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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 |
한 실존적 몽상가의 반항과 성찰
관리자(2006-01-06 11:56:06)

『상처에 대하여』 (김유석 지음, 한국문연 펴냄, 2005) 글 | 최상 시인 김유석 시인의 첫시집 『상처에 대하여』는 한 실존적 몽상가의 심오한 사유가 시집 곳곳에 정치(精緻)한 언어로 치환되어 독자에게 아픈 즐거움을 선사한다. 먼저 그에게 있어서 현실은 “바람과 모래 「낙타」”이거나 “줄거리는 없고/ 상황만이 끝없이 반복되다 마는 식민지 영화 같은 「소나기」”것으로 인식된다. 시인의 발은 무료한 현실을 딛고 있지만, 눈빛은 먼 곳을 응시한다. 현실을 부조리로 자각할지라도 그는 쉽사리 현실을 부정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반항적인 반어와 역설의 방법을 통해 성찰하면서 현실과 관념을 정교하게 버무려 놓는다. 여기에도 드러내면서 감추기와 감추면서 드러내는 추리소설적 기법을 통해 시적 긴장을 늦추는 법이란 없다. 바로 이러한 이유들로 하여 그의 시는 일상을 다룬 농촌을 소재로 한 시들마저 난해한 측면이 많다. 그의 삶이 지닌 부조리한 현상과 닮아 있는 까닭이다. 수십 년간 농사일을 하면서도, 마음은 치열한 모더니스트를 꿈꾸는 자기 반항적 사유를 통해 그는 역으로 현실을 응시하며 몸을 내맡긴다. 그가 현실과 대면한 자리에는 상처의 흔적이 찍혀 있다. 따라서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소’나 ‘낙타’ ‘카멜레온’과 같은 대상들은 상호주체로서 인식되는 가운데 화자와 동일시(同一視)되어 실존적으로 고뇌하는 주체로 환기되어 등장하는 것은 굳이 낯선 현상만은 아니다. 이들은 모두 그가 상처를 다독이는 가운데 자아(自我)에만 매몰되지 않고 타자(他者)를 동등한 인격체로 인식하며 마침내 “아름다운 길들여짐「소를 모는 노인」”을 추구하기 위해 동반된다. 때문에 그의 시집 곳곳에 자리한 상처는 단지 고통이 머물다간 흔적이 아니다. 그것은 끔찍이도 아름다운 삶의 반려자인 셈이다. 전체 시집은 어느덧 중년에 이르는 시인이 (1) 인생 초입의 꿈꾸기에 들어서 질풍노도로 거침없이 질주하는 시기와 (2) 잘못 든 (이를테면 통속적인) 길에서 방황하고 고뇌하는 시기, (3) 끝으로 작은 깨달음을 얻는 통찰의 시기로 볼 수 있다. 아마도 김유석 시인이 15년 만에 시집을 상재하다 보니 길고 오랜 시간의 간격들이 함께 혼융되어 담겨 있는 듯 보인다. 「무지개」는 그의 이러한 시적 궤적을 한 눈에 집약시킨 시라 할 수 있다. “당신은 아름다운 복선, 집 떠나던 송아지의 눈망울로부터/ 다시 허공에 쓰여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꿈들이 읽혀졌는가”라고 술회하듯, 무지개는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나 젊은 날은 누구든 세상을 믿는 힘이 아니라 스스로를 믿는 힘으로 존재함을 그는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섣불리 희망 따위에 기대지 않는다. 오히려 “희망의 등에 칼을 꽂으며.../ 희망이여 제발 눈뜨지 말아다오/ 그 상처 아물 때까지 내 품에 안겨 죽은 체 해다오 「검은 상처의 블루스」”라고 절규한다. 다른 무엇에 의지하거나 빌붙는 것은 이미 젊음이 아니다. 가슴 속에 끓어오르는 뜨거운 열정과 패기, 지칠 줄 모르는 혈기와 투혼, 집념과 광기만이 젊음을 대신한다. 한 때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이 열병처럼 히피의 대열에 무작정 이끌리며 동참하던 시기가 있었다.  