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하는 건데 뭘” ‘새벽’은 하루 24시간 중에서도 특별한 시간이다. 활기차면서도 마음 분주한 아침, 투명한 햇살이 오히려 적막한 한낮, 그리고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노을이 있는 저녁과 달리 그 어떤 감정의 이물질도 거부하는 투명한 시간이 새벽이다. 투명하게 비어있기 때문에 새벽이면 누구나 마음의 부자가 된다. 기도를 나서는 사람, 운동을 나서는 사람, 무거운 가방을 메고 도서관으로 향하는 사람, 심지어 밤새 술 마시고 귀가하는 이의 가슴 한구석에도 어슴푸레한 새벽은 한 움큼의 희망을 선물한다. 하지만 많은 현대의 도시인들에게 ‘새벽’은 잃어버린 시간이다. ‘새벽’은 그저 잠깐 눈을 떴다가 조금 더 늑장을 부려도 된다고 안도감을 주는 ‘잉여의 시간’에 불과하다. 반면, 아직도 도시 한가운데서 ‘희망’과 ‘넉넉한 활기’로 새벽을 열어가는 곳이 있다. 전주시민들이 먹는 과일의 유통 중심지, 전주 송천동에 위치한 원예조합공판장이 그곳이다. 원예조합공판장을 찾은 날은 전주의 수은주가 영하 10도로 곤두박질한 날이었다. 첫 만남부터 포악을 떨던 눈은 그쳤지만, 기온은 오히려 더 떨어지고 있었다. 새벽 5시 30분, 문을 나서자 차갑고 맑은 겨울 하늘에 그믐달이 새침하게 빛나고 있었다. 매주 일요일을 제외하곤 일년 내내 한결같이 공판이 열린다고는 하지만 과연 이 깜깜한 시간에, 더군다나 이렇게 추운 날씨에 사람들이 공판장을 찾을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그곳에 도착했을 땐, 6시부터 시작한다던 공판이 이미 열리고 있었다. 공판장 앞 주차장엔 물건을 사러 온 용달차들로 이미 꽉 차 있었고, 경매가 진행되고 있는 건물 안은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새벽의 활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변변한 난방장치 하나 없이 개방된 구조 탓에 내부의 온도는 밖과 별 차이가 없었지만, 활기찬 삶의 현장이 뿜어내는 열기만큼은 차디찬 겨울의 냉기를 압도하고 있었다. 공판장 안에는 갖가지 과일 상자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하루 동안 전주시민들이 소비할 양이었다. 정읍 사과, 남원 배, 삼례 딸기, 제주 귤, 완주 감 등이 주 품목이었다. 과일 유통업을 하는 한완기(46) 씨는 정읍 사과 사십 상자를 팔기위해 가져왔다. 사과와 배 등 저장이 가능한 과일들을 수확철에 구입해 창고에 보관하고 있다가, 과일 값이 오르면 그때마다 조금씩 내다 파는 것이다. 그는 가져온 사과를 조금이라도 더 높은 가격에 낙찰시키기 위해, 미리 개봉해 놓은 상자 안의 과일을 가지런히 정돈하고 있었다. “경매야 여섯 시부터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물건 가져다 놓고 이것저것 정리하려면 보통 네 시나 다섯 시에는 나와야죠.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거나, 추운 거? 뭐, 늘 하는 일이니까.” 말을 하면서도, 사과를 닦아 보기 좋게 광을 내는 그는 전혀 추운 기색이 없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경매사를 따라 여기저기 미로처럼 쌓인 과일상자 사이를 지나가며 경매를 벌이고 있었다. 한 곳에 멈춰진 경매 행렬은 오랜 시간을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한 더미의 과일 상자를 경매하는데, 불과 채 1분도 걸리지 않아보였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안에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추임새까지 들어간 알아듣기 힘든 말로 경매사가 경매를 시작하면, 중매인들은 한 순간 박스안의 과일을 살펴보고 원하는 낙찰가를 불렀다. 