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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3 |
문화 주권에 추억이 된, <게이샤의 추억>
관리자(2006-03-08 21:07:51)

#1. <왕의 남자> 표절에 대한 부분은 반성할 일이지만, 영화사를 다시 쓰는 <왕의 남자>는 좋은 영화다. 왜? 이토록 영화에 관한 많은 분야를 만족시킨 영화는 일찍이 없었기에. 큰 돈 안들인 제작자는 이문을 남겨서 좋고, 감독은 빚 갚고 이름나고, 배우들은 연기력을 인정받아 좋고, 젊은 관객이나 늙은 관객도 각기 소구적 입장에서 영화관을 찾는 기쁨을 누렸다. 요즘 넘쳐나는 말로 문화주권이란 말에 부합하는 뿌듯함도 있으니, 불역낙호아!     #2. <무극>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얘기가 떠돌던 94년이었을 것이다. <서편제>가 칸느에서 작품상을 타리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중국의 <패왕별희>와 뉴질랜드의 <피아노>에 물먹고 말았었다. 경극 배우가 혁명의 질풍노도를 통과하는 예술의 사회사는 묵직했고, 제인 캠피언이라는 여성 감독이 만든 수난 받던 여성의 주체성 이야기가 훨씬 세계적이었다. 그래서 예술 한다고 딸래미 눈멀게 하는 것은 보편성을 얻을 수 없었던 것. 인정한다. 십수 년 세월 후, 중국의 문화영웅 첸 카이커가 들고 나온 <무극>! 세기를 초월한 운명의 판타지라? 카피일 뿐. 이것이 <패왕별희>의 감독이 연출한 것이 맞을까 의심했다. 내러티브는 말할 것 없고 명도가 형편없는 붉은 색, 거기다 촌스러운 컴퓨터그래픽이라니. 장동건의 눈썹 빼고는 볼 것이 없었고, 장백지 멀었다. 그 자본력으로 이런 기술력이라니. 이 중국 감독의 창의력과 기획력 그리고 나의 초이스 역시 낙제다. 무슨 문화주권?   #3. <게이샤의 추억> <인디아나 존스>가 목젖을 간질이는 맥주 맛이라면, <와호장룡>은 가슴을 데우는 마오타이 맛이다. 그런데 동은 서를 닮고 싶어 하고 서는 동을 부러워한다. 하여, 대만출신 리안(李安)은 <센스, 센스빌리티>를 통해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귀족 세계를 묘사하고, 스필버그는 흰 분칠에 기모노를 입은 게이샤의 세계를 그린다. 술꾼이 사케라 싫고 맨날 소주만 마시겠는가. 안타깝게도 박두리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죄송한 이야기지만, 일본이란 나라는 꼭 서양의 입장이 아니라도 충분히 매력적인 문화를 갖는 나라다. 나무등걸에서 백제관음을 꺼낸 나라고 후일 그 조각도로 새긴 우키요에(浮世繪)의 구도와 색상은 서구 인상파에 영향을 미친 나라다. 생선을 날로 먹는 나라가 만든 칼과 무사도에 대한 세계는 당연히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래서 칼에 대한 오마주로 <킬빌>이라든가 <라스트 사무라이>가 스크린에 새겨졌을 때, 음 즐거운 오버군, 하면서 귀엽게 보았었다. 그런데 스필버그가 게이샤라니, 얼마나 흥미진진한가.   헐리우드가 만들면 다르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하얀 분칠, 눈 코 입술라인을 그려 넣는 독특한 화장술, 자수가 고운 기모노의 화려한 세계, 또 그 속에 감춰진 여체의 미를 보여주는데 전통적 현악기 샤미센의 애절한 연주가 깔린다. 삼십 근이 넘는다는 가발을 인 사유리(백합이라는 뜻) 역의 장쯔이가 30센티나 되는 게다를 신고 어둡고 좁은 통로 위에서 춤추는 장면은 고혹적이다. 하나같이 자극적 비주얼, 끌리지 않는가. 경쟁과 갈등을 유발하는 퇴물 하츠모모 역을 맡은 공리의 연기는 나이를 허투로 먹지 않은 빛을 발한다. 거기다 자본가나 군벌 혹은 종전 후 미군 고위 장교와의 시대적 이해관계까지 적당히 버물어진 것도 봐줄 만 했다. 