김유석 시인 역시 그 시대, 청년 시절을 보낸 장본인이다. 그러나 그의 눈에 내비친 히피는 동경의 대상이 아니라 회의와 절망만을 안겨 줄 뿐이다. 환각에 도취된 듯 간신히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의식과  몽유인 물 속 같은 세상의 배후에서 독설만이 난무한 까닭이다. 여기엔 재즈의 휘청거림이 있을 뿐, 새로운 것은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새로움이란 “단순함을 변주하며 서로의 경계를 넘나드는 불협화음”일 뿐이다. 때문에 시인은 스스로 “나는 혼돈에 빠진다”고 자책한다. 무지개를 좇아 “소경인 달에 이끌려 들판을 헤맨 끝에 삶이 노래가 되려는 한 순간 툭 끊어져버리는 적막 앞에서 아득한 낭떠러지를 보”게 된 까닭이다. 아니, 하나의 소리를 따르다 전체의 울음이 되는 숱한 밤들을 그가 삶이라 부르지 않는 것은 젊음의 독자성은 사라진 채 몰개성성과 획일성으로 점철되는 일탈만이 횡행하는 까닭이다. 그들이 기존질서에 반항하며 추구하려 했던 것은 진정 새로운 것이 아니라, 단지 ‘새로운’이라는 수식어를 뒤집어 쓴 ‘진부한 새로움’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에 시인은 회의하고 절망한다.       궁극적으로 「밤-개구리 울음」은 ‘아메리칸드림’에 매료되어 서구문화 수용에 무비판적으로 이끌린 젊은 세태를 반영하면서 그에 대한 자기성찰적 물음을 진지하게 탐색하고 있는 시이다.  지극히 도시적이며 문명적인 히피문화의 세태를 그와는 대조적인 시골 봄밤의 각기 따로 울지만 이구동성(異口同聲)인 개구리울음을 통해서 형상화함으로써 비판하는 것은 그의 탁월한 시적능력을 엿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물 속 같은 세상의 배후의 메아리를 소리굽쇠처럼 듣는 백치의 가슴”은 앞으로의 행보가 묘연하다. 이즈음 시인은 스스로를 백치라고 규정한다. 어리석었다는 이야기이다. 가야 한다. 그런데 이제 어디로 가야하지? 스스로 부정했던 세계로 되돌아가야 하나? 이미 그곳은 폐허임을 알면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 그 사실이 시인에게는 더욱 깊은 상처로 각인된다. “이토록 높이 올라 무엇을 익혀야만 하는지「해바라기」”, 삶에 회의가 엄습해오는 것이다. 오디세이와 같은 개선장군은 단지 이야기 속의 사건일 뿐, 좌절된 꿈에서 돌아온 시인에게는 자기합리화가 필요하다. 이 때의 중얼거림 속에는 “인생은 주모가 바뀐 선술집의 술맛 같은 것「삼포 가는 길」”이라는 짙은 페이소스가 깔려 있다. 주모가 바뀌었으니 술맛도 바뀌었다. 주모가 바뀌는 동안 나도 바뀌었으니, 예전 술맛은 아니지만 받아들인다. 그 맛은 씁쓸하다. 현실을 “쉽게 사는 길이 있다「무지개2」”고 깨닫는 순간, 세속적 삶에 길들여지지 않기 위하여 시인은 스스로를 위조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곧 위조는 변신모티브와 같다. 그것은 진실을 감추는 행위이지만, 궁극적으로 감춰진 것이 진실이었음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으로 동원된다.      나의 패와는 상관없이 상대가 패를 내리게 하면 그만인 것,/ 흙탕물을 휘저어 상대를 끌어들이는 일보다/ 말간 물의 수심을 당겨 제 몸을 가리면 되는 것이다./ 패의 서열은 스스로 빠져드는 함정에 지나지 않아/ 높을수록 오히려 자욱한 안개 속에 갇힌다는 사실을 깨닫는 그는                                                  -「풀하우스를 잡은 사내」부분-   그러나 어떤 것들은/ 먼저 제 몸을 노출시킴으로써 상대의 마음 속에/ 숨어들지요. 