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성기수 온고을여자고등학교 교사 방학이 시작되고 나서야 나는 온전히 국어를 가르치는 사람이 된다. 그 전까지는 이런 저런 학교 행정의 잡무 때문에, 가르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사무직원 같다는 생각을 종종하곤 한다. 그래서 똑 같은 말인 것 같지만, 선생과 교사, 그리고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나에게 다르게 다가온다. 말에도 생명이 있고 살아있다는 것을 요즘 더 새롭게 느낀다. 선생, 교사, 선생님, 그리고 스승이라는 말이 예전에는 비슷비슷하고 같게 들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같아 보이는 말이지만 어떤 말은 나에게 상당히 불편하게 들린다. 단어도 살아있는 것이다. 나는 교육 현장인 교실에서는 교과서를 쫓는 선생으로, 학교에서는 업무를 처리하는 교사로서 살아가고 있다. 그래도 순수하게, 아니 나 홀로 스승의 길을 가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학생들이 제출한 글을 읽으면서다. 나는 학생들의 글 속에 숨어 비로소 스승(?)이 되어 보는 것이다. 내 스스로 스승의 길을 찾는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학생들의 글 속에서 진실된 삶의 모습을 배우고 위안을 받는다. 그리고 그때가 되어야 조금이나마 스승의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이번 겨울 방학도 어김없이 선생을 스승으로 만드는 학생들의 글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아니 꾸짖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손길로 자랐다. 내가 다치거나 아플 때, 할머니가 약을 발라주고 병원도 데려다주고 그랬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없을 때 늘 내 곁에서 과자와 음료수를 주면서 놀아 주셨다. 아빠는 매일 열심히 일을 하셨고 동네 아줌마 아저씨들도 아빠가 일을 열심히 잘 한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그만큼 아빠는 열심히 일을 했었고 나를 무척 예뻐하셨다. 나는 이렇게 따뜻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내가 바른길로 가게 하려고 혼도 낼 때도 있었고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예절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그런 가르침 속에 바르게 자라왔다. 그러나 점점 커 갈수록 나는 곁에 없는 엄마가 왜 없는지, 왜 얼굴이 생각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 해봐도 엄마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게 궁금 속에 자라 9세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요일 아침까지만 해도 할아버지와 재미있게 놀면서 있었다. 그런데 오후 1시쯤 되어서 할아버지가 외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나도 덩달아 외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를 따라간 곳은 한 예식장이었다. 나는 밖에서 할아버지와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 분이 흘렀을까? 한참이 지난 뒤에야 한 아주머니가 콜라 한 병을 들고 나왔다. 그 아주머니는 나와 할아버지 곁으로 다가왔고, 그 아주머니는 나한테 콜라 한 병을 주었다. 나는 열심히 콜라를 먹었고 할아버지와 아주머니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한참을 이야기를 하셨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 왔다. 할아버지는 나를 앞에 두고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승희야, 아까 만난 아주머니가 누군지 아니?” “그 아주머니는 바로 너의 엄마야” 나는 소리를 듣는 순간 눈물이 나왔다. 엄마를 앞에 두고 내가 왜 몰라 봤을까?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엄마인데 왜 엄마라고 불어 보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울었을까 그날 나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나는 슬픔을 잊고 착하게 자라 왔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할머니는 나한테 이야기해 주었다. ‘엄마가 널 낳았다’고. 허나 뭔가 이야기를 하려 다가 말았다. 나는 할머니한테 계속 물어 보았다. 그러자 할머니가 이야기를 해주었다. 엄마가 너를 낳기 전에 조금 아팠었다. 그런데 너를 낳자마자 너의 엄마는 너를 안고 내동댕이치려고 했었다. 그런 나의 엄마한테서 나의 작은 아빠가 나를 빼앗아 왔고, 그런 나를 할머니가 안고 나를 달래었었다. 나의 엄마는 다음 날 어디론가 나가 버렸단다. 그래서 할머니가 나를 키웠단다. 나는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매우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나 밖에 없는 딸을, 그리고 세상에 처음 태어난 나를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말이다. 나는 속에서 불타오르는 원망과 분노에 휩싸였다. 그리고 점점 엄마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뚝뚝 떨어졌고, 만약 엄마가 다시 돌아온다 해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엄마에 대한 분노가 쌓여만 가기 시작했다. 엄마에 대한 원망을 안고, 나는 그렇게 무럭무럭 자랐다. (학생 글 일부, 필자 가필) 이런 글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뜨끔하다. 가끔씩은 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생각으로 한없이 부끄럽다. 가정폭력과 가출, 결손 가정의 아픔, 알코올 중독… 학생들의 비밀스런 글을 읽으면서 나는 비로소 가르침의 참 의미를 깨닫게 된다. 꼬르르륵- 배에서 소리가 난다 아침밥을 걸렀더니 배가 고프다 책을 읽고 싶다 읽으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책 내 뱃가죽 안에 있는 배를 채우고 싶다 생각해 보니 배가 고픈 게 아니었다 마음이 고픈 것이었다 밥이 먹고 싶다 먹으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따뜻한 밥이. (윤수교 학생, ‘밥이 먹고 싶다’) 좋은 시란 무엇인가? 종종 드는 생각이다. 도대체 요즘 누가 시를 읽고 있는가? 시인 이 외에 시를 읽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런 자조 섞인 질문을 던져보기도 한다. 리듬이니 묘사니 하면서 시의 내용과 형식을 따지는 것이 옳은가? 우리는 너무 시를 머리로 읽는다. 시는 가슴으로 읽어야 하는데 말이다. 시 ‘밥이 먹고 싶다'는 내가 담임을 맡았던 학생의 작품이다. 담임으로서 내가 그 학생의 생활 환경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기에 윤수교의 글은 좀 다르게 읽힌다. 시의 내용과 형식을 논하기 전에 나는 가슴으로 이 시를 대할 수 있던 것이다. “밥이 먹고 싶다”는 말은 생리적인 현상의 문제가 아니라 정서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따라서 “마음이 고픈” 것이고, 마음을 먹고 싶다는 것으로 확장해 나갈 수 있다. 교육 경력이 한 해 두 해 쌓여 갈수록 모든 일이 왜 그리 어려운가 되묻는다. 하지만 난 그걸 즐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러한 과정 속에서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나는 더 많은 것을 배운다. 어설프고 가공되지 않은 학생들의 글은 내가 여기 왜 있는지, 앞으로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차분히 가르치고 제시하고 있다. 나는 그 글 속에서 스승이 되기도 하고, 학생이 된다. 공자님이 말한 교학상장(敎學相長), 스승은 가르치면서 배우고 학생은 배우면서 성장한다는 말을 알 것도 같다. 국어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내가 느끼는 최고의 보람은 학생들의 글 속에서 나를 찾는 것이다. 학생의 글은 거울처럼 나를 비추고, 반성하게 한다. 그래서 이 긴긴 겨울의 밤도 나에겐 따뜻한 가슴으로 충만하다. 이제 벌써 여름 방학을 기다린다. 그리고 다시 학생들의 다듬어지지 않은 글을 기다린다. 나는 일부러 맞춤법을 지키지 말라고 한다. 맞춤법을 쫓아가다 보면 글의 감정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글은 그 자체가 노다지다.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는. --------------------------------------------------------------------------------------------- 성기수 | 온고을여자고등학교에서 국어와 독서, 문예를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