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해마다 같은가요, 다른가요? 새봄이 온다하여 무슨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지도 않은데, 달라질 일도 별로 없을 것 같은데, 저는 짧은 이월의 달력이 넘어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묵은 겨울옷이 무거워서 그렇습니다. 요즘은 가는 곳마다 난방이 지나쳐서 털옷이 부담스러운 곳이 많습니다. 걷는 기회가 많은 저는 주로 타고 다니시는 분들에 비해 옷이 조금 두터운 편입니다. 하기야 없어서 근심이지 있는 옷은 벗으면 그만입니다. 옛사람은 몸을 씻고 옷자락 사이로 기분 좋게 스며드는 바람을 맞는 것도 인생의 큰 즐거움 가운데 하나라 하였습니다. 욕심 없는 공간 속에서 바람의 흐름을 얼굴에 부딪치는 곡선으로 느끼노라면 저절로 마음과 발걸음이 하나가 됩니다. 물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들의 자유로운 몸짓이 오히려 답답하여 조금도 부럽지 않을 것입니다. 머지않아 싹이 돋겠지요. 얼어붙은 땅을 뚫고 솟아오르는 봄 싹들의 힘은 정말 어마어마하게 커 보입니다. 그런데 농사짓는 어떤 분을 만나 저는 다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땅이 먼저 싹이 나갈 길을 마련하고, 그 다음에 길을 따라서 싹이 밖으로 나오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볼까요? 날이 풀리기 시작하면 겨우내 얼었던 땅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게 됩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얼었던 물과 흙 사이에 간극이 터지고, 물기가 움직이고, 모세관이 열리고, 물의 순환을 통해 땅의 숨길이 열리고, 땅이 숨을 쉬게 됩니다. 그 가느다란 길을 따라 싹이 온몸을 밀어 올리는 것입니다. 새벽에 일찍 나가보면 강이 숨을 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처럼 봄이 오면 땅도 새 숨을 쉬기 시작한다는 말씀입니다. 길이 열려야 싹이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농부는 체험으로 알았다고 합니다. 봄이 와도 싹이 나오지 않는 땅은, 더 말할 것 없이, 죽은 땅입니다. 살아 있는 땅은 숨을 쉬는 땅이고, 숨을 쉬려면 숨길이 열려야 합니다. 봄의 시작은 소통의 통로가 열리는 것이 며, 또한 대지와 대기 사이에서 냉정한 분할의 경계가 따뜻하게 무너지는 것입니다. 삼월은 학교가 다시 문을 여는 때입니다. 아시다시피 학교에서 한 해의 시작은 삼월입니다. 학교를 관리하는 행정기관이 오랫동안 문교부라는 명찰을 달고 있더니 교육부를 거쳐서 지금은 교육인적자원부가 되었습니다. 인적 자원이라는 표현에서 물신숭배의 예후를 읽고 경악하는 이가 적지 않건만 우리들의 정부는 인적 자원의 개발을 멈추지 않을 작정인가 봅니다. 그런데 인적 자원은 확보와 개발만으로는 충분한 성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예측이 가능하며 동시에 불가능한 모순을 행동으로 구체화하는 동물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현 단계에서 저는 개발보다 소통이 우리에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소통이 반드시 융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공존의 조건으로써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소통의 결과를 걱정하기에 앞서 소통의 선행조건에 관심을 쏟아 보자고 제안합니다. 땅에 숨길을 내는 것은 봄기운입니다. 비유컨대 우리 사회의 봄기운은 변화를 기대하는 공감대일 것이며, 공감대의 확산은 상황과 목표에 대한 공통의 인식을 바탕으로 요구합니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새봄도 흰 눈으로 흘겨보아야 하는데 그것도 모르고 덩달아 밖으로 나다니니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사람은 그대로 놓아두고, 벗님이여, 우리 같이 봄볕을 즐기며 흙냄새를 맡아봅시다. | 정철성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