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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3 |
<문순개인전> 비어 있으므로 충만한 초월의 미학
관리자(2006-03-08 20:57:41)

글 | 이일청 서해대학 교수 이 근래에 보기 드문 전시회가 우진 문화공간에서 열렸다. ‘먹색은 오색을 머금고 있다’라고 킴바라 세이고는 그의 저서 동양의 마음과 그림에서 얘기했다. 수묵의 농담으로 무궁무진한 자연의 색채가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수묵이 가지는 짙음과 옅음을 통해여 관조된 작가의 심상이 자유롭게 표출된다는 것이다. 작가는 화면을 통하여 얘기한다. 문순의 인물화에서 느껴지는 것은 고요한 초월의 아름다움과 오랜 풍상의 세월이다. 심지어 어린아이의 표정에서도 달관한 듯한 무표정과 수도승의 동안거를 끝낸 처절한 자기인식 후의 표정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특히 작품 속의 인물의 시선을 보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의식세계를 통찰하는 듯한 깊고도 오랜 시간이, 흔적이 보여진다. 버린다는 것은 얼마나 치열한 정진의 도정이 필요한 것인가! 겹겹의 생각을 칠정의 기쁨, 노여움, 슬픔, 생각, 걱정, 두려움, 놀라움의 마음, 답답함을 지나 비어나감으로 충만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작가의 삶을 바라보는 자세가 대상이 할머니거나, 아이거나, 중년이거나, 그들이 각기 가진 삶의 무게들이 여실히 드러남으로 근본적이고 원천적인 물음에 조형언어로 화면에 답하고 있다. 집착과 갈등의 시대에서도 특히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다툼의 세월이 많은 민족이다. 이런 인종의 세월 속에 자연스럽게 내밀한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관조의 화해가 자연스럽게 우리의 심성에 형성된 것은 아닌가! 작가의 근원적인 문제의식이 다양한 주제를 통하여 화면상에 형성되어 그만의 독특한 세계를 보여준다. 이러한 역사인식에서 나와 남의 조화와 인간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 우리민족과 다른 민족의 조화를 통한 진정한 화해와 무아의 경지가 화면에 숨 쉬고 있다. 전시한 작품 수는 적지만 작가가 그 글씨의 이미지를 서예가 아닌 글씨가 갖는 의미상의 형상화를 위해 의도한 것 같다. 다른 작업을 더 볼 기회가 있다면 표현의 굴레를 깨어서 문자의 형상화, 조형으로써의 큰 틀이 세워질 것으로 보여진다. 이번 전시에서 주제가 더 강하게 나타나도록 배려했다면 더한 감상기회의 이미지가 곧바로 드러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승무에서 보여지는 선의 흐름이 한곳을 향해 몰입하는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으나 글자와 그림의 조화에서 너무 설명적이고 예시적인 이미지를 끌어내는 것으로 보여진다. 작가의 의도가 강하게 보인다는 것은 곧 자연스러운 흐름을 저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 어린이, 종군부 등 시대적으로 민감한 주제를 통하여 작가가 의도한 것은 무엇일까? 인간의 근원적인 빈곤과 소외된 인간의 표상을 통하여 무엇을 작가는 보여주려는 것인가. 앙상한 가슴을 보며 할머니의 깊은 주름의 흔적을 보며 강하게 다가서는 것은 인물들의 시선에서 풍겨지는 포용의, 받아들이는 순종의 세월이다. 짐승 중에서 가장 쓸모 있는 짐승은 소다. 소는 몸 전체에서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고 한다. 뿔, 꼬리, 몸통 등 심지어 내장까지 다 인간의 소용이 된다. 평생 묵묵히 일하다가 결국은 인간을 위해 자신의 몸을 바치는 헌신이다. 우직하고 순종하는 소의 상징의 표현은 할머니나 어린이의 표정에서 느겨지는 것과 동일하다. 평범한 모든 것은 참으로 거룩하다. 유별난 것보다 다른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은 용렬과 아집의 벽을 뛰어넘어 지고의 행복과 편안한 관조의 기쁨의 세계로 들어서게 한다. 같이 간 딸아이와 관람 후 이야기하던 중 똑같은 느낌의 공유를 느꼈다. 가장 강하게 와 닿는 십자가의 표상과 예수의 가시관은 참으로 보기 드문 기쁨이었다. 