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의 역사문화 전주에는 구석기시대 이래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으며, 청동기시대가 도래하면서는 상당한 세력체가 전주에 자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전주가 전라도의 수부(首部)로 성장한 것은 통일신라에 들어와서이다. 신라는 백제 병합후, 신문왕 5년(685) 전국을 9주 5소경체제로 편제하였는데, 이때 완산에 주를 설치하여, 전북권을 총괄하게 하였다. 전주(全州)라는 지명도 757년, 통일신라 경덕왕 16년에 한자로 이름이 바뀌면서 완산에서 전주로 개칭되었다. 전주가 거점도시로 성장하게 된 데에는 물길이 바뀜으로 인한 지리적 영역확장 또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전주천이 현재는 도심을 우회해 흐르고 있지만, 원래는 오목대 아래로 해서 도심을 관통하여 흘렀다. 그리하여 전주는 조선 제일의 곡창지대 전라도의 수부(首府)로 자리하였다. 전라도는 농경시대 제일의 곡창지대로 매천 황현(梅泉 黃玹)이 “호남은 우리나라 남쪽의 울타리로 산천의 경계가 뛰어나고 물산이 풍요로워 온 나라가 먹고 입는 자원의 절반을 호남에 의지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그 호남의 중심이 전주였다. 한편, 전주(全州)는 온고을이라는 지명에 걸맞게 사람 살기 좋은 조건을 두루 갖춘 곳이지만, 서북쪽이 열려 있어서, 풍수지리적으로 이를 비보하는 장치들이 마련되었다. 덕진제방, 숲정이, 진북사(鎭北寺) 등이 그것이다. 천년고도(千年古都) 전주 신라하대 견훤은 892년 무진주(광주)를 장악하여 세력을 기른후 900년 거점을 전주로 옮겨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견훤의 전주도성은 승암산자락의 동고산성에서 현 전주고 근처의 물왕멀(水王村)에 이르는 공간에 구축되었고, 왕궁은 물왕멀에 축조되었거나, 또는 승안산 성황사 위에 자리했다는 주장 등이 있다. 전주는 태조 이성계의 본향으로, 조선의 풍패지향(豊沛之鄕)이다. 이성계 집안이 전주를 떠난 것은 그의 고조부인 목조 이안사(穆祖 李安社) 때이다. 조선은 건국직후 태조어진을 모신 경기전을 설치하는 등 전주가 왕실의 본향임을 분명히 하였다. 현재 전주문화유산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경기전, 조경묘, 조경단, 오목대, 이목대, 객사, 풍남문, 전주사고 등도 풍패지향과 관련되거나, 그런 의미를 담고 건립된 것들이다. 현재 서울로 가 돌아오지 않고 있는 태조어진은 그 상징이요, 전주 전통문화의 중심이다. 조선시대 전라도는 오늘날의 전라북도와 전라남도 그리고 제주도까지 포함한 지역으로 총 56개군현으로 구성되었다. 전주는 이런 전라도를 총괄하는 전라감영이 있던 호남의 수부였다. 그래서 풍남문(豊南門) 안쪽에 걸려있는 편액처럼 전주를 ‘호남제일성(湖南第一城)’이라 하였다. 그결과 전주는 전라도의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문화예술의 땅 전주 전주를 “소리의 고장”, “소리의 발상지”, ‘귀명창의 동네’라고들 한다. 그만큼 전주와 소리는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판소리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춘향전>이 이 지방 남원을 배경으로 한 것이며, <흥부전>도 그 무대가 남원이다. <심청전>도 전라도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판소리의 사설 또한 전라도 방언으로 되어 있다. 판소리를 발전시킨 장본인들도 전라도 사람들이었다. 전라도는 판소리의 산실이었으며, 그 중심지가 전주였다. 전주 통인(通人)들의 축제였던 전주대사습놀이는 그 대표적 문화유산이다. 전주는 한지와 부채의 고장이고, 출판문화의 메카였다. 전국에서 가장 질좋은 한지가 여기에서 생산되었고, 양질의 종이와 대나무의 산지를 끼고 태극선 합죽선 등 특산품이 일찍부터 발전하였다. 또한 전주는 수많은 고소설과 서적들이 간행되고, 지켜진 기록문화의 땅이었다. 전라감영에서 책을 찍던 5천여장의 목판이 현재까지도 보존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세계문화유산 『조선왕조실록』이 여기에서 보관되고 지켜졌다. 음식하면 또 전라북도이다. 넓은 바다와 강과 들이 어우러진 지리적 특성으로 다양하고 풍부한 음식재료를 바탕으로 음식문화가 상당히 발달하여 옛부터 맛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왔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곧 전주비빔밥과 콩나물 국밥이다. 한정식도 전주를 대표하는 음식이다. 전주 팔미는 파라시, 열무, 녹두묵, 서초, 애호박, 모자, 게, 무를 말하며, 여기에 콩나물과 미나리를 더하면 전주 10미가 된다. 새 세상을 꿈꾼 전주 훈요십조는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 왕건이 죽기 직전에 내린 유훈으로 8조에 호남차대 내용을 담고 있는데, 차령이남 지역은 풍수지리상 반역의 형세니 그 출신인물들을 등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전라도가 배역의 형세라는 이 같은 풍수논리는 후백제 멸망후 전주·전라도가 견훤의 땅이었다는 것과 함께 이 지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기본 논리구조로 작용하였다. 정여립은 전주출신으로, 기축옥은 그가 선조의 미움을 받아 고향 전주로 낙향한후 대동계를 조직하여, 임진왜란 발발 3년전 선조 22년(1589) 모반을 도모하였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3년여에 걸쳐 동인 1,000여명을 희생시킨, 동서분당후 최대의 사건으로 많은 호남사림들이 희생되었으며, 전라도가 반역향이 되어 이 지역 출신 인재들의 중앙진출이 억제되었다. 이설은 실재설고 날조설이 맞서 있는데, 모반의 사실여부를 떠나, 여립이 혁신적인 사상을 가졌고, 전주가 그 토양이었다. 전주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전개되었던 전라도의 수부이며, 동학의 꿈이 잠시나마 실현되었던 곳이다. 그런점에서 전주가 동학혁명의 시발지는 아니지만, 그 꿈을 이루려했던 중심무대로서 역사의 장으로서 그 의미가 지대하다 하겠다. 전봉준과 김학진이 전주화약을 맺은 후 농민군은 전주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을 수행하였다. 천주교가 전래하여 만개한 곳이 전주다. 전주는 천주교 일번지로 초남이의 유항검이 그 단초를 열었으며, 이후 전주는 천주교의 성지로서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였다.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전동성당자리에서 처형되었으며, 이후 유항검이 전동성당에서 처형되는 등 동정녀 이루갈다부부 등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숲정이 초록바위 전주천가 등에서 처형되었다. 치명자산 자락에는 루갈다부부 등 유항검가족 7위가 모셔진 묘소가 있다. 백제 멸망후 전주 지역에 대한 차대가 없지 않았고, 이런 것들이 지역민들에게 소외감 내지 패배감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통치자의 입장에서 바라 본 관점이다. 전라도는 통치자의 입장에서 다스리기 어려운 존재였으며, 이런 통치자의 부담이 부정적 인식을 잉태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전주ㆍ전라도는 체제 순응적 존재가 아니라, 언제라도 새 세상을 열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존재였다. ----------------------------------------------------------------------------------------- 이동희 | 전북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한국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전주역사박물관 관장으로 일하면서 전북역사문화연구소장과 전북문화재 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