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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 |
시간에 대한 생물학적 명상록
관리자(2006-01-06 11:58:26)

『시간의 이빨』 (미다스 데커스 지음, 오윤희 정재경 옮김) 글 | 양승호  전북대학교 철학과 강사 12월이다. 잊지 못할 폭설 재앙으로 마무리 짓는 2005년도 어김없이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이맘때쯤이면 한 해를 돌아보며 또 나이 먹어감에 대해 착잡함이 몰려들곤 한다. 제대로 처리한 일보다는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것이 아직도 많은데 어쩌자고 세월은 이토록 속절없이 흘러가 버리고 마는걸까? 신파조의 탄식이 절로 나온다.   새삼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는 사이에 ‘시간’ 에 대해 주목한다. 대체 ‘시간이란 무엇인가?’ 이 책의 저자는 시간이란 “화살도 아니요, 원환 같은 것도 아니고, 끊임없이 원 위에서 돌지만 결국에는 완전히 다른 어딘가에 다다르게 되는 나선과도 같은 것” 이라고 말한다. 이 것은 우리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말하는 ‘시간은 곧 돈이다’와 너무 거리가 멀다. 성공한 사람들의 주장은 시간을 소중한 것으로 인식하게 만들었을지는 모르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시간을 착취하는 사고방식이다. 시간은 그저 흘러갈 뿐인데 시간의 흐름에 우리들은 아까워하고 안타까워하며 안달을 낸다. 해놓은 것이 없다는 핑계로 흐르는 시간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 책은 통상 생물학자인 저자가 노년을 새롭게 해석한 것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내가 볼 때 이 책은 현대인의 잘못된 시간관을 비판하면서 시간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 시간이란 인간과 따로 동 떨어진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을 둘러 싼 모든 만물에게 영향을 미치는 그 어떤 것이다. 저자는 생물학자답게 다양한 생물학적 현상뿐만 아니라 시간이 바꾸는 모든 현실이 얼마나 아름답게 숙성되며, 자라며, 완성되며, 축적되고, 바뀌어 가는지를 보여준다. 저자가 보여주는 시간은 물리학적인 시간이 아니라, 현상학적인 시간이다. 그래서 그는 개발주의자들과는 달리 폐허로 변해 버린 성터나 건축물조차 미적으로 완벽하게 승화 된 모습이라고 말한다. 시간에 대해 우리 인간이 지니는 태도는 달리 표현하면 곧 삶에 대한 태도이다. 산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마주하며 그 속에서 자신을 형성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에 대한 태도는 결국 인생관의 또 다른 이름이다. 사람들은 인생을 적극적이며 긍정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란 대체 무엇인가?  많은 문제가 존재하는 현실을 그냥 눈감고 귀 막은 채 그저 웃으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긍정적인 태도란 결코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수용하라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이 책에서는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을 어떻게 수용할 수 있는가를 냉정하게 자연 세계의 변화 과정을 쫓아가면서 설명해주고 있다. 이 책의 저자인 미다스 데카스는 상당히 유명한 방송인이면서 또한 생물학자이다. 


그래서인지 글은 절로 술술  재미있게 읽히고 사이사이 끼어 든 다소 충격적인 사진들도 상당한 볼거리다. 처음 책을 받아들어 멋모르고 펼쳐 보았던 사진들은 다소 혐오스러웠다. 시체 위에 바글거리는 구더기나 쥐가 있었던 사진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책을 덮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책을 읽어 내려가다 어느 덧 그 사진이 나오는 곳을 읽게 되어 다시 보게 되었을 때는 그 사진을 유심히 바라 볼 수 있었다. 처음 볼 때 너무도 징그럽게 보이던 사진 속의 시체는 나의 또 다른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고 싶어 한다. 시간이 지나간 자리를 지우려 하고 무시하고 외면하려 든다. 계속 팽창해 가는 우주조차 시간의 틀을 벗어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시간에 대해 감히 여러 방식으로 도전하고 있다. 저자는 자연 보호를 한답시고 어떤 고정된 자연의 모습에 집착하며 계속 바뀌고 변화해가는 자연을 고정시켜 버리려는 자세와 태도에 대해 혹독하게 비판 한다. 또한 시간의 흐름에 비켜서서 예술 작품을 복원하려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아주 무모한 짓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우리나라는 아주 빠른 속도로 고령화 사회로 넘어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보다 활기차고 젊게 보이기 위해서 노화를 방지하는 온갖 먹거리와 젊음을 유지하는 비책에다 그것도 모자라서 말짱한 모습에다 칼까지 들이미는 성형수술이 판치고 있다. 시간을 부정하고 새롭고 신선하며 젊고 싱싱한 것만 쫓고 추구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결코 뛰어넘을 수 없으면서도 시간이 지나간 모든 흔적들을 외면한다. 그래서 낡고 늙고 헐고 부서지고 파괴된 것들로부터 멀어지고 싶어 한다. 이것은 가능한 태도도 바람직한 태도도 아니다. 우리 인간이 시간의 흐름에 대해 이토록 저항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사라짐 즉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 책은 모든 동물과 식물 그리고 심지어 인간들이 지어 놓은 건축물조차 시간 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피할 수 없으며 더 나아가 사라진다는 것의 중요성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의 선입견에 반해 ‘영원한 삶’이란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시간은 그 어떤 조물주보다도 위대한 창조자이다. 사라지고 다시 창조되는 것은 모두 시간이 가져 온 변화에 불과하다. 시간이 세상 모든 것을 얼마나 아름답게 바꾸어 놓으며 생물학적으로 필요한 일인가를 저자는 잔잔하게 들려주고 있다. 우리에게 시간의 흐름에 대해 긍정적으로 사고하라는 가르침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수많은 서양의 명상록과 동양의 고전들은 사람들에게 자연의 질서와 시간의 흐름을 수용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지켜 볼 것을 권했다. 이 책의 저자는 그런 고전들의 주장을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서구의 생물학자답게 과학적으로 접근하였고, 그러나 딱딱한 체계와 논리가 아니라 담담한 현상학적 서술로 독자들에게 제시하였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과학적 이데올로기에 젖어 있는 현대인들에게 상당한 설득력으로 다가온다.       


저자가 들려주는 다음과 같은 구절은 노년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이라면 누구나 솔깃할  것이다. “ 70세의 노인이 50세의 사람처럼 보이려고 모든 것을 건다면 어떻게 30세의 젊은이가 그 70세의 노인을 존경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식으로는 결코 경외감을 갖게 할 수 없다. 경외감을 풍기기 위해서는 중요한 일을 하거나 근사한 여름 모자를 쓰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에 자부심을 느끼고 존중하는 것이다.” 이 책은 생물학적 명상록이라고 정의해 볼 수 있다. 생은 잠시 동안의 연극무대일 뿐이다. 맡은 바 책임을 다 한 훌륭한 배우 - 저자는 이것이 꼭 인간만이 아닌 식물과 동물과 곤충과 건축과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그렇다고 말한다 -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 하고 조용히 무대 밑으로 내려오는 것, 그 마지막과 끝이야말로 삶의 완성이며 아름다움의 절정이다. 올 해도 시간의 이빨에 씹혔던 모든 이들 그러니까 문화저널의 독자들, 그리고 배아줄기세포에 웃고 울던 모든 이들에게 이 한 권의 책을 정녕 권하고 싶다. 아마 폭넓은 삶의 맛을 감미롭게 느끼게 하는 시간의 부드러운 혀를 꼭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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