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여원경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공연예술과정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말살되어가는 여성의 능력과 사회적 지위, 사회적 메카니즘 속에 스스로 자신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구조에 놓여있는 여성들. 그리 먼 얘기가 아닌 가까운 시대에 놓여 있었던 여성들의 문제이고 지금도 미해결로 남아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굳이 여성에게만 속하는 얘기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면만 있다고 한다면 또 한축을 이루는 남성들의 문제는 가슴이 아프다. 21세기는 남성, 여성을 구별하지 않고 개인의 능력 이상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문제점이 지적되고 논의되었으며, 문제점들의 해결에 있어 발상의 전환 또한 있었지 않나 싶다. 그러나 구체적인 해답을 내리기 보다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의식의 전환이 이루어지며 덮어지고 때론 기형적인 해결점들을 찾아왔다. 창작소극장에서 올려진 <길 위에 서다>가 다시 사람들에게 보여 지고 관객들로 하여금 동감을 얻어내는 것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와 치열하게 핍박받으며 살아온 여성의 얘기에 직·간접적으로 느껴지는 아픔의 정점이 있기 때문이다. <길 위에 서다>는 더 아픔을 감수해야했고 능력저하로 치부되었던 여성의 아픔을 담고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기에 너무나 벅찬 시대 속에서 다시 한 번 태어나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다. 또한 길 위에 서있는 세 사람의 모습은 과거의 아픔, 기억은 버릴 수 없지만 과거의 삶으로부터 자신들의 모습을 분리시키고, 새로운 위치와 삶으로 거듭나는 리미널 원래 어원은 라틴어인 '식역(Limen)'. 이 말은 이곳과 저곳의 ‘경계영역’ 또는 ‘문간방’이란 의미가 있다. 즉 애매성의 시기이며 사람들은 누구나 중간 상태를 통과하게 된다. 위치가 변경되면 사회적인 역할 또한 변형된다. <길 위에 서다>에서의 “길”은 확실하지 않은 미래로 넘어가는 리미널한 상태이다. 그러나 불안한 단계로 넘어가는 기로가 아닌 새로운 위치에서 새로운 희망을 내포한 상황이다. 홀로 남은 자유와 체념이 아닌 희망으로 세상 속에 훌쩍 커버린 자의식을 보여주며 새로운 기대를 온몸으로 스며들게 한다. 여기에서 이 연극이 보여주려고 하는 아픔과 극복을 통한 희망의 메시지가 포착된다. 인형을 제작하는 강다혜, 어린이를 위한 인형극을 제작하는 윤현경 PD, 그리고 신미자 국장. 같은 직장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지만 서로 다른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다. 다혜는 친구들과 겨울여행을 갔다가 사내에게 강간을 당하고, 친구 말남이는 자살을 하게 된다. 이 일로 남자에 대한 혐오감과 무서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를 감싸줄 사람, 방패가 되어줄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한다. 신국장 남편과는 내연의 관계다. 윤현경은 가정(남편, 시댁 식구들)과 일이라는 두 가지 역할에서의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이혼한 이혼녀다. 신국장이 제안한 “여성특집프로”는 본인의 처지에서 자신감이 없다. 신국장은 같은 직장의 남편과 결혼한 사람으로 남편이 다혜와 바람을 피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참고 살아간다. 자기의 어머니처럼… <길 위에 서다>는 두 가지 유형을 드러낸다. 하나는 “아픔과 소멸”이고, 다른 하나는 “패러독스와 희망”의 모습이다. 이들이 펼쳐내는 이야기는 혼자만의 기억창고 속에 묻어두고 싶은 아픈 기억이다. 극 속에 설정된 사회의 단편은 이유를 불문하고 “이혼녀, 매 맞는 여자, 강간당한 기억, 바람피는 남자의 아내”의 꼬리표를 여성들 스스로에게 불명예스러운 것이며 드러내지 말아야 할 일로 인식시킨다. 또한 사회 공동이 해결해야 할 문제점이 아닌 혼자 감내해야 할 개인적인 “아픔”으로 여기는 사회이다. 그래서 이들은 또 다른 길에 서기가 어렵다. 이 극에서 선택한 길은 과거 “아픔”의 완벽한 치유가 아닌 아픔을 “소멸”시켜야하는 자의식을 바탕으로 새로이 시작해야 할 삶으로서의 길이다. 이들은 처음 장면처럼 버스정류장에 서있다. 잊어버려야 할 “아픔”이 아닌 “소멸”시켜나가야 할 자신의 아픔을 가지고, 자신만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고 다시 길을 가려고 한다.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시작을 하려고 한다. 극 속에서 그려지는 여성은 불려지는 이름은 다르지만 우리 주위에 있는 어머니, 아내, 친구, 동생의 모습이다. 이 극에서 다루는 이야기는 일방적인 남자의 잘못으로 몰아가는 내용으로 시대적인 한계는 있지만 동감을 느끼게 만든다. 당신처럼 살기 싫어 인내하며 현재를 지키고 싶었지만 끝내 지키지 못한 자신의 후회를 이야기 하는 신국장, 강간이라는 트라우마를 갖고 또 다른 여성에게 아픔을 주는 강다혜, 가정과 일속에서 이혼하여 사회적 불명예를 두려워하는 윤현영은 기존의 관습에 깊이 얽매이지 않는 현대 여성들의 삶의 선택과 비교하면 미련하게까지도 보인다. 그러나 세 사람의 이야기에 동감을 가지는 것은 지금도 우리가 가지는 패러독스가 있기 때문이다. 패러독스는 어머니의 이야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여성이라는 이름보다 가족에 대한 희생으로 세월의 더께가 쌓여 있는 손과 아련히 멀어져만 가는 뒷모습, 외진 공간에서 시선을 끌지 못하는 사람, 그러나 누군가에게 없어서는 안 될 의미 있는 당신 - 어머니의 이름은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어머니 또한 여성이다. 그러나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은 내 아내, 남의 딸에 있어서는 공통되지 않는다. 이는 자기위주로 생각하는 또 다른 패러독스이다. 이극은 패러독스의 패러독스를 주며 가부장적 사회속의 남자의 잘못보다는 여성들 스스로의 희망이 정점임을 이야기 한다. 극중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 지는 세 인물은 기존의 관습에 눌려있는 자신의 모습을 벗어나 각자의 미래에 대한 자기만의 언어를 처음으로 던진다. “나는 달린다(신미자), 나는 행복하다(윤현영), 나는 괜찮다(강다혜)”. 원작에는 없던 부분이지만 연출의 의도를 살리기 위해 새로이 삽입된 내용이다. 이들은 집안, 가정, 여자와 같이 과거의 사회가 요구했던 권위의식속에 나타나 있는 정상적인 상호관계로부터 분리되어 사회적 일원으로 자신의 삶을 새로이 선택하는 어둡지 않은 터널과 같은 길에 서 있다. 여성이 아닌 사회의 구성인으로 살아가는 참다운 모습의 길! 이제 길 위에 서있는 우리의 자화상을 그려내야 할 시간이다. ---------------------------------------------------------------------------------------------- 여원경 | 2002전주월드컵문화행사집행위원회 실무간사 및 기획팀, 84회 전국체전문화행사 행사운영팀장, 2002 진안아리랑 등을 기획했고, 1999년부터 2000년까지 전라북도립국악원 공연기획실에서 근무했다. 현재는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공연예술과정에 있으면서 공연예술창작집단 우레 사무국장과 전주전통문화중심도시추진단 기획팀장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