그것들은/ 스스로 상처를 내고 아물리며/ 상대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살아간답니다.                   -「카멜레온」부분- 패의 서열이 스스로 빠져드는 함정에 지나지 않거나 높을수록 오히려 자욱한 안개 속에 갇히는 것은 스스로를 위조함으로 비롯된다. 카멜레온 역시 제 몸을 노출시키는 역설적 행위가 상대의 가장 가까운 곳에 숨는 삶의 진실로 변주된다. 포우의 「도둑맞은 편지」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발견되듯, 드러내는 것이 감추는 것이다. ‘스스로 상처를 내며 아물리’듯, 상처는 숨어들기 위한 위조의 수단이 된다.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시적 맥락은 “네가 숨어 있는 곳을 알지만 찾지 않「술래」”거나, “남들은 다들 야광찌를 쓰지만 아직도 종종 카바이트 불빛을 사용「밤-낚시」”하는 일련의 행위들 속에서도 모습을 드러낸다. 이미 너에게 트릭을 쓰기 전에 “내가 나에게 속아주는 일에 익숙해졌다는 증거”인 셈이다. 스스로를 위조하는 일은 무언가를 발설해서는 안 되는 비밀을 유지하는 작업이다. 그것은 안으로도 드러나지 않아야 하며, 더욱이 밖으로 유출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깨지지 않는 것은 이미 금기(禁忌)가 아니듯, 폭로되지 않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밖에서 자물쇠 채우는 소리로 시작해서, 안에서 자물쇠 채우는 소리로 끝나는 「비밀, 혹은 비상구가 있는 세월의 집에서」는 이 점을 잘 말해준다. 또 한편 혼자 사는 여인이 기르던 고양이가 죽은 사건을 소재로 (전반부의 소리의 없음이 후반부에 소리의 되살아남으로 끝나는) 역설적 결말에 이르는 「세월」같은 시는 모두 비밀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치밀한 서사 문법이다. 세속적인 것을 거부하며 받아들여야 하는 이러한 일련의 시들에는 삶의 유희와 함께 존재의 거부할 수 없는 심연의 아픔이 동반된다. “그대, 함정에 빠져보았는지”로 시작해서 “그대, 함정을 파보았나”로 끝나는 「거미줄과 현미경」은 상처가 어떻게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되는지 너무도 끔찍이 제시된다. 마치 한 시골 농부가 소송을 위해 법 앞에 서서 기다리지만 끝내 그에게 법의 문이 열리지 않듯, 관념과 현실에서 각기 다르게 소통되는 법의 이중성에 대해 묻는 카프카의 『법 앞에서』가 다시 시로 펼쳐진 듯한 이 시는 김유석 시인의 빼어난 수작 중에 하나가 될 것이 분명하다. 처음, 거미줄에 걸린 벌레는 자신이 덫에 걸렸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한다. 적응해 온 것들이 그랬으므로, ……(중략)…… 날개를 뜯어내고 길을 짚던 더듬이를 부러뜨리며 스스로를 학대하는 동안, 거미는 조용히 기다려준다 그의 고통은 오직 그만의 것이어야 하므로, 늙은 신부(神父)처럼 모습을 감춘 채 이윽고, 치잉칭 옥죄어 육탈을 끝낸 그의 영혼이 날개보다 가벼워질 때, 마치 스스로의 선택인 것처럼 스스로를 받아들이려 할 때, 그러나 거미는 보여준다 거미줄 사이, 얼마든지 통과해 갈 수 있는 공간이 나있음을, 그 보다 몸집이 큰 것들도 탈없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붉은 입속의 투명하고 끈끈한 사슬과 번갈아 오버랩시키며 필경 미망에 빠지고 마는 그의 영혼을 느긋이 즐긴다                                                                    -「거미줄과 현미경」끝부분-     여기에는 거미줄이라는 동일한 공간에서 두 개의 다른 현실이 공존한다. 