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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3 |
임실 오수 동촌마을 - 500년을 이어온 집성촌
관리자(2006-03-08 21:20:51)

내가 어렸을 때 연세가 많으신 할아버지 같은 큰 아버님이 계셨다. 나를 만날 때 마다 이렇게 묻곤 하셨다. “관향이 어디요?” “예, 전주 이갑니다.” “파는?” “예, 효령대군 파입니다.” 이런 대답을 잘해야 양반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한마을에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 있다. 임실 오수 둔덕리 동촌은, ‘전주이씨 효령대군 파’가 한데 모여서 500여 년간 살아온 동네다. 이 근방에 사는 사람들을 흔히 ‘둔덕 이가(李家)’라고 부른다. 효령대군의 증손인 춘성정 이담손이 이곳에 내려와 터를 잡은 이후 16대 종손인 이웅재씨가 살고 있다. 종가집인 이웅재씨 댁에서 낳고 산 사람만도 20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웅재씨는 나랑 같은 재(宰)자 항렬인 분이어서 만나면 형님이라 불렀는데, 80이 넘으신 분이라 속으로는 좀 쑥스러운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이웅재 형님께서 작년에 돌아가셔서 섭섭한 마음과 종갓집 유지에 대한 염려가 있다. 동촌마을 앞으로는 섬진강 상류인 오수천이 감싸 흐르고 뒷산에는 메봉 도리봉을 중심으로 나지막한 능선이 마치 지네처럼 길게 펼쳐져, 병풍을 두른 듯 하다. 배산임수한 종갓집을 지네명당이라 부르기도 한다. 나지막한 능선에 골골마다 마을이 있어 정말 지네다리를 실감케 한다. 마을 앞에는 안산에 해당하는 노적봉이 있고 노적봉이래 마을이 최명희 소설 혼불의 배경이 되는 노봉마을이다. 5칸의 대문간채는 가운데 칸이 솟을대문이다. 그 문 위에 “유명조선 효자 증 통정대부 이조참의 이문주 지려(有明朝鮮 孝子 贈 通政大夫 吏曹參議 李文胄 之閭)”라는 효자 정려패가 걸려있다. 유명조선(有明朝鮮)에서 유명(有明)은 명나라의 뜻을 그대로 이어받는다는 의미로 조선후기에 마치 접두사처럼 쓰였다. 나라에서 효자로 인정해준 문주공은 인조 1년(1623)에 태어나 숙종 43년(1717) 95세까지 장수하신 분이다. 문주공은 아버지 유향을 어찌나 지극히 모셨는지 인근에서 출천지효자(出天之孝子, 하늘이 낸 효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부친이 병으로 몸이 편치 못할 때는 똥을 맛보며 간병하였는데 문주는 유향의 친자식도 아니고 동생 국향의 둘째 아들로 유향에게 양자를 간 처지였다. 비록 일예지만 이가문의 효가 얼마나 지극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런 정려패나 효자이야기들이 예전에는 정말 가문의 영광으로 중요한 일이었으나 요즈음은 아주 낯설은 옛날 얘기가 된 느낌이다. 종갓집 솟을대문 옆에는 남쪽으로 2칸이 마굿간이다. 찾아오는 손님들이 한꺼번에 말 다섯 마리를 매고 먹이를 줄 수 있다. 요즘에 비유하면 자동차를 다섯 대나 댈 수 있는 주차장에 해당한다 할 수 있는 마구간으로 좀처럼 보기 드문 규모이다. 바로 옆집은 올해 77세의 이강원씨 댁이다. 올해도 2월초에 빠지지 않고 입춘첩을 써서 붙이셨다. 옛것을 그대로 지켜나가는 일을 그대로 이어나가신다. 대문에는 龍輸五福(용수오복-용은 오복을 가져다주고) 虎逐三災(호축삼재-호랑이는 삼재를 쫓아준다)가 붙어 있다. 이를, 줄여서 龍, 虎 두자만 붙이기도 한다. 이런 입춘첩을 대문이나 안방, 사랑방 문지방에, 곳간, 외양간, 닭장에 붙이는 것은 일종의 부적처럼 액운을 막아내고 가족 모두 건강하며,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집집마다 같은 성의 문패가 붙어있고 이름 중의 한자는 같은 자가 겹쳐 있는 마을은 조선시대가 두 가지 큰 흐름의 사회였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하나는 성리학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사회였고, 하나는 씨족중심의 사회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함부로 행동할 수 없고 항상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조심해야했다. 이런 힘으로 500여년을 지켜왔는지 모른다. 오수천 둑에서 내려다보면 산자락에 마을이 있고 동네 어귀에 있는 모정을 지나면 동네 한가운데 공동우물터가 아직도 있다. 우물물은 사용하지 않지만 이 동촌 마을의 역사를 묵묵히 얘기해 주며 빙그레 담담한 미소로 맞아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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