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김미선 전북대학교 미술대 강사 미술이라는 거울을 통해 한국 근대사의 흐름을 개괄할 수 있는 교육적 전시가 전북도립미술관에서 열렸다. 이 전시는 광복 60주년을 맞아 지난 8월부터 10월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한국미술 100년 - 1부> 전을 모체로 축소, 파생시킨 전시이다. 이 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에 개최되었을 때 미술계에서는 우리 미술의 역사에 대한 반성과 회고를 통해 한국 근·현대 미술의 이론적 정립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일어나기도 하였고, 이와 함께 미술계뿐만 아니라 내외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전시이기도 했다. (참고로, 국립현대미술관은 금년의 1876년부터 1959년까지의 1부에 이어 내년에 있을 2부에서 1960년부터 현재까지의 미술이 다루어진다.) 그동안 한국근대미술에 관한 많은 전시들이 시기별, 주제별 구분을 통한 근·현대미술의 양식사 중심으로 개최되었다. 그러나 이번전시는 사회, 문화적 맥락에서 접근함으로써 사회와 미술, 외적 조건과 내적 정신 사이의 미학적 연관관계를 살피고, 시기에 따라 변화 발전해 온 우리미술의 향방과 정체성을 오늘의 시각에서 조명한 점이 새롭다. 따라서 전시는 1876-1905 (전사前史-근대를 향하여), 1905-1919 (계몽과 항일사이), 1919-1937 (신문화의 명암), 1937-1945 (모 에서 황민으로), 1945-1953 (광복과 분단), 1953-1959 (냉전의 그늘)이라는 소주제로서 구분되는데, 시기별로 사회·문화사적인 상황과의 관련 속에서 동시대 미술의 전개 양상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즉, 제 1전시실에서는 지역적 특성을 고려한 지역 미술가들의 작품과 함께 1876년 개항부터 1905년 을사조약까지 시기의 독립협회 운동(1896-1898)과 광무개혁(1897)을 보여주는 기록물들과 이미지들이 조선의 전통미술의 맥을 잇는 서예나 수묵화와 함께 전시되었다. 1905~1919년 사이의 시기는 계몽과 항일로 규정하고, 계몽운동의 주축을 이루었던 ‘개벽’ ‘소년’ ‘청춘’ 등의 초기 잡지들, 그 표지들과 삽화들을 진열하는 한편, 안창호 등의 서화와 함께 일제와 친일파를 비난하는 만화가 전시되어 항거의 시대상도 동시에 보여준다. 1919~1937년과 1937~1945년 사이의 기간은 일제를 통한 시대·문화적 양상으로 규정했다. 따라서 일제를 통해 서구화 되어가는 수도 경성의 삶을 기록영화와 관련 사진, 그리고 신문과 잡지 등을 통해 보여주는 한편, 일본에서 서양미술을 배워 돌아온 미술 선각자들과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활약하던 수많은 일본인 화가들의 작품들을 나란히 놓고, 이로부터 영향을 받아 관념 산수에서 리얼리즘을 향하는 전통 수묵화의 변천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 1945~53년과 1953~1959년 사이의 기간은 35년간의 식민 상태의 해방과 함께 나타났던 정치적 문화 충돌상황, 그리고 6·25전쟁 와중에도 창작의 끈을 놓지 않았던 젊은 작가들의 열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에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이라는 전후미술계의 최대행사를 발족 시킨 우리 미술계의 저력 등을 보여준다. 즉 전시는 시각예술 전반에 대표적인 회화, 한국화, 조소의 순수미술 분야뿐 아니라 공예, 디자인, 사진, 영화, 만화, 건축과 관련 문헌자료, 시각자료 등을 함께 전시하여 각 시대의 시공간을 아우르면서 전체적인 이해가 쉽도록 도와준다. 그러므로 해서 전시는 단지 미술 판이라는 단편적인 시각에서가 아니라 복합적인 시대적 코드로서 보여 지는 것이다. 우리나라 근대미술의 근간을 이루었던 지난 세기는 일제의 주권침탈에 의한 조선조와의 정치적 문화적 단절로 인하여 고미술과 근대미술의 구별을 뚜렷이 하고 있다. 이는 과학문화의 후진성이 빚어낸 문화의 단층으로서, 우리의 역사에서는 서구라는 새로운 세계관과 문물에 대한 수용, 그리고 새로운 것과 전통적인 도화의식 간의 이질감 등이 피할 수 없는 상황논리와 함께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런데 한편 우리의 근대화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주적인 풍토에서가 아닌 서구에 의해 근대화 과정을 이룩해낸 극동아시아, 즉 중국, 일본의 근대화와는 또 다르다. 왜냐하면 한국의 근대화는 서양이 아닌 미처 근대화를 달성하지 못한 일본인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그래서 미술에서는 특히 세계열강의 미술파장에 발맞추어서 서양적인 것, 중국적인 것, 일본적인 것, 그리고 한국적인 것이 혼합되어진 근대화를 이룩해 냈다는 점이다. 여하튼 이러한 시대적 기반 위에서 당시 근대미술의 화두는 조선조의 전통적 미술과 서구적 현대미술을 어떻게 조화할 것이냐 일 것이다. 즉 이것은 전통의 계승과 근대에 대한 자각(自覺)의 문제였다. 