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임기준 광주지방국세청 근무 12월 16일 한 통의 문자메시지가 윤환이로부터 왔다. “감기가 낫질 않아서 서울 집에서 주말까지 있을 것 같습니다 광주에 내려가면 연락드릴께요”라는 내용이었다. 백제기행에 혼자 참가해야 하나, 눈을 핑계로 가지 말까, 하고 망설이다가 17일 “미안합니다 날씨가 아직도 안 풀리니 내일 백제기행 가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라고 문화저널로 문자를 날렸다. 날씨는 춥고, 혼자 가기는 그렇고, 자다가 두어 번 깨었을 때도 이 고민을 하고 있었다. 드디어 18일 일요일 아침. 여행을 포기한 상태인 채로 8시경 잠에서 깨었다. 계속 갈등하다가 아내에게 오늘 문화탐방을 가려고 하는데 별 일 없느냐고 물어보니 다녀오란다. 8시 20분부터 세면을 하고 보온병에 담을 물을 끓이고 귤 몇 개와 과자류 조금 담으니 배낭이 꾸려졌다. 아침은 그래도 챙겨 먹자고 전 날 늦장가를 간 주한이 딸 대연이 돌잔치에서 가져온 떡 하나를 우물거리는데, 아내는 어느새 식탁위에 된장찌개를 올려놓았다. 이 모든 준비를 20여분 만에 끝내고 8시 40분에 송천동 집에서 출발하여 미끄러운 길을 따라 태평양수영장 앞에 대기하던 103회 백제기행 버스에 9시 조금 지나 오를 수 있었다. 대부분 가족동반인데 나 혼자만 온 것 같은 느낌. 날씨만 좋았다면 가족동반을 해도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겹친다. 우리를 안내할 이흥재 선생님이 오시면서 버스는 출발했다. 그 전에 ‘당신이 행복하니 나도 행복합니다’라고 적힌 사각 종이접시인지 벽걸이인지 아니면 차받침인지 모를 내용이 좋아 그저 마음에 드는 기념품과 ‘김제의 향교와 서원’이라는 안내서를 받았다. 혼자 했던 여행으로 84년경 2,700원을 들여 지리산 화엄사를 다녀왔던 기억이 새로워졌다. 당시 구이에서 전주까지 버스요금 120원, 전주에서 화엄사까지 버스요금 900원, 아무튼 겨울 화엄사를 둘러보고 돌아올 때는 차비가 모자라 구례에서 오수까지 기차표를 끊어 표 검사할 때는 다른 칸으로 옮겨 다니다 전주역의 낮은 담을 넘어 전주에 안착하고 큰형님 댁에 전화하여 하루를 때운 일이 생각나기도 하였다. 버스는 어느새 김제를 거쳐 부안 동진강을 지나 부안군 동진면 소재지 탁주주조장 근처에서 우회전을 하여 계화도를 향하고 있었다. 계화도를 막을 때만 해도 국도가 자로 잰 듯하게 된 도로는 없었는데 계화도로 가는 길이 처음으로 고속도로를 닮은 도로였다는 이흥재 선생님의 설명이 있었지만 실제는 승용차 한 대가 달릴 정도이지 반대쪽에서 차가 오면 조심스런 도로였다. 더군다나 눈이 쌓여 있었으니 말이다. 우리가 향하는 곳은 간재 선생의 위패를 모셔놓은 계양사였다. 가는 도중 두어 번 버스에서 내려 온 세상이 하얀 설국을 감상했다. 같이 동행한 탐방객들은 동화 속으로 들어가 노닐기도 했다.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 들어가겠다”던 공자님의 말씀을 이행이라도 하듯이 간재 선생은 한말 격동기에 왕등도로 들어가셨다가 제자들의 건의로 1912년부터 계화도에서 머물면서 평생을 학문에 정진하시고 후학을 키워내신 분이다. 현재 한학한다는 이들의 대부분은 간재 선생의 제자의 제자, 그 제자와 연이 닿는다고 한다. 원래 이 기행에 참가하기로 했던 윤환이는 광주에서 일대일로 송담(松潭) 이백순(李栢淳)선생으로부터 한학을 배우고 있기 때문에 그도 간재(艮齊) 전우(田愚) 선생 제자의 손자의 제자이기도 한데, 나는 윤환이을 통해서 지난 8월 간재 전우 선생을 알게 되었다. 공자와 석가, 노자, 소크라테스를 4대성인이라고 하고 안자, 증자, 자사, 맹자는 공자의 제자이며 이후 주자의 주자학이 조선에서는 성리학으로 정몽주, 김종직, 조광조, 영남학파 이황, 기호학파 이이로 이어졌다. 