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홍성덕 전북대박물관 학예연구사 사진1. 축성계초 1733년 전라도 관찰사 조현명이 작성한 것으로 총 126면이며, 전주부성 수축 배경에서부터 착수 과정, 인력동원과 자재 갹출 내역, 소요 비용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사진2. 철거될 당시의 전주부성과 전동성당 오른쪽에 보이는 돌벽이 전주부성의 성벽이며, 중앙에 있는 탑이 전동성당이다. 사진3. 1968년경 아중리 가는 길 남노송동 파출소에서 아중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지금은 견훤로 공사로 확~ 잘려나간 기린봉의 산자락이 바로 오른쪽에 있다. --------------------------------------------------------------------------------------------- 얼마전, 조선시대 전주성의 남문이었던 풍남문의 복원이 잘못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사실 복원의 잘 잘못을 논할 수 있을 만큼의 자료는 아니었으므로, ‘복원 잘못’이라는 제목은 약간의 선정성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당시 발견된 자료는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조현명이 1733년(영조 9)-34년에 걸쳐 자신이 쌓은 전주부성 수축사업을 기록한 『축성계초(築城啓草)』(<사진 1>)이다. 이 문서는 원래 1997년 보고된 『춘천풍양조씨 회양공파 조사보고서』에 수록된 『한예집수』라는 책의 안쪽 면에 쓰여져 있던 것이다. 조현명이 작성한 전주부성 축성기록은 후대 그 후손들이 뒤집어 묶은 다음 예서체의 글씨를 덧붙인 뒤에 『한예집수』라고 명명한 것이다. 단순한 예서체 서첩으로 전해질 뻔한 이 자료가 18세기 성곽 수축을 상세히 기록한 중요자료로서 탈바꿈되는 순간이었다. 새로움의 발견은, 그래서 늘 흥분되고 그로인해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다시 기록해야 하는 창조의 작업이다. 잊혀진 기억을 복원하고 잘못된 현상을 바로잡는 것은 ‘진리’에 대한 인간의 본성에서 발로하는 것으로 모든 사람들에 주어진 신성한 책무이기도 하다.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조현명은 전주부성에 대해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옛 명신 이정란이 이 성을 지키며 왜적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으니 그 지세의 이로움을 족히 증빙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진전이 봉안된 곳이니 사체가 더욱 특별하여 결단코 난에 임하여 가볍게 버릴 곳이 아니옵건대 지금에 이르러 무너지고 대부분이 제 모양을 갖추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태조 영정이 모셔진 진전이 전주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당 시대의 인식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조현명이 전주부성을 새로 쌓기 위해 보고한 기록을 보면, 전주부의 옛 성은 성터 모양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원형이나 방형이 아니라 지형에 따라 졸속하게 축조되었기 때문에 동서남북의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바로 잡으려면 경비가 많이 들어가므로 대략 옛터를 따라 축조하면서 굴곡진 곳에 치성을 설치하였다 한다. 이 때 북문을 제외한 나머지 성문의 옹성은 없어진 듯하다. 17만명이 동원된 전주부성의 축조 공사는 1934년 1월에 시작하여 9월까지 계속되었다. 사실 우리는 전주부성에 대한 시각적인 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다. 전주부성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사진은 성벽을 허물기 시작했을 무렵의 전동성당사진이다. 전주부성의 높이가 약 20척(1척=20.83㎝)으로 약 4m의 높이였다. <사진 2>의 중앙에 보이는 탑이 전동성당이며 오른쪽 돌 벽이 바로 전주부성의 성벽이다. 위치로 보아 경기전 앞의 성벽이며, 모서리가 직각으로 잘라져 있는 것으로 보아 경기전 코너에 설치되었던 전주부성의 치성으로 생각된다. 성벽의 윗부분은 많이 훼철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동성당이 1908년에 완공되었으므로 그 즈음의 사진이다. 100년전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조차 이제는 쉽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사실 불과 30여년 전의 사진도 구하려 하면 쉬이 찾아지지 않는다. <사진 3>은 1968년경 전주 어느 곳을 찍은 모습이다. 전주 토박이들 특히 남노송동에 살았던 사람들이라면 알 수 있는 이 사진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 것은 땅바닥에 죽은 듯 누워있는 ‘공간의 역사’를 ‘삶의 역사’로 돌려 부활시키는 창조의 작업이다. 사진은 읽을 수 있을 때에만 생명력을 가진다. 그저 보는 것만이 아니라 읽어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까운 역사가 시급하다는 것은 바로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 세상에서 사라져 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