단군 이래 전통적인 한국회화의 사상적 정신적 기원은 중국회화에 두는 것이었고, 이를 고유한 한국회화의 정체로서 이룩한 이들이 조선조 후기의 겸재(謙齋) 정선(鄭敾),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등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전통적인 재료를 사용하는 동양화가였고, 초기 한국근대미술에 있어서도 이러한 동양화가와 서예가가 주류를 이루는 상황은 전반적인 세태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한국미술사에 있어 진정한 근대미술의 출발은 1909년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 1886~1965)이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여 유화를 본격적으로 공부한 때에서부터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다시 말해서 한국의 전통미술과 근대미술을 외형적으로 구분 짓는 가장 뚜렷한 기준으로는 정신적으로나 기술적으로의 서구화, 즉 작품제작의 과학적이고 근대적인 서구화일 것이고, 이에 고희동은 한국 최초로 미술유학생으로 동경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고 1915년 귀국 후에는 한국에서 서양화를 전수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사정은 식민지 망국의 상황에서 아직까지 서양화를 받아들일 문화적 터전이 부족했고, 고희동의 이러한 ‘신’미술 또한 ㅡ 당대 전통화풍의 계보를 잇는 조석진과 안중식으로부터 배운 ㅡ 동양화를 기반으로 서양화의 기법과 시각을 도입한 시도에 불과 했다. 한편 고희동과 같은 시기의 화가들로서는 앞서 언급한 조석진, 안중식 외에도 정학수, 허련, 오일영, 노수현, 김은호, 채용신, 이용우, 최우석, 이한복 등으로서, 특히 이번전시에서는 전주에서 활동했던 묵로(墨鷺) 이용우(李用雨),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 등과 전주가 고향인 유영환, 서병갑 등의 작품도 함께 감상할 수 있었다는 것도 중요했다. 여기에서 잠시 초창기 한국근대미술사에 있어서의 특수성을 살펴보자면, 위에서 언급한 한국근대미술의 초기 작가들에서처럼 동양화가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이들은 사제지간(師弟之間)이라는 특수한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사사(私事)의 조건하에서 계보가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계는 1911년에 창설된 <미술연구원>, 1918년에 창설된 <서화협회>라는 미술단체 등에 의해 이루어졌고, 특히 <서화협회>는 민족계열로서, 1921년에 <서화협회전>이라는 전람회를 개최하고, <서화학원>이라는 미술교육연구기관을 두기도 했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화가양성의 중요한 등용문이었다는 점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이외에도 당시에는 몇 개의 미술단체와 미술학원이 존재했고, 망국의 시대적인 이유로서 친일계열이건, 민족계열이건 간에, 이곳에서 활동했던 중요인물은 자의 또는 타의에 의하여 친일귀족이 되었다는 사실도 하나의 우리의 비극적인 일화일 것이다. 조선의 식민지화에 혈안이 된 일제는 문화회유책으로서 미술을 통한 내선일체(內鮮一體)나 식민지화를 주도했던 것이다. 서양화에서는 고희동 이후 1910년에는 김관호, 1911년에는 김찬영, 1913년 이후에는 나혜석, 이종우 등이 뒤를 따라 일본 유학을 통해 서양화를 연구하였다. 이들 중에서 나혜석은 우리나라 최초의 유학파 여성화가로서 1921년에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서양화 개인전을 개최하기도 한 선구적 인물이이며, 이종우는 1925년 파리로 재유학을 떠나 1927년 프랑스의 <살롱 도톤느>에 입선하는 쾌거를 올린 인물이다. 이때부터는 서양화는 물론 전통 수묵화와 입체작품에서도 근대적인 미술 양식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1920년대에는 김복진(金復鎭)이 역시 동경미술학교 조각과에서 서양식 조소를 배우고 그것을 우리나라에 알림으로서 서구적인 조각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일제통치기간은 우리근대미술사에 있어서 중대한 시기로서 초기의 동양화 우위를 보이던 회화의 방향이 1935년을 전후해서 서양화 우위로 전화되기 시작하였다. 3·1운동 이후의 한국미술계에서는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미술정책인 <선전(鮮展)>, 즉 <조선미술전람회>가 창설되었고(1921), 이에 대항하여 국내에서는 민족계열인 <서화협회전>이, 일본에서는 <선전>을 무시하고 저항하기위한 유학파들의 모임인 <백우회> 등이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였다. 어찌되었든 일제는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선전>이라는 문화 회유책을 시작하였지만, <선전>은 당시의 젊은 화가들에게 있어서 <서화협회전>, <백우회> 등과 함께 서양화가의 등용문이 되었고 자생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였다. 