일록의 비극성을 부각시키는 현대 연극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종교적 편협심과 인신공격에 대해 관객들이 가질 수 있는 거부감을 줄였다’는 시각은, 공연 당일 작품을 보는 내내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원작의 기품 있는 수사를 구현하는데 어색함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너무도 잘 알려진 고전을 무대에 올리기까지 따랐을 적지 않은 고민을 묵과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어로 번역된 대사들이라고 해도, 번역투의 대사를 자연스럽게 소화하고, 관객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긴장감을 유지하며 스토리를 끌고 가기란 쉽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풍부한 연기력과 경험을 가지고 있는 연출과 배우들은 이와 같은 고민이 우문(愚問)이었음을 확인시켰어야 했다. 특히 대사의 성찬을 즐겨야 하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이기에 더더욱 그러하다. 대사 의존도가 높은 이런 류의 작품에 익숙지 않은 객석의 난처함은 어떠했으랴. 이미 십 수일 전에 올려진 작품을 놓고, 배우들의 대사 처리가 연륜에 미치지 못했다거나, 극의 흐름에 방해되는 (불필요한) 장면이 많았다거나, 심지어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의 깊은 갈등을 지나치게 강조해 성극(聖劇)이냐고 묻던 관객도 있었다는, 투정을 해서 무엇하겠는가. 연극 <베니스의 상인>에 대한 해석은 극장을 찾은 관객들에게 달려있는 것 아닌가. 이미 오랜 전북연극의 역사를 통해 이 지역 관객이라면 전문가나 일반인이나 느끼는 것은 큰 차이가 없지 않은 것을…. 다만 한 가지 꼬투리 잡고 싶은 것은, 전주시립극단만의 시각 부재다. 〈베니스의 상인〉이 그간 던져온 질문은 많다. 희극인가, 비극인가. 16세기 ‘지중해의 여왕’ 베니스는 꿈과 낭만의 도시가 아니라 유대인을 철저히 배제한 기독교인들만의 세상은 아닌가. 포티아가 머무는 섬 벨몬트는 사랑과 신의로 가득한 이상향일까. 샤일록은 그저 악덕한 고리대금업자인가. 툭하면 목숨을 내주겠다는 안토니오와 바사니오의 우정에는 동성애적 코드가 담겨 있진 않나. 집밖에선 빨간 모자를 써야 하는 당시 유대인의 비애감은 가슴을 드러내고 호객행위를 해야만 했던 동시대의 창부와 무엇이 다른가. 작품을 보기 전이나 그 이후나 원작이 남긴 질문은 그대로 살아 있다. 400년 전 희곡은 여전히 살아서 다양하게 소통하고 있는데, 우리는 “반드시 1파운드의 살만 베어라, 피가 한 방울도 묻어선 안 된다”며 칼을 든 샤일록을 멈추게 만든 ‘천하의 명판결’만을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중세의 대사법과 몸짓, 당시의 풍류와 사상을 명확하게 구현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원작에 충실하겠다고 다짐해도, ‘원작의 풍미를 완벽하게 재현’하겠다는 각오는 선심성 공약이 될 뿐이다. 상임연출가 조민철씨는 한 매체를 통해 “관립극단으로서 민간극단들이 인적자원과 재정문제로 시도하기 힘든 고전을 시민들에게 선보여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연극이 살아남기 위해선 작품성과 대중성이 적절히 조화를 이뤄야 한다. 꾸벅꾸벅 졸고 나와서 명작을 봤다고 폼을 잡기보다는 낄낄거리고는 재미있다고 말하는 솔직한 관객이 더 필요하다. 새 수장이 들어선 이후 전주시립극단은 달라지고 있다. 지난해 내리 7편의 작품을 올리더니, 올해는 각 분기별 공연에 대해 그럴싸한 계획도 발표했다. 그러나 이번 작품을 보면, 아직 작품의 품위를 통해 드러나는 변화는 조금 더딘 듯 하다. 친구의 구혼을 돕기 위해 ‘살점 1파운드의 보증’을 두려워하지 않는 안토니오의 우정을 한심하다고 치부할지라도, 마음 한 구석 그런 친구 한 명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된다. 전주시민에게 전주시립극단이 안토니오의 우정을 보여주길 바란다. 흔쾌히. 전주시립극단의 연륜과 그에 대한 믿음이 쉬 사그라지지 않도록……. 최기우 | 현재 전북대학교 국문과 대학원을 다니며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전국연극제 대통령상 수상작품인 <상봉>을 비롯해 <귀싸대기를 쳐라>·<정으래비>·<남원골 이야기>·<콩쥐야 훨훨> 등 20여 편을 무대에 올렸다. 전북일보 신춘문예(소설), 전국연극제 희곡상 등을 수상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