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꾼 꿈은 오래 지속된다 글 | 김선경 문화저널 편집위원 흔히 말하는 내면이란 표면 속에 감추어진 이면이 아니라 표면들 간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강정의 나쁜 취향’ 중에서(한국일보 2005년 12월 20일자) 사람이 사람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어떤 이는 통찰력을 가져서 한 번 보고도 사람을 꿰뚫을 수 있다고 하고, 어떤 이는 미소 하나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자유로이 가져올 수 있다지만,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의 긴 관계만큼이나 믿음직스러운 것은 없을 것이다. 시간 앞에서는 어떤 사람이나 그 거추장스러운 위선의 허물을 벗을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한 가지 일을 오래 해 온 사람, 한 사람과의 만남을 오래 유지해 온 사람, 한 생각을 길게 간직해온 사람...나는 이런 사람이 좋다. 굳이 이면을 들여다보려 애쓰지 않아도 그 사람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은희천(55) 전주대 교수가 목정문화상 음악부문 수상자로 결정 났다고 했을 때 나는 좀 의아했다. 이제야 그 상을 받나, 싶은 생각이 문득 스쳐서였다. ‘은희천’이라는 이름을 나는 오래 전부터 들어왔다. 오래 전부터 그는 ‘글로리아 스트링 오케스트라’ 실내악단을 운영해왔고, 오래 전부터 그는 열성적인 음악가로 이름 나 있었다. 80년대 초반에 창단해서 43회의 정기연주회를 마쳤으니 ‘오래’라는 말을 자주 쓴다 해도 결코 과장된 수사는 아닐 것이다. “전라북도에서 5년 이상 넘어가는 단체 있습디까?” 25년 이상 글로리아 스트링 오케스트라를 끌어온 힘이 어디 있는가를 물으려고 했을 때, 은교수는 다소 목청을 다소 높이며 그렇게 말했다. 짧은 반문이었지만, 그리고 그 뒤에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지만, 그 속에는 많은 ‘하고 싶은 말’이 담겨 있는 듯했다. 그러나 새삼 무얼 더 강변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 듯, 은교수는 70년대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75년도에 만든 ‘고전음악감상회’라는 단체가 있어요. 당시에는 FM라디오도 없었고 흔한 복사기도 없었고 오로지 LP판이 있었던 시절인데...그 시절에 클래식 동호회를 만든 거죠. 연주회를 감상한 뒤 서로 비판도 해주고 그랬는데, 감상하는 사람의 수준이 높아지면 자연히 연주자의 수준도 높아질 수밖에 없어요. 객석을 무서워할 줄 알아야 연주가의 실력이 느는 법이거든. 그렇게 일주일에 한번씩 900회 이상 모임을 가졌어요. 이 써클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도 했으니 나에게는 참 의미가 깊은 동호회지요.” 음악감상실이 따로 있을 리 없었다. 가톨릭센터의 회의실 하나를 세 내서 감상실로 사용했고, 일명 ‘가리방’으로 악보를 복사해서 서로 나눠보며 클래식 음악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그렇게 900회를 넘게 이어온 모임이 ‘고전음악감상회’였다. FM라디오가 보급되고 음악서적이며 각종 클래식 음악 해설서들이 나오면서 고전음악감상회는 문을 닫았지만, 뿔뿔이 흩어진 지 3년을 넘기지 못하고 그들은 다시 만났다. 그 열정과 그 낭만과 그 믿음을 다른 곳에서는 취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필하모니’니 ‘아델라이데’니 하는 시내 중심가의 음악감상실의 뿌리도 이 고전음악감상회에 닿아 있다. 지금도 한 달에 한번씩 모임을 갖고 있다고 하니, 참으로 ‘무언가를 오래'하는 데는 이골이 난 사람 같다. 글로리아 스트링 오케스트라를 조직한 것도 클래식 공부를 위해서였다. 그때가 1981년. 