한편 같은 시기 일본은 여러 가지 서구의 미술사조가 횡횡하여 혼란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었고, 또한 유럽은 1차 세계대전의 허무주의와 프로레타리아 예술사상이 지배적으로 나타난 시기였다. 따라서 모든 것을 저항하고자 하는 새로운 가치관으로서 허무적이고 파괴적인 미술사조 ㅡ 야수파, 표현주의, 큐비즘, 추상 등 ㅡ 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되었다. 여기에는 인간의 능력으로서 감각이 새롭게 미술의 중심요소로서 인식되었고, 이러한 여건에 의해 1930년대 한국의 젊은 서양화가들에게 있어서는 작가의 주관적인 예술세계가 지배적인 경향으로 나타나는 요인이 되었다. 이로서 1930년대에 서양화 초기의 자연주의 화풍에서 구본웅, 이중섭, 이인성 등의 야수파적 이면서 표현주의적인 경향과 김환기, 유영국 등의 추상파적인 경향이 한국 땅에서 뿌리내리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번전시에서 구본웅의 작품 <여인>과 우리에게 친숙한 시인 이상(李箱)을 그린 <우인상>은 유영국의 작품과의 양식을 비교하면서 감상할 수 있어서 감상의 묘미를 더할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문화 말살 정책으로 침체의 시기를 거쳤으나, 이상범, 변관식, 장발, 백남순, 김학준, 김환기, 김인승, 이마동, 박래현, 천경자, 황술조 등과 같은 당시 젊은 작가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새로운 표현의 길을 펼쳐나갈 수 있었고, 이러한 여파는 광복이후 세계적인 추세에 발맞추어 1949년에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일명 <국전(國展)>이 창설되어 근대미술의 중흥을 맞이하는 듯 했다. 그러나 1950년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모든 미술활동이 잠시 중단되었고, 이후 미술계는 임시 수도 부산에서의 활동과 1953년 서울에 환도하여 다시 화단을 수습한 1957년까지의 시기를 이후에 나타나는 현대순수추상미술과의 전환점으로 구분한다. 왜냐하면 1957년 이전의 서구미술은 거의 일본을 통해서 받아들여졌다면 이후에는 일본을 통하지 않고 당시의 젊은 작가들에 의한 서양과의 직접적 접촉을 통해 현대미술이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근대미술의 터전 위에서 오늘에 이르러서 새로운 재료의 등장과 실험 정신이 더욱 활기 띤 양상을 보일 수 있었으며, 수많은 국제전에 참여하고, 국내에서도 다양한 국제전을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비약적인 서술로 인하여 아쉬움이 남지만 짧게나마 우리 근대미술의 역사를 간단히 개괄해보았다. 결론적으로 우리 화단은 단군 이후 지속적으로 이어온 우리의 민족혼이자 예술혼으로서, 우리의 자연미와 향토성의 정서적 혹은 정체적 문제들을 다루어 왔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의 삶과 역사의 기록으로서, 처음 발현은 작가 개개인에서부터 시작되었지만 시대적 현실을 통해 마침내 하나의 민족 정서로서 아카디아를 이룩해낸 것이다. 지난 100년은 우리 민족에게 고난과 시련의 굴곡으로 점철된 역사였고, 이에 이번 전시는 단지 과거를 되돌아보는데 그치지 않고, 전시를 통해서 불모의 터전 위에 괄목 할만한 성과를 일궈낸 우리 미술가들의 위상과 창조적 정신을 추모하고 나아가 세계 속에서 한국미술의 정체성과 독자성을 당당하게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미술의 역사는 문화의 역사와 별개로 생각 할 수없고, 그런 이유에서 이번 전시는 미술 이미지를 단순 감상용이 아니라, 시대와 시대정신, 사회상을 표현하는 문화적 맥락으로 다루고 있으며, 우리의 역사를 통해 다시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범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에 미술을 통해 역사와 문화를 알아보고, 한국미술에 있어서 교과서적인 작품들을 볼 수 있는 전시가 이번 도립미술관에서 열리는 ‘미술로 본 한국근대’전일 것이다. 서두르시라. 교과서나 미디어를 통해서만 접할 수 있었던 대표적인 우리 근대미술의 작품들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다시없는 기회이다. 비록 서울 전에 비해 많은 작품과 전시물이 축소되고 비약적인 부분이 없지는 않으나 무릇 제대로 된 미술 감상으로서 이 전시는 반드시 보아야할 우리의 의무일 것이다. -------------------------------------------------------------------------------------------- 김미선 | 숙명여자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졸업했다. 서울시립미술관 인턴과 갤러리 서화 큐레이터로 일했다. 현재 순천대와 전북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