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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3 |
‘옻칠하면 전주’ 전통 되살린다
관리자(2006-03-08 21:04:30)

글 | 김선경 문화저널 편집위원 중국 철학자 장자(莊子)가 ‘옻밭지기’를 했더란다. ‘쓸모없는 것이 진짜 쓸모 있음’을 예찬한 장자는 “계수나무는 먹을 수 있기에 잘려서 먹히고, 옻나무는 옻진을 쓸 수 있기 때문에 잘려서 없어진다”며 두 나무의 슬픈 운명을 한탄했더란다.   세상에서 쓸모없는 것이야말로 천명을 누릴 수 있다는데, 옻나무는 그 쓸모가 너무 많아 제 명에 죽지 못하는 나무다. 요즘에는 한방옻닭이 유행처럼 번져서 우리는 시커먼 뚝배기 안에서나 옻나무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가을 옻나무의 싯붉은 단풍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옻을 잘 타는 사람은 옻나무 푸른 새순에도 옻이 오른다는데, 유월부터 시월 사이에 옻나무 껍질을 벗기면 특이한 냄새가 나는 잿빛 진이 나온다. 이것이 옻이다. 옻나무에는 70퍼센트쯤 옻진이 들어 있는데, 껍질에 금을 내어 흘러나오는 진을 대나무칼 같은 것으로 긁어모아서 쓴다. 이것을 그릇에 바르면 썩지 않고 충해가 생기지 않고 음식이 쉬 상하지 않는다 하여 수천 년 전부터 천연도료로 사용해 왔다. 좋기로는 우리나라 칠이 제일이고, 일본과 중국칠이 그 다음이며, 북베트남 칠은 안남칠(安南漆)이라 하여 품질이 낮은 것으로 친다. “60대부터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전주시내 옻칠공방이 70개 정도는 되었지. 전주공고에 우리나라 최초로 ‘칠공예과’가 생길 정도였으니까 옻칠로는 전주가 최고였다고 봐야지.” 서울과 전주에서 행촌칠예공방을 운영해오다가 최근 한옥마을에 “공예 공방촌”을 연 이의식(53,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3호) 옻칠장인. 15살 때부터 옻칠을 시작했으니 옻칠인생 어느덧 40년이다. 특별히 공예에 뜻이 있었다기보다는 가난한 살림 때문에 중학교를 중퇴하고 군입이나 덜까 하여 찾아간 곳이 옻칠공방이었다. 월급이랄 것도 없이 그저 기술 가르쳐주고 교통비 정도만 대주는 도제식 공방이었다. 동네 사람 권유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이의식 장인은 배우면 배울수록 옻칠공예에 대해 매력을 느꼈다. 이왕 들어선 길, 제대로 배우고 싶은 생각에 서울의 최환창 선생을 찾아갔다. 그렇게 10년을 배우고 25살에 행촌칠예공방을 차렸다. 어엿한 사장님이 된 것이다. “처음에는 작가로서 작품활동에만 전념했지만 결혼도 하고 자식도 생기니 작품에만 전념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작품과 상품으로 구분해서 옻칠그릇을 만들었는데 80년대 중반 들어서니까 도무지 찾는 사람이 없어요. 값싸고 쌈박한 화학칠 그릇이 워낙 많이 나오는데다 카슈칠까지 도입돼서 비싼 수공 옻칠은 설자리가 없어졌죠.” 공방은 망했고 이의식 장인은 기로에 섰다. 옻칠을 접고 다른 일을 찾든가, 다시 회생할 수 있는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결혼패물을 모두 팔아 공장을 정리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다들 미쳤다고 했다. 당장 먹고 살 길도 없는데 일본으로 가다니. 여동생에게 50만원을 빌려서 찾아간 일본. 그곳에서 이의식 장인은 일생일대 도박을 감행했다. “일본의 옻칠공방과 학원을 찾아다니면서 명함을 돌렸어요. 석 달 정도 지나니까 일본사람들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그 중에서도 적극적인 세 명의 바이어를 만나서 나의 빚을 모두 갚아주고 다시 공방을 운영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조건으로 계약을 했죠. 저는 3년 안에 빌린 돈을 모두 갚겠다고 약속을 했고요.” 이의식 장인은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실력이 있었기에 돈을 벌 수 있었다. 전화위복이라고, 그 일을 계기로 이의식 장인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그렇게 서울에서 자리를 잡은 뒤 이의식 장인은 전주로 내려왔다. 90년대 초반이었다. 