전북지역의 음악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이 따로 앙상블을 공부할 기회가 없어서 음대 출신 학생들의 기량 수련 차원에서 만든 것이 글로리아 스트링 오케스트라였다. 창단 25년을 바라보는 ‘글로리아’는 참 많은 일들을 해냈다. 해마다 2번씩 정기연주회를 했고 열린음악회를 한번씩 가져왔다. 또 ‘찾아가는 음악회’라는 이름으로 도심에서 벗어난 변두리를 찾아다니며 직접 클래식 음악을 들려줬다. 이제는 젊은 사람들 위해서 글로리아 스트링 오케스트라 단장 자리를 물러날까 생각중이란다. 후진양성은 충분할 만큼 이루어졌다고 자신하기 때문이다. 돈벌이에 연연하거나 명예를 탐했다면 글로리아의 이름이 지금처럼 순수하게 지켜지지 못했을 것이다. 누구에게 물려줘도 아쉽거나 안타깝지 않을 만큼 그는 글로리아를 탄탄한 오케스트라로 키워놨다. 아버지의 권유로 중학교 때부터 시작한 바이올린. 오케스트라 운영이다, 학교수업이다, 후진양성이다, 경황없는 중에도 은교수는 자신만의 독주회를 빠트리지 않고 이어왔다. 하고자 하는 일을 오래 하는 데는 이골이 났으니 그럴 법도 하다. 지금도 “기력이 떨어져서 젊은애들한테 뒤쳐지더라도, 그들이 보고 비웃을 정도만 아니라면 무대에 서고 싶다”는 왕성한 열정의 소유자. 그가 빛나는 이유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혼자 소유하는 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나눠준다는 데 있다. ‘찾아가는 음악회’를 통해 시골 변두리 청소년들에게 클래식을 들려주고 직접 해설까지 한 일은 그에게 큰 보람으로 남아 있다. “일부러 변두리학교를 찾아갑니다. 그 아이들은 한 번 들은 클래식을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오페라 한편 못 보고 죽을지 모릅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클래식이 무언가를 알려주고 보고 듣게 해준다는 것이 저는 큰 보람입니다.” 하지만 보람 뒤에는 ‘현실적인 아픔’도 있다. 한번 공연을 하는데 드는 비용이 실비만 따져도 400만원이 넘는다. 밥 한끼씩만 추가해도 금방 600만원을 넘어서는데 연주회하고 받는 비용은 고작 10만원에서 15만원선. 보람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그 아픔을 견딜 수 있겠는가. 그런 와중에서도 후원금이나 상금이 들어오면 그 돈을 모두 학교발전기금으로 쾌척하여 후진 양성하는 데 보탰으니 사람들은 그가 돈 걱정 없이 편히 연주하는 줄 안다. 지금도 그는 바이올린 공부하는 후학들을 위해, 대회에 나가서 1등을 한 학생에게 50만원씩 내놓고 있다. 실기가 우수한 학생에게는 2년 간 장학금도 지급한다. 순전히 교수 개인적으로 만든 장학제도인 셈이다. 20년 이상 연주를 해오다 보니 “레퍼토리가 바닥났다”는 글로리아 스트링 오케스트라. 이제는 한정된 지역에서 한정된 음악만을 할 것이 아니라 뭔가 새로운 도약을 해보고 싶다는 꿈도 있다. 2006년 하반기쯤에 시도할 예정이라는 ‘실내악 축제’가 그 도약대가 될지 모른다. 서울, 대구, 대전, 광주, 전북의 실내악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서로의 연주도 들어보고 실력도 비교해보는 자리. 비교가 없이는 발전도 없다는 것이 은교수의 생각이다. “글로리아는 전북에서는 그런 대로 많이 알려져 있고 연주가 깨끗하다는 평이 많이 있지만 힘이 없어서 아쉽습니다. 그저 연주가 깨끗하기만 해서는 안되거든요. 각 단원의 능력을 최대치로 뽑아내려면 연습을 더 해야 하는데 여건상 그게 안 돼서 아쉬워요. 깨끗하면서도 힘있는 연주를 하고 싶은 것이 제 소망입니다.” 2006년은 글로리아 스트링 오케스트라가 창단 된 지 25주년이 되는 해. 이미 미국 LA와 보스턴에서 초청연주회가 계획돼 있고 또 다른 공연들도 준비중에 있다. 새해에는 감투만 7개가 넘게 쓰고 있는 학교 일도 다 정리하고, 제자들도 열심히 따라오는 놈들만 제대로 가르치고, 오로지 음악활동에만 전념하고 싶다는 은희천 교수. 꿈은 오래 꿀수록 빛나는 법. 오래 꾼 꿈은 오래 지속된다. 그것을 버리지만 않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