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이상조 전북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ㆍ문화저널 편집위원 11월 초 전북예술회관 전시실에서는 가을의 풍성함처럼 개인전과 그룹전 등 여러 전시들이 함께 열렸다. 정경숙의 2회 개인전은 2층 전시실 한 곳에서 열요사이 사회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무척 냉소적이다. 그러나 세태가 그렇더라도 삶에 냉소적인 시선보다 삶에 적극적인 시선이 훨씬 더 매력적이다. 냉소는 사랑 받지 못한 사람의 자기 방어라고 들 말한다. ‘절대 안 된다’는 대답은 봄기운처럼 상쾌하기는커녕 겨울 서리를 씹는 것처럼 씁쓸하고 씁쓸하고 또 씁쓸하다. 20일 가까이 줄기차게 내린 눈이 가뜩이나 얼어붙은 인간관계를 이 겨울, 깊은 눈 속에 꽁꽁 얼려 숨겨 놓을 것 같이 느껴진다. 시간이 흐르고 봄이 오면 그 눈이 녹고 인간에 대한 사랑이 다시 꽃 피울 수 있을까? 우연히 같은 시기에 인간 탐구에 관한 두 개의 전시회가 있었다. 12월 15일부터 28일까지 우진 문화공간에서의 이효문 조각전과 12월 16일부터 22일까지 전북 예술회관에서의 윤철규 네 번째 이야기- 삶-전이 그것이다. 사실, 앞서의 씁쓸하다고 표현한 문장은 ‘반 고흐, 영혼의 편지’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효문과 윤철규에 앞서 고흐를 들먹이는 이유는 그의 미술사적 위상(고흐가 활동하던 당시 그는 가장 전위적인 화가였고 현재 전 세계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작가이다. 참고로 전 세계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모나리자이다.)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단지 “인간 존재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 더 훌륭한 일이라 생각하며 인간이야말로 직접적으로 우리를 감동시키기 때문”에 인물 그리는 일에 매료되었다는,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고흐의 편지의 내용 때문이다. 또한 그의 편지 전반에 걸쳐 예술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구구 절절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인간에 대한 존엄과 사랑이 절실히 필요한 오늘이기 때문이다. 윤철규, 이효문도 그렇다. 윤철규의 미술의 행보는 무척 느려 보인다고 한다. 그리고 비록 매 개인전마다 기법과 조형성에 변화를 꾀하는 이효문도, 요즈음과 같이 발 빠르게 변하는 현대미술의 흐름 속에서 보면 예외가 아니라 한다. 그러나 설령 그들이 느리다 해도 빠르다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이 두 작가가 이번 개인전 작품에서 보여준 따뜻한 인간애는 ‘미술이 이제까지 보여지지 않았던 것을 새로 만들어 내는 것만이 아니라 이미 보여졌고 보여지고 있는 것들, 그 흘러가 버리고 소비되는 것들에 대한 의미를 되묻는 일이고 되묻게 만드는 일’(신미순. Meterial and Immaterial; 안규철論. 재인용)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윤철규는 “다른 이들의 얼굴을 보면 창조적 욕구가 솟구친다”고 말한다. 이효문은 “새로움에 대한 기대감으로 인간을 테마로 삼았다”고 말한다. 윤철규가 그의 말대로 그의 삶 속에서 항상 부대끼며 만나는 사람들이나, 작가 자신의 얼굴을 그려냄으로 희망과 반성의 메시지를 전하려한다면, 이효문은 가족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의미를 찾자고 시도한다. 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윤철규의 이번 개인전 작품의 디스프레이를 보면 그가 느리게 보일 뿐 결코 느리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전시장 입구 정면에 놓여있는 그의 자화상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그의 오랜 지기들의 커다란 인물화가 여럿, 사열하듯 줄지어 높게 걸려 있었다. 전시장을 방문한 사람들은 다 느꼈겠지만 그 크기와 높이는 매우 위압적이었다. 중심의 자화상의 시선은 올려다보는 모습이며 그가 올려다보고 있는 각도가 좌우에 높게 걸려있는 인물의 눈의 각도와 일치한다. 