달리 말하면 속이는 자와 속임을 당하는, 거미와 거미줄에 걸린 벌레가 각기 다른 사유를 내보이는 까닭이다. 거미줄에 걸린 벌레는 자신이 덫에 걸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누구에게든 불행은 예기치 않게 찾아오기 마련이다. 따라서 불행을, 온전한 불행으로 인식하기 전까지 그것은 하나의 관념 상태에 머문다. 적응해 온 것들이 그랬으므로, 스스로를 학대하며 불행을 거부한다. 속임을 당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와는 달리 함정을 파놓은 거미는 애당초 모든 것을 알면서 잠자코 지켜본다. 벌레가 함정에 빠져든 것이 누군가의 조작에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이라고 확신하며 육탈을 끝낸 영혼이 날개처럼 가벼워질 때까지. 거미는 기다린다. 그러면서 보여준다. 거미줄 사이, 얼마든지 통과해 갈 수 있는 공간이 나 있으며, 너보다 큰 짐승들도 빠져나가는데 왜 너만 헤어나지 못하고 버둥거리느냐고? 조롱하며 벌레의 영혼을 느긋이 즐긴다. 그러나 그것은 속임을 당하는 자의 어리석은 불행에 지나지 않는다. 상대가 속임수를 쓴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그 속임수, 이를테면 함정이거나 가시마저 껴안으면 나의 자아정체성을 획득하는 훌륭한 매개물이 된다. 탱자나무를 감고 먼 길을 가는 호박넝쿨은/ 몸이 곧 길이다./ 따끔거리는 곳마다 꽃을 피우고/ 쉬어가고 싶은 곳엔 열매를 매달며 장난처럼,/ 어쩌면 자해하듯 살 속에 가시를 찔러 넣는다./ 무엇엔가 상처받는 건 그것을 사랑하는 일보다 환한 아픔인 줄,/ 온 몸을 쥐어틀며 견디어 나가는 호박넝쿨은/ 박혀든 가시가 미처 생각지 못한/ 빠질 때 생길 고통까지를 살로 삭혀서/ 흠집 하나 없이 매끄란 호박덩이를/ 완고한 가시 사이에 저렇듯 매달아 놓는다.                             -『상처에 대하여』끝부분-               이처럼 김유석 시인의 상처의 다스림은 그의 표제 시 『상처에 대하여』에 이르면 절정에 이른다. 온 몸이 길인 호박넝쿨은 따끔거리는 곳마다 꽃을 피우며, 장난처럼 혹은 자해하듯 상처를 끌어안는다. 박혀든 가시가 미처 생각지 못한 빠질 때 생길 고통까지를 살로 삭혀서, 가시에게 보라는 듯이 흠집하나 없이 매끄런 호박덩이를 완고한 가시 사이에 매달아 놓는다. 그에게 있어서 상처를 껴안는다는 것은 단지 육체의 고통을 치유해내는 작업에 그치지 않는다. 상처를 안겨주는 주체(가시)마저 너그럽게 껴안는 관용과 포용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이제 알겠다. 호박 속이 왜 노랗게 빛나는지를. 그것은 가시무더기 빽빽한 탱자나무 울타리에 댕그라니 내걸린 호박이 자기 내부에 환한 아픔을 등불처럼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이와 같은 내밀한 목도(目睹)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따끔거리는 생활을 깁는/ 마른 멸치같이 청빈한 몸,/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은 너의 정신은/ 언제나 안이다 안으로 간직하는 상처가/ 체온을 덥히고/ 무시로 뒤집히는 안과 밖을 지「바늘」”키는 행위에서 비롯된다. 아니, “귀 하나의 몸엔 늘상 목숨이 꿰이지만, 버려야 할 만큼 헤졌거나/ 꿰맬 수 없는 것들로”인해서 “이 밤을 침엽수림으로 깨어있는「바늘」”시정신의 발로(發露)이다.    