과일의 크기와 빛깔, 감촉을 살펴보고 적정한 가격을 매겨 부르는 것이다. 과일은 수십 명의 중매인들 중 가장 높은 가격을 부르는 사람에게 낙찰되었다. 경매가 끝남과 동시에 이번엔 소매상들이 과일을 살펴봤다. 이미 경매가 끝난 과일상자 위에는 ‘OO 중매인, OOO 원, OO 박스’ 라는 구매에 필요한 모든 정보가 담긴 표식이 놓여있다. 이때 흥정은 없었다. 방금 끝난 경매가에 상자 당 1천 원 정도의 웃돈을 얹어주고 가져가면 된다. 경매에 참여하고, 또 경매를 통해 낙찰한 과일을 소매상들에게 다시 되파느라 몸이 두 개여도 부족할 터였지만, 도매인들은 가뿐하게 모든 일들을 해내고 있었다. 도매인들과 중매인들의 관계는 장사를 하는 사람들 간의 그것이 아니었다. 모두 ‘형님 동생’이었다. 오랜 시간 이곳에서 함께 새벽을 열어온 탓일 것이다. 소매상들도 싸고 좋은 과일을 고르랴, 구입한 과일을 차에 실으랴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공판장 안에는 차를 들여올 수 없기 때문에, 등에 지거나 아니면 리어카에 실어서 밖에 있는 용달차까지 물건을 나르고 있었다. 바쁘게 물건을 나르는 이들의 점퍼는 이미 앞이 풀어헤쳐져 있었다. “빨리 물건 사고 가서, 아침도 먹고 장사 준비도 해야지. 경매 열릴 때 와서 물건 안사면, 좋은 물건 구하기 힘들어. 늦게 오면 남들이 좋은 물건은 다 가져가버리고 없는데, 남아 있는 짜잔한 물건 가져다가 장사 할 수 있가니.” 남부시장에서 채소와 과일을 함께 판다는 박대길(53) 씨의 용달차에는 무우며, 배추, 양파, 대파 등의 채소가 가득 실려 있었다. 과일보다 한 시간 이른 새벽 다섯 시부터 공판이 시작되는 채소 경매에 이미 다녀온 것이다. 박 씨는 짐칸에 자리를 내어 딸기 몇 상자와 사과 두 상자를 더 실었다. 새벽 일찍 시작하는 일이라 젊은 사람들이 거의 없을 줄 알았지만, 공판장 안에는 젊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젊은 사람이라고 새벽에 하는 일 못하나요? 밤늦게까지 친구들하고 술 마신 날은 사실 좀 일어나가 힘들죠. 하지만 습관이 참 무서운 거 같아요. 누구라도 딱 한달만 이 일 하다보면, 힘들다고 하진 않을껄요.” 수입과일 유통을 한다는 이용승(35) 씨는 바나나와 석류, 파인애플, 거봉 등의 수입과일 상자를 잔뜩 쌓아놓고,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이, 동생!” “형님, 불 좀 쐬고 가요.” “장사는 잘 되고? 근디 이거 석류 아니여? 요즘은 석류도 수입하네. 얼마여?” “그거 한 상자에 만이천원이요.” “두 상자 주소.” 물건을 다 사고, 마지막으로 경매장을 한 바퀴 둘러보던 소매상들의 발걸음이 간간히 이어졌다. “매일 전주만 오는 것은 아니고요. 김제, 정읍, 군산 다 가요. 집이 전주라 다른 지역으로 가는 날은 두세 시에는 일어나서 준비해야죠.” 이씨는 경매가 끝나면, 해장국 한 그릇으로 속을 덥히고 다시 과일 창고로 가서 내일 장사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경매는 약 한 시간 반 정도 가량이 지나서 끝이 났다. 여름이나 명절이면 길게는 오전 열한 시까지 할정도로 물량이 쏟아져 들어온다고 하지만, 지금은 제철 과일이 없는데다 과일을 많이 필요한 때도 아니라서 그나마 빨리 끝난 것이라고 했다. 경매가 끝남과 거의 동시에 공판장 안의 사람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 많던 과일 상자들도 까치밥처럼 드문드문 남아 있었다. 새벽 공판장을 나온 이들은 신선한 야채와 과일로, 이제 우리의 아침을 깨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