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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 |
대바람 소리
관리자(2006-01-06 11:19:20)

대바람 소리 -신석정 대바람소리 들리더니 소소한 대바람소리 창을 흔들더니 소설 지낸 하늘을 눈 머금은 구름이 오고가는지 미닫이에 가끔 구름이 진다. 국화 향기 흔들리는 좁은 서실을 무료히 거닐다 앉았다 누웠다 잠들다 깨어보면 그저 그런 날을 눈에 들어오는 병풍의 「낙지론」을 읽어도 보고…… 그렇다! 아무리 쪼들리고 웅숭그릴지언정 ―「어찌 제왕의 문에 듦을 부러워하랴」 대바람 타고 들려오는 머언 거문고소리…… ---------------------------------------------------------------------------------------------- 고통을 음악으로 전환시키는 힘 글 | 최동현 군산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신석정 선생과 나는 개인적으로 만난 일이 없다. 내가 대학에  입학한 것이 1972년이었는데, 그때 신석정 선생은 전북대학교에 ‘시론’ 강의를 맡아 나오셨다. 그러나 나는 선생의 강의를 듣지 못했다. 다만 먼발치에서 오고가는 선생의 고독한 그림자를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교과서에 작품이 실릴 정도로 유명한 시인을 먼발치에서나마 뵐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신기했을 뿐이다. 신석정 선생의 시 「대바람 소리」를 만나게 된 것은 시집에서가 아니라, 국악 창작곡에서였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다니면서 시로부터 점점 멀어졌다. 시로부터 멀어지는 만큼 판소리 또는 국악에 가까워졌다. 그러다가 이상규 작곡의 국악관현악곡인 「대바람 소리」를 만나게 된 것이다. 나는 이 음악 작품의 가치를 자세히 따질 만큼 음악적 식견이 넉넉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 시가 정말로 좋은 시라는 것은 대번에 알아차려 버렸다. 이 시는 신석정 선생의 다섯 번째 시집인 『대바람 소리』에 실려 있다. 이 시집이 나온 것이 1970년이니, 아마 그 어름에 썼을 것이다. 유신이 나기 2년 전,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이 장기 집권을 위해 삼선 개헌을 단행했던 다음해인 것이다. 선생은 아마도 이런 정치 상황을 보면서 답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현실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나설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알겠지만, 6.25때의 좌익활동 경력 때문에 선생의 손발은 공꽁 묶여 있었던 것이다. 이미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곤욕을 치른 일도 있다. 그러나 시인이 어떻게 부당한 현실을 외면해 버릴 수 있겠는가? 이 시는 이러한 갈등을 잘 보여준다. 시 「대바람 소리」의 공간은 안과 밖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 안과 바깥은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창과 미닫이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소통된다. 시인이 방 안에 있으면서도 방 밖의 현상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심한 척 가장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방 밖은 겨울(소설)이고, 대바람 소리가 나고, 눈 머금은 구름이 오고간다. 혹독하지는 않다고 할지라도 을씨년스런 상황이다. 시인은 서실 안에 머물러 있지만 마음이 영 편치 못하다. 국화 향기가 ‘흔들린다’는 표현은 바로 내면의 흔들림을 나타낸다. 그는 거닐다, 앉았다, 누웠다, 잠들다, 깨었다 한다. 서실 밖에서 들려오는 ‘대바람소리’에 시인은 안정부절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 눈에 들어오는 것이 병풍이다. 병풍은 방 밖의 세계와 방안에 있는 나의 소통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거기에 「낙지론」이 적혀 있다. 「낙지론」은 후한의 중장통(仲長統)이 지은 글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산림에 묻혀 처사로 사는 삶을 노래했는데, 그 마지막은 이렇다. “세상의 밖을 거닐고, 하늘 땅 사이를 눈흘겨보아서 한 때 세상의 책임 맡은 바 없거니, 성명(性命)의 한가함을 길이 보존하리라. 이와 같이 한다면 넉넉히 높은 하늘을 업신여기어 우주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제왕의 문에 들기를 부러워 할 것인가.” 시인은 마침내 세속으로부터의 초월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것으로 끝나는가? 아니다. ‘대바람 타고 들려오는’ ‘거문고 소리’를 다시 듣는다. 시인은 끝내 ‘밖’의 세계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대바람 소리는 이제 거문고 소리로 바뀌어 들려온다. 아니, 시인은 듣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 밖으로 나가려 해도, 세상 밖으로 나가 대바람 소리를 잊으려 해도 되지 않는다. 우리는 때로 좌절하여 세상 밖으로 나가려 한다. 온갖 고뇌로 둘러싸인 세상은 사실 짊어지기에 얼마나 무거운 짐인가? 신석정은 ‘안’에 갇혀 있으면서도 ‘밖’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밖의 세계의 아픔들을 아름다운 음악으로 삭여 듣는다. 그것이 바로 신석정 시인의 위대한 내면의 힘이다. 모든 고통을 음악으로 전화시키는 위대한 힘을 이 시에서 느낄 수 있다면, 이는 과장일까? 세상 밖으로 나가려다 머뭇거릴 때, 눈 내리는 겨울, 눈에 갇혀 며칠이고 방안에만 갇혀 지낼 때 이 시를 읽는다. 신석정 시인의 그 큰 눈이 나를 안타깝게 보고 있는 것을 느낄 것이다. ---------------------------------------------------------------------------------------------- 최동현 | 전북 순창에서 태어났다. 전북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1985년 『남민시1』로 등단했다. 현재 군산대 국문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판소리 연구』, 『판소리란 무엇인가』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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