작가의 의도가 십자가의 예수로 귀결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십자가는 죄수들에게 보관하는 형벌이며 십자가는 또한 죄악의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므로 구원의 시초가 이루어지며 죄에서 해방을 이야기하고 있다. 고난의 상징인 십자가와 가시면류관은 화가들의 작품주제로 많이 등장하고 있다. 기독교 성화에서는 이 주제만큼 기독교의 정신을 확고하게 드러내는 것은 없을 정도다. 신약성경 로마서 8장 6절에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기록되었으며 구원의 상징적 의미로 십자가는 표현되고 있다. 야수파 화가인 조르지오 루오의 예수만큼 더 강렬한 상징성을 보인 작품이 없다. 문 순의 예수님은 우리가 늘 보는 이웃 아저씨 같은 친밀감의 예수다. 어느 성공회 주보에 웃으시는 예수님의 스케치를 표지에 사용한 것을 보았는데 빌립보서 4장 4절의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게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는 말씀이 생각났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피 흘린 가시관의 형상이 루오의 작품으로 표현되었다면 문 순은 그 고난의 십자가 고통의 절대적 순간에서 모든 것을 초월한 관조의 평강이 나타나고 있다. 이 세상의 고통과 슬픔과 괴로움의 모든 것들은 살아있으므로 아픔이 있다. 죽은 자는 이 세상이 끝남으로 자유가 있다. 모든 칠정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작가는 그 해방의 순간을 다시 돌려 인내와 연단과 소망을 통한 생명의 평강으로 바꿔 놓았다. 빛으로 오신 예수의 형상화를 화면 중앙에 나타내어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로움과 이룬 자의 평강을 한줄기 빛으로 형상화 한 것이다. 가시면류관의 날카로운 찌를 듯한 곧추세움도 예수의 얼굴에서는 초월자의 평안으로 다가선다. 빛의 확연한 경계를 나타낸다. 이중의 잣대를 하나로 합일하는 현상이다. 세상의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운 구원의 역사를 작가는 그리스도 예수라는 표상을 통하여 나타내며 인간의 가장 극렬한 삶을 종지부 찍듯 십자가를 현현해 내었다. 비어있다는 것은 얼마나한 치열의 도정인가!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통하여 자기세계를 나타낸다. 더불어 치열한 자기정진과 한 곳으로 치닫는 열정에서 화면을 순간순간의 종합의 필획으로 쌓아 나간다. 어설픈 수묵의 적당한 보임이 아닌 작가의 정진이 화면에서 여실히 보여진다. 역량은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부지런한 작업의 결과로 보여지는 것이다. 이 근래에는 참으로 작업의 치열성이 보기 힘든데 이렇듯 정제된 조형언어의 표현이 아름답게 보였다. 우진 문화공간의 넓은 전시장에서 작가가 그동안 고뇌해온 흔적이 가득 빛살로 다가섰다. 열심히 보면서 세상에서 제일 가치 있는 일들의 자긍이, 이 길의 행복이 마음껏 느껴지는 기회였다. 쓸만하다라고 이야기하는 것들, 소중하다라고 이야기하는 것들, 든든하다고 이야기하는 것들 생각에 생각을 더하는 화면의 깊이가 우리를 얼마나 즐겁고 기쁜 세상으로 인도하는가. 우리의 삶을 조용히 관조하는 소중한 계기가 이번 작품전으로 이루어진 것 같다. 작은 바람이라면 좀 더 집약적인 주제의 전시기획이 되어서 다양한 주제보다는 주제의 역동성을 느낄 수 있도록 많은 작업의 결과를 보게 되길 기대한다. 예향이라는 전주에서 보기 힘든 전시로 맑고 푸른 묵향이 소재의 일관된 방향성과 탄탄한 조형의 결과로 나타났다. 비어있다는 것이 얼마나 충만한 기쁨인지를 보인, 채운다는 것은 곧 버려나가는 것이라는정연한 미적 질서를 참다랗게 표현한 귀한 전시였다. --------------------------------------------------------------------------------------------- 이일청 | 원광대학교 조형미술학과를 졸업했다. 문학박사이자 화가이며 현재 군산 서해대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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