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에서 전주로 전화를 걸다
“여기, 평양입니다.”
“평양? 정말이에요? 어, 거 신기하네.”
평양에서 인터넷을 접속할 방법을 찾다가 IT전문가에게 물어볼 요량으로 전주의 지인에게 직통전화를 걸었던 것인데 내 전화를 받은 상대방은 정작 용건은 딴 데 두고 평양에서 걸려온 전화가 마냥 신기한지 이것 저것을 물어왔다.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로밍휴대전화가 제공되고 인터넷만 연결되면 지구 반대편과도 실시간으로 채팅을 즐길 수 있게 된 ‘유비쿼터스 시대’에도 평양에서 걸려온 전화는 낯설고 신기한 체험인 모양이었다.
물론 일반 방문객은 평양에서 남한으로 전화를 걸 수 없다. 외국인이 드나드는 호텔 국제전화 창구에서도 딱 한 군데 연결할 수 없다는 곳이 바로 ‘남측’인 까닭이다. 그 외 지역은 비용만 지불하면 얼마든지 국제전화를 사용할 수 있다. 평양에서 서울로 직접 전화통화를 하려면 북측이 직통전화회선을 미리 가설해주어야 한다. 대개 남측 방문단의 성