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빈 들에 걸린 하늘의 키가 무척 커 보입니다. 논밭의 작물이래야 대개 한 길을 넘지 않는데 그 빈 자리가 이렇게 쓸쓸하여 적막하고, 가득하여 안도케 하는 연유는 무엇입니까? 저 땅에서 곡식이 자라고 그것을 먹고 우리가 삽니다. 장식을 제거하고 살펴보면, 사람이 흙으로부터 나왔다는 여러 신화는 지극히 사실적인 묘사였습니다. 생명의 근원을 찾아 올라가면, 어머니와 아버지와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먼 조상들의 첫 뼈까지 거슬러 올라가노라면, 그로부터 지금까지 우리를 먹이신 대지와 태양이 변함없이 배경에 등장할 것입니다. 땅은 씨앗을 품고 비와 햇빛이 이를 길러 곡식이 익어갑니다. 그리스 신화에는 대지의 여신이 잃어버렸다 되찾은 딸 페르세포네의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여신의 딸도 여신이 됩니다. 그녀는 땅 위의 어머니와 땅 아래의 남편 사이를 오가며 살았다고 합니다. 이는 작물의 순환생태를 상징하는데, 가련하면서 동시에 비정한 그녀의 성격 역시 작물의 성장에 대한 우려의 신화적 표현일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마야의 옥수수 신 윰 카쉬는 특정 작물에 대한 의존이 어디까지 확대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고 했던가요? 구례 운조루의 두 가마 반이나 들어간다던 통나무 뒤주가 생각납니다. 타인능해(他人能解), 아무나 열 수 있으니 마음대로 가져가라고 써 붙였다고 하지요. 뒤주의 크기로는 잴 수 없었던 넉넉함이 지금도 떠오릅니다. 주는 사람도 허세를 부리지 않았지만 가져가는 사람도 염치를 알아 한 두 되씩만 담아갔다고 합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가 전해 오는 이면에는 그러하지 못했던 사람이 더 많은 데면데면한 꼬락서니가 숨어 있습니다. 왕궁의 탐욕과 음탕을 그린 영화를 보았습니다. 아아, 사람 사는 모양이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지. 조선의 기득권이 바야흐로 공고해지던 15세기, 민초의 삶은 그 절박함이 오늘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만화를 각색한 연속극도 방영 중입니다. 서민의 딸이 호사스러움의 단맛에 취하여 뒤뚱거리는 모습이라니. 근대의 기술과 전근대적 풍속이 공존하는 미야자키 하야오 만화영화의 세계처럼 궁궐을 배경으로 삼은 이 연속극에서도 이중성이 교묘하게 드러납니다. 이 시대의 농부는 국적을 불문하고 다 불만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니 무시해도 좋을까요? 수렵, 채취와 경작에 이어 산업이 세계를 움직이는 동인이 되었습니다. 성급하게 후기 산업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기도 하였지만, 질적인 차이를 인정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습니다. 변함에 주목하면 변함이 보이고, 변하지 아니함에 주목하면 변하지 아니함이 보입니다. 공존과 상생은 구조의 변화와 상관없이 사회를 유지하는 변함없는 힘이 아닐까요? 사라져 버린 문명의 후회에 귀를 기울여야 할 사람은 그들이 아닙니다. 옹기는 아마도 경작 시대의 그릇일 것입니다. 그러나 옹기에 서린 마음 씀씀이는 시대를 초월하여 따뜻하게 전해옵니다. 그것은 조상의 뛰어난 솜씨를 본받자는 투의 실용추구만으로는 결코 파악할 수 없습니다. 편함을 구하지 않는다는 말과 불편을 버리지 않는다는 말의 차이를 생각하며 바람을 맞고 있는 새 옹기의 거슬거슬한 표면을 더듬어 봅니다. 빈 들에서 상념에 잠겨보았습니다.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 정철성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