지루하지 않았다. 솔직히 술 팔고 몸 파는 기생인 줄 알았는데 게이샤를 한자로 藝者라 한다는 것, 당시 ‘살아있는 예술작품’으로 불리웠고 춤, 음악, 미술, 화법 등 다방면에 걸쳐 수년간 험난한 교육 과정과 ‘마이코’라는 시다 단계를 마쳐야만 정식 게이샤로 인정받을 수 있었단다. 처음 알았다. 그런데 우리 평단은 싸늘하다. 예능인을 창녀 취급했고 예능인으로서 대립과 예술적 긴장감에 실패했단다. 반절은 인정한다. 하지만 이것은 오락영화인 만큼 예능인으로서의 주체성이나 일본문화의 어두운 면까지 바라는 것은 일본적인 것에 대한 가혹한 욕심 아닐까. 하나 더, 캐릭터의 비극성이 변죽만 울린다든가, 혹은 중국인의 자존심을 건들었다고? 그럴 수 있겠다. 그러나 인신매매로 출발하는 어린 사유리 역도 훌륭하고 일본어도 중국어도 아니지만 장쯔이의 잉글리쉬 발음, 애썼다.   나만 우주인이 아니기에 나도 안다. 일본인 게이샤의 '추억'이라기보다는 할리우드라는 프리즘을 통해 본 게이샤 '엿보기'다. 어쩔 수 없이 게이샤가 되어야 했던 푸른 눈 소녀의 성장담과 순애보를 양념삼은 이 영화가 동양여인에 대한 포르노그라피적 판타지로서의 서구적 남성의 시선으로 바라본 오리엔탈리즘의 전형이란 것, 고등학생도 안다. 적당히 신비하고 무국적인 것이 그리 나쁜가. 코쟁이들이 자막읽기를 싫어해서 영어로 대사를 친다든가 중국배우들을 부려먹었다는 식이어서 제국주의적이란다. 그러면 이게 단가? 아니다. 게이샤 문화에 대한 개론 정도는 만족시켰고 시각적 화려함도 그만하면 본전 안 아깝다, 고 말하고 싶다. 미국애들이 이런 문화적 깊이와 타문화에 대한 사려 깊은 존중감, 제국주의적 지배구도에 대한 반성이 있다면 지금 이라크서 그 고생을 하겠나? 그 바탕에 그 정도면 됐다.        #4. Screen quota와 <투사부일체> <투사부일체>, 짬뽕에 양주마시는 영화가 500만을 넘는다는 것이 내겐 불가사의다. 그래서 보았다. 뭐, 돈벌려는 짓거리겠지. 그런데 영화 속 욕설도 들어주겠는데, 그 지독한 머리 때리기에는 속이 부글거렸다. 인구대비 스크린 수가 전국 최고라는 전주에서조차 이 따위 양아치 '문화' 때문에 <브로크 백 마운틴>이나 <브로큰 플라워> 같은 볼만한 타국의 '재화'를 부숴버리는 것이 이 바닥의 더러운 룰이다. 이것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함에 다름 아니고 교역제한이다. 그러나 재화의 교역을 제한하는 것이 시장의 냉정함이었기에 촌놈이 국으로 참는 것이지 정부 때문이라면 나도 안 참았을 것이다. 이 따위 지키려 쿼터 이야기를 한다면 그 쿼터 기꺼이 버린다.   한·미 FTA 체결을 위해 한국 영화 의무상영 146일 쿼터를 절반으로 줄이겠단다. 영화는 문화이기에 예외규정으로 가야한다고, 진한 눈썹의 장동건이 수수한 잠바차림으로 피켓을 들고 말했다. 다음날에는 정부가 미국에게 알아서 긴다고, 스크린 쿼터가 지켜져야 작은 영화도 극장에 걸린다고 예쁜 공길이가 친절하게 설명을 해 준다. 맞는 말이다. 논의과정 속에서 유네스코의 문화다양성 협약, 한국영화의 파이가 커지는 성장통에서 생긴 내적 모순으로서의 분배논의, 배급과 유통에 대한 개선 등 좋은 말들이 오간다. 그러나 여론과 백성의 반응은, 날도 추운데 욕본다는 식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 다시 그러나…   문화주권이란 말이 넘쳐나는 오늘, 쿤룬 장동건! 돗자리 걷으려 하지 말고 끝까지 가라. 질긴 놈이 이기는 여론 싸움이다. 견디면, 잘 된 영화 <식스 센스>처럼 반전이 온다. 델몬트 최민식, 하나 묻자. 지율스님이 굶어 뼈만 남은 이유라든가, 수경스님이 삼배일보로 관절을 펴지 못한다는 말, 들어는 보았는가. 미안하다. 사랑하니까, 세상은 한 몸이기에 물었다. butgoo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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