간재 선생은 이이, 송시열 이후의 기호학파이면서 조선말 최고의 유학을 발전시키고 유자의 삶을 살았던 분으로 제자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나라를 잃은 상태에서 섬으로 들어가 학문을 고양하고 제자를 가르쳐 국권회복의 정신을 이으려는 간재 삶과 면면히 내려오는 유학의 학맥이 나에게도 흐르는 것 같은 계화도의 계양사 담장엔 두 자 정도 눈이 쌓여있었다. 점심은 김제 시내 매일회관에서 해물탕을 먹었다. 오전 계화도에서 오는 도중 자기소개를 했기 때문에 이즈음에는 다소 서먹함이 사라져 함께 한 두 잔 술잔을 기울일 수 있어 좋았다. 두 번째 탐방은 김제시 성덕면 학성강당이었다. 평야지대의 한 중심에 유학의 학맥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옛 선비 정신과 배운 바를 실천하기 위하여 설립된 곳으로 수신을 통하여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성인의 말씀을 실천하려고 화석(和石) 김수연(金洙連) 선생이 세운 서원이다. 같이 탐방에 참여한 이들이 학성강당 강의를 들을 때에는 청곡선생의 유머섞인 명쾌한 해설에 만족하고 상기된 상태임을 느낄 수 있었다. 강의가 끝나고 학성강당 대문 앞에서 청곡 선생과 우리 일행 중 이금휘 교수님 셋이서 기념촬영을 하기도 했다. 다시 버스는 김제시내 성산 밑 김제향교로 향하였다. 좌우 대칭이면서도 멋스럽게 조금씩 다르게 조화를 이룬 명륜당을 보았고, 유생들이 부패하지 말라고 은행나무 또한 이곳 김제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향교 출입문의 태극무늬가 2개(빨강 파랑)인 것은 음양을 나나낸 것이고, 대성전 출입문의 태극무늬 3개(빨강 파랑 노랑)인 것은 삼재 즉 천지인(天地人)이라고 이흥재 선생님은 설명하셨다. 이제는 김제관아로 가보자. 김제관아의 동헌은 평야지대라서 그런지 단아하면서도 안정된 느낌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김제관아 뒤에 있는 내아를 볼 수 있었는데 내아는 요즘으로 말하면 기관장의 관사에 해당되는 곳이다. 1980년대 초반에 복원되었다는데 그래도 시간이 흘러서 그런지 고풍스런 느낌과 ‘ㄷ’자형 건물이 한 채로 되어 있었으며 특히 대청마루 앞 토방에서 보는 하늘은 일품이었다. 밖에서 본 건물의 모습과 마당쪽에서 본 건물의 느낌이 확연하게 달라 한옥에 관심이 있다면 이곳을 꼭 가보시기를 권한다. 관아는 더러 보존돼 있어도 내아가 있는 곳은 김제 밖에 없다고 한다. 이곳에도 눈은 많이 쌓여 있어 탐방객 중 자녀와 같이 온 분은 눈 위에 몸을 던져 눈 사진을 찍기도 했다. 탐방객은 오후 4시 30분경이 되자 만경의 해학 이기, 구례의 매천 황현과 함께 조선 말 호남의 3걸이라 불렸던 김제 백산의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 선생 생가를 찾았다. 초가지붕인 생가를 담 너머와 대문 틈사이로 볼 수밖에 없었지만 유학을 기본으로 시문학, 수학, 서양철학, 도학과 과학을 섭렵하시고 서예와 그림의 대가이신 석정선생의 위풍은 연락하고 방문하면 선생의 작품을 보여 드리고 설명을 해주신다는 대문위에 써 붙인 안내문이 대신하고 있었다. 이번 서원기행을 통하여 우리 고장의 서원문화를 이해하고 다른 사람이 물어도 자신있게 설명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뿌듯한 기분을 느낄 즈음 버스는 원래 출발지에 다시 돌아왔고 일행은 아쉬운 만남을 정리해야만 했다. 언제부터인가 판소리가 정겹게 들리고 동네를 산책하면서 보는 아파트 앞 상가 와 길거리 노점상을 보아도 정겨운 것은 아마도 삶과 문화를 통해 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느껴졌다. 버스를 타고 하루의 일정으로 다녀왔던 서원기행은 산책과 같은 즐거움이었다. 또 다른 산책을 같이 하자. 그 이름은 백제기행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