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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 |
테마기획_새벽의 풍경 | 첫차
관리자(2006-01-06 10:51:22)

첫차는 사람과 함께 새벽 공간을 가른다 “요즘 새벽에 첫차 타는 사람들 없어.” 5시가 가까워지는 시내버스 가스충전소 앞에 옹기종기 모여 선 기사분들이 꺼내 놓은 첫마디다. “예전에나 첫차타고 다녔지. 그거 다 옛날이야기여… 10년 전에 왔으면 헐 말이 좀 있었을 것인디.” 버스운전 경력 15년의 조익현(57)씨가 안타까운 웃음을 지으며 추억을 더듬듯 이야기를 꺼내어 놓는다. “그때만 해도 이른 새벽부터 바리바리 짐 싸놓고 첫차 오기만을 기다렸지. 보따리 장사꾼들이 30명은 족히 기다리고 있었어. 그뿐인가 새벽에 일 구하러 나가는 사람도 많았지.” “그때가 참 흥났지. 어두컴컴한데 다들 어디서 나왔는가, 차를 기다리고. 그렇게 하나 둘씩 태우다 보면 한 겨울에 히터 안틀어도 훈훈했응게. 이 차가 나온지 석달밖에 안 된 신차라 히터가 빵빵한데도 영 손님 없이 텅텅 비워서 가니 썰렁혀.”라며 입맛을 다신다. 그래도 몇 명은 탈 것이라는 작은 희망을 품고 855번 버스에 올랐다. 이 버스의 노선은 전주대를 출발해 완산동→전동→중앙시장→모래내→유일여고→웃삼거리를 지나 종점인 소양과 분토에 이른다. 오늘 전국적으로 눈이 많이 온다더니 어느새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버스는 충전소를 빠져나와 출발했다. 전주대에 도착해 기사아저씨는 종점 옆 기사식당에 들어간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나와 충전소에서 차를 끌고 나오는 조익현 씨는 허기를 반찬 삼아 모두가 잠든 새벽 5시 40분에 이른 아침밥을 먹는다. “하따, 오늘 날 제대로 잡고 왔구만. 밖에 눈좀 보소. 저렇게 내리면 오늘 분토에 못 들어 갈 것인디.” 종점인 분토의 경우 도로 상태가 안 좋고 비좁아 눈이 많이 내리면 버스가 다닐 수 없다며 그쪽에서 버스를 타고 나와 학교에 가야하는 학생들 생각에 조익현 씨 이마에는 근심이 스친다. 6시가 조금 넘은 시간 855번 버스는 힘찬 엔진소리와 함께 전주대 종점을 빠져 나왔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을 실감이라도 시키려는 듯이, 빈 버스의 엔진소리는 우렁차기만 하다. 이동교 정류장에서 드디어 첫 승객이 올라온다. 아중리에 있는 아파트에서 경비를 선다는 홍성덕(60) 할아버지는 7시에 전 근무자와 교대를 한단다. 출근하자마자 눈을 치워야 하는 걱정이 앞을 선다고 수심 낀 이마를 문지르신다. “일어날 시간되면 눈이 저절로 떠져. 뭐 습관이지…. 일찍 일어나 생활하는 것이 다른 누구보다도 하루를 길게 사는 거지. 아침에 집을 나섰을 때 지나간 사람들의 흔적 많을수록 자신들의 하루하루가 짧아지는 거야.” 이야기로 한창 꽃을 피우고 있을 때, 한손에 바구니를 든 할머니가 두 번째 승객으로 버스에 올랐다. 임실로 장을 보러 간다는 전유순(62) 할머니는 눈이 많이 와서 갈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한다. 금세 버스는 완산동 간이 시외버스터미널에 이르렀고, 할머니가 부자를 누르자 문이 열린다. “조심하셔, 아줌마.” 운전기사 조익현 씨의 정겨운 인사를 뒤에 남기며 버스는 다음 정류장을 향해 달린다. 인후동에 버스가 들어서고 문이 열리자 두 여자가 오른다. 한 여성은 잠이 덜 깬 듯 좌석에 앉자마자 유리창을 베게 삼아 잠을 청한다. 뒤에 나란히 앉은 여성은 집에서 급하게 나온 듯 아직 머리에 물기가 남아 있었다. 새벽에 일찍 차를 타기 위해 인적 없는 조용한 길을 걸을 때는 아무 생각도 없다는 권미형(23)씨는 “매일 매일 일상이니 그냥 그래요”라며 다시금 유리창에 기대어 잠깐이라도 잠을 청한다. 첫차에 오른 사람들에게는 새벽이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일상의 부분이다. 그러나 새벽을 연다는 것은 누구보다 하루를 먼저 여는 것이고, 이건 앞서 간다는 의미일 것이다. 승객들은 각자 목적지에서 내리고 버스는 철길 밑을 지나 소양으로 향하고 있었다. 더 이상 승객은 타지 않았고 어느덧 소양에 들어섰다. 분토로 향하는 좁은 뚝길은 발목까지 눈이 쌓여 있다. 길을 바라본 조익현 씨는 “오늘은 못 들어가겠구만. 바로 소양으로 들어가야겠어…”라며 방향을 바꾸었다. 종점이라고 해서 따로 주차할 곳이 정해져 있지 않은 소양종점 한쪽 공터에 차를 세우고 다음 출발시간까지 조익현 씨는 잠깐 쉰다. 사람들 가득 싣고 달리던 새벽 첫차의 풍경은 옛 이야기가 됐다. 첫차를 기다리며 줄지어 서있던 사람들의 모습도 아련한 추억에나 숨어 있다. 첫차를 찾는 승객이 없다고 해서 새벽을 여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첫차가 달리는 창가 사이사이 풍경에는 새벽을 여는 분주한 사람들이 가득했다. 언제나 누구보다 먼저 하루를 여는 사람들은 있다. 밤새 눈 내린 아침, 집을 나설 때 깊게 패인 발자국들은 새벽을 연 사람들의 흔적이고, 도로에 선명한 굵은 타이어자국은 첫차가 지나간 흔적이다. 내일도 첫차는 드문드문 2~3명의 승객을 태운 채, 엔진소리 요란하게 새벽을 여는 사람들과 함께 새벽을 가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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