각기 흩어져 있던 공예인들의 협회조직도 만들고 공예대전도 준비하는 등 나름대로 공예의 체계를 잡고 싶었던 생각이 컸다. 또 전주에 옻칠공에 공방을 세우고 옻칠공예의 붐을 다시 한번 일으켜보고 싶었다. 옻칠은 그에게 인생의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맛보게 해주었다. 남들은 옻칠이 오래된 옛것이라 치부할 때 이의식 장인은 미래의 가능성 있는 상품이라고 추켜세운다. “유럽에서는 옻칠을 첨단도료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용도도 아주 높지요. 지금은 옻칠을 배우는 사람들이 적고 점차 우리 고유의 옻칠문화가 사라지고 있지만, 일단 옻칠 기술을 배워놓기만 하면 얼마든지 효용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수자는 많지 않지만 미래의 각광받는 문화상품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이의식 장인. 어깨너머로 어렵게 배웠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옻칠공예 교재를 최근 제작했다. 이 교재는 2월부터 4월까지 진행되는 옻칠공예 강좌 시간에 사용된다. 공방촌 문을 열고 가장 먼저 시작한 사업이 시민을 대상으로 한 옻칠 전통공예 강좌다. 초보자, 전문가를 가리지 않고 모집한 이번 강좌의 수업은 모두 무료로 진행된다. 옻칠공예가 무엇이고 실생활 속에서 어떻게 이용되는가를 알려주는 기초수업이지만, 이 프로그램을 계기로 전주 옻칠공예의 전통이 되살아났으면 하는 바람을 안고 있다. “아직은 좀 어렵다고 봅니다만, 제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옻칠공예의 전통이 살아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행정자치부와 함께 ‘온’이라는 브랜드를 개발한 것도 옻칠공예를 시민들에게 가까이 전해주고 싶어서였고요. 앞으로는 옻칠공예를 전주의 도시 이미지로 정착시키는 작업을 하려고 합니다. 남원에 목기가 있지만 목공예와 옻칠공예는 차별화 될 수 있습니다. ‘옻칠은 전주’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는 일에 주력할 생각입니다.” 당분간은 옻칠공방촌을 널리 알리는 일에 전념할 것이라는 이의식 장인. 리베라 호텔 후문 부근에 자리잡은 공방촌은 다소 좁은 감이 없잖아 있다. 대규모 작품을 전시하기에는 무리인 듯싶다. 이의식 장인은 협소한 전시공간을 활력 넘치고 변화 있는 전시공간으로 꾸며나갈 생각이다. 적어도 두 달에 한번씩 전시 상품들을 바꾸는 것도 그러한 방법의 일환이다. 항상 똑같은 상품들이 놓여 있으면 오던 발길도 끊어지기 때문이다. “옻칠이 가격은 좀 비쌉니다. 그래도 비싼 만큼 제값을 하죠. 앞으로는 전통문양을 현대식으로 재창조하고 현대적 디자인을 도입해서 자개, 나전, 칠화 등 다양한 옻칠작품을 만들어낼 생각입니다. 여기에 전시된 문화상품은 두어 달에 한번 주기로 빠르게 생산합니다. 그러나 제 개인 작품은 1년은 잡아야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오죠.” 국그릇보다 조금 큰 말차 찻잔이 5만원이니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그래도 한번 써본 사람은 옻칠 그릇을 다시 찾게 된다고 하니 수 천년을 내려온 옻칠의 매력이 분명 있긴 있는 모양이다. 독일과 미국에서 가진 전시회 때는 부스째 통째로 작품이 팔렸다 하니 해외에서 쏟아지는 옻칠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국내보다 더 열광적인 것 같다. 이미 일본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수많은 기술자들이 이의식 장인을 찾아와 그 기법을 배우고 돌아갔다. 수요자만 있다면 언제든지 공예의 기술과 기법을 전수하고 싶다는 이의식 장인. 월 300 ~ 400만원의 운영비를 감당할 일이 내심 걱정이지만 지금은 걱정보다 의욕이 앞서는 때. 시민강좌를 시작으로 공방촌의 존재를 알린 이의식 장인은 오는 4월 개인전도 열 계획이다. 알차게 준비한 30여 점의 작품이 전시될 예정. 40년간 옻칠에 매달려 온 장인의 열정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공방촌 개원과 함께 새로운 옻칠인생을 시작한 이의식 장인. 그의 꿈은 봄철 돋아나는 옻나무의 새순처럼 푸릇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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