그가 ‘당당’이라 부르는 이, 또는 ‘삐딱’이라 부르는 이를 포함한 그의 지인들의 시선은 모두 작가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애초의 형국이었으리라 짐작하지만 전시장에선 실재로는 압도하는 시선으로 팔짱을 낀 체로, 또는 허리에 양손을 올린 체로 거만한 모습으로 관람객을 당당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그의 예술의 형식이 진부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의 인물화는 이제 한 개인의 개인사를 표현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데몬스트레이션이다. 그는 별명과 애칭을 터놓고 부를 수 있는, 아는 사람들의 얼굴을 통해 이 ‘삐딱’하게 변해 가는 속세의 인간들에게 ‘당당’하게 맞서고 있는 것이다. 이효문의 의도도 그의 전시 방법에서 그대로 보여진다. 그가 이번 개인전에서 보여준 작업은 첫째, ‘낯섬’이라는 제목의 홀로 서 있는 인간을 추상화시킨 작품과 둘째, ‘땅에서 하늘 보기’ ‘바다에 눕다’ ‘동무생각’ ‘함께 가기’와 같은 제목의 동적 인간의 형상을 추상화시킨 작품과 셋째, ‘알’이라는 이미지로 읽혀지는 둥근 형상의 작품으로 구분되어진다. 그러나 첫째와 둘째의 유형은 인간 형상의 표현이 단순하냐 복잡하냐의 차이만 있을 뿐 같은 유형의 작품이다. 이 유형의 작업은 직선으로만 형성된 조형물이다. 따라서 이효문의 작업을 크게 조망하면 ㄷ자 형태의 직선적인 구조물들 중앙에 여러 개의 알이 놓여 있는 형상이다. 이 형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을 직선적 추상의 구조물로 표현한 ㄷ자의 형태로 놓여진 것은 인간의 하체를 의미하며 둥근 형상의 구조물은 알을 의미한다. 즉 낯설게(‘낯섬’) 홀로 서 있던 인간이 ‘땅’과 ‘하늘’ ‘바다’를 통해 인간 관계(‘동무생각’)를 맺으며 ‘알’을 탄생시키며 ‘함께 간다’는 궁극적으로 가족 관계(‘함께 가기’)를 상징하는 작품인 것이다. 지금 이 글은 윤철규와 이효문을 같은 맥락으로 묶고자하는 글이 아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우연히 같은 시기에 열린 두 개의 개인전을 독자들에게 무리 없이 소개하고자 하는 것이 편집의도였다. 하지만 필자가 오랫동안 보아 왔던 작가들로서 두 작가가 거의 엇비슷한 연배이기에 불현듯, 공통분모를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윤철규와 이효문의 작업에서 공통으로 추출해 낼 수 있는 수식어는 거침, 투박함, 형식의 최소화이다. 지금 그들의 작업에서 전위적이거나 혹은 현대적 세련미를 느낄 수 있는 재료, 조형성, 기교를 찾으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나 그들은 고전적 방법론과 재료와 기교로써 최소한의 형식을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고전적 페인팅 기법으로 투박하게 표현하는 윤철규나 커다란 전기톱으로 뚝뚝 나무를 자르는 것으로 작품을 마무리하는 이효문의 그 무 형식적인 형식이 어떻게 다른 형식과 경쟁력을 갖추느냐는 추후에 논의할 문제이다. 아마도 그들의 작품이 행보가 느리다는 시각도 분명 이러한 무 형식적인 작업의 양태에서 기인한 것이겠지만 어쨌든 그들과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일단의 작가들이 우리지역에 존재하며 집요하게 그들만의 형식을 구축하고 있는 것은 특기할 현상이고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앞서 기술한 윤철규 이효문의 사례에서 보듯 지금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성공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들에게 세계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시대적 특성을 간과하지 말라는 요구를 하고자 한다. 꿈틀거리며 자라는 듯한 붉은 식물을 가슴에 안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파하려는 윤철규와 과거를 지우고 미래의 ‘낯섬’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알’의 탄생을 시도하는 이효문의 의도는 여전히 암울한 블루(blue) 톤의 화면 속에서, 또는 투명하나 아직도 어두운(black) 다리 사이에서 다가 올 미래를 기다리고 있다. “색이 강조됐을 때 표현력만이 강조되지 않을까 걱정한다”는 윤철규의 고뇌를 물질과 정신사이에 놓여 있는 간극을 어떻게 좁히느냐는 삶의 고백이라고 알아듣는 것은 잘하는 일일까? 진정 순수한 영혼이 그리워지는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