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박눈이 온 다음날 오전 구담마을에 도착했을 때 동네에 들어서자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꼬끼오~’ 헛간 한 켠에 있는 닭장에서, 붉고 화려한 벼슬을 가진 장닭 한 마리가 다섯 마리나 되는 암탉을 거느리고 심심한 듯 하늘을 쳐다보며 놀고 있었다. 마을회관에서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아랫목에 깔아놓은 담요를 무릎까지 덮고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지난주 토요일에 있었던 강건너 싸릿재 사는 오일권씨 다섯째 막내아들 결혼식 얘기로 방안에 열기가 가득했다. “150근짜리 돼지를 통째로 잡아서 그 날 먹고도 남아 싸간 사람도 있었데” 보라색 버선에 누비 몸빼와 조끼를 입고 댕기머리 낭자에 옥색비녀를 꼽은 일흔아홉 살의 먹굴댁이 “그 집은 10남매를 낳아 딸 둘 죽고 8명을 키웠지. 이번에 그 중 막둥이를 여웠어. 자식이 많으니까 며느리들이 끄릿끄릿허니 얼매나 좋아. 식구는 많아야 혀” 한다. “결혼이 늦었제. 서른 한 살인데, 기왕에 헐라먼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해야지” 주름진 손가락에 은가락지를 2개나 낀 80살 먹은 할머니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추임새처럼 대답 했다. 눈 속에 나무 한짐을 하고 온 할아버지가 회관에 들어오자, 점심상을 챙겼다. 기다란 상에 시래기국에 곁들여 경종배추로 담은 김치, 고추절임, 콩나물 무침 그리고 시원한 싱건지가 나왔다. 싱건지는 무우를 큼직큼직하게 썰어서 젓가락에 찍어 한입씩 베어 먹어야 제 맛이 난다. “가을에 삶아서 말려두었던 실가리를, 멸치도 떨어져서 쌀뜬물에 된장만 풀어서 끓였어.” 하지만 도시의 어느 음식점에서도 이런 시래기국물을 맛보기 어렵다. “시골 노인들은 이런 것만 먹어도 건강혀. 술이나 고기가 먹고 싶어도 20리나 되는 강진장까지 가야허니께. 옛날에는 다 걸어 댕겼어. 깐닥깐닥 걸으면, 한두어 시간 걸렸지” 반주로 걸친 소주 한잔에 얼큰해진 할머니들은 TV앞에 앉아 ‘하늘이시여’ 재방송을 보며 커피 한잔씩을 나눠마신다. “동네 당산나무 아래서 영화를 찍는디, 차가 몇 대가 와서 시끌시끌허고 동네가 몇날 며칠을 들썩들썩했당게” 1998년 영화 「아름다운 시절」을 찍은 마을이라는 자부심이 묻어난다. 이광모 감독이 당시에 전봇대가 하나도 보이지 않아 이 마을에서 촬영했다는 「아름다운 시절」은 아버지 세대의 고단했던 삶을 아이들 눈을 통해 바라본 작품이다. 안도현 시인이 국수 국물맛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맛있다고 한 임실 강진장에서, 동계 쪽으로 고개를 넘어가다 섬진강을 건너면 천담마을이 나온다. 천담에서 섬진강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면, 군내버스 종점인 구담마을이 나온다. 매화와 산벚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 녹음이 짙은 당산나무 가지 사이로 강바람이 불어올 때, 빠알간 먹감이 주저리 익어가며 물안개 피어오를 때, 마술을 부린 듯 하얗게 변신하는 겨울 구담마을 섬진강변의 자태는, 언제보아도 항상 정겹고 깊은 맛이 나는 아름다운 시절이다. 유장한 섬진강은 오늘도 뜨거운 가슴으로 구담마을을 안고 유유히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