「가을강」은 우리가 늘상 보고도 지나쳐 온 것들이, 아주 지극히 사소하고 평범한 주변의 현상들이 어떻게 상처를 다독이며 자기정화에 이르는 가를 제시해준다. 그가 약력에서 밝힌 것처럼 김유석 시인은 농사를 생업으로 한다. 이제 한해의 농사가 마무리되어 수문을 잠근다. 그런데도 자꾸만 새는 소리가 들린다. 가문도 아닌, 그것은 “세월이 저 혼자 단식하는 소리”로 인식된다. 지난 여름 객하(客夏)에 빠뜨린 물그림자를 하염없이 건져 올리며 바닥을 핥으며 우는 강물은 표면적으로는 바닥을 드러낸다. 하지만 맑은 가을강은 스스로 깊어지는 심연(深淵)에 가 닿아 있는 것이다. 가을이 오면 한때 초록으로 나풀거리는 수초들은 흐느적거리며 물 속으로 사그라들기 마련이다. 그 자연스런 현상마저 그에게는 세월이 마치 자비를 베풀 듯, “출가하는 바람의 머리맡에서 수초의 머리카락을 잘라주”는 이타적(利他的) 행위로 변주된다. “언덕에 바람든 청무우 한 뿌리”는 곧 시적화자가 바라보는 대상이지만, 다른 한편 시인의 분신인 셈이다. “바람”이라는 상처를 스스로 껴안으며 한 겨울을 인고해야 하는 시인의 마음이 투영된 대상이다. 그 아름다운 복선, 무지개가 허구(虛構)였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들이 흘러갔던가. 방아깨비의 영혼을 지닌 소년은 이미 가을소나기에 쫓기는 중년의 나이를 먹은 뒤이다. 그리고 그 날의 송아지는 이제는 “먹구름을 뜯으며 우는 늙은 소의 울음”으로 환기된다. 이제 내가 놓여있을 곳은 ‘무지개가 서려 있는 곳’이 아니라 ‘늙은 소의 울음이 들리는 곳’이다. 곧 시인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시인은 나지막히 속삭인다. 무지개여, 이제 내게로 와달라고. 한때 “물방울의 몸을 빌어 들어 올린” 나의 희망들이여, 이제는 다시 늙은 소의 울음 곁으로 돌아온 중년의 나를 추억해 달라고.    내외하듯, 여물을 먹는 소의 잔등에/ 담배를 물고 돌아앉은 노인의 허리가 겹친다./ 닮은 것들은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지 않고서도/ 서로의 몸에 마음을 드리우기도 한다.       -「소를 모는 노인」 끝부분    「소를 모는 노인」에서 펼쳐지는 느리고 아름다운 배경은 어쩌면 김유석 시인이 추구하는 삶의 원초적인 이미지는 아니었을까? 여기에는 그 어떤 불협화음도 없다. 무언가를 바쁘게 재촉해야 하는 열정이나 패기 같은 것은 없다. 탐욕이거나 영화로움은 더욱이 없다. 마치 「메필꽃 필 무렵」에 등장하는 허생원과 나귀가 걸어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들이는 이 한 장의 그림에는 모든 것이 조화와 균형을 맺은 가운데 관계한다. 상처를 다독이는 힘으로, 아름다운 길들여짐 속에서 획득된다.   그래서일까? 그가 농촌의 삶을 소재로 한 시들에서 다른 여타의 시인들에게서 보이듯, 쉽게 분노하거나 현실을 비판하는 시들은 드물다. 오히려 목청을 돋우기보다는 「소」나 「해방영장」에서 보이듯, 내밀한 울분을 참는다. 시지프스가 번연히 떨어질 줄 알면서도 바위를 다시 밀어 올리는 반복과도 같이, 현실보다도 숙명에 항거하며 다독이는 정신이 그의 시에는 깃들여 있다. “흐르는 것보다 가라앉아 맑아지는 것들이 이루는 세상「강물이 흘러가는 마을」”을 지향한다. 그러기에 그가 「먼 불빛2」에서 “아직 땅맛을 모릅니다”라고 했던 고백이 다음 시편들에서는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농촌의 시적 정황을 더욱 견실한 모더니스트적 실험의식으로 껴안는 것, 어쩌면 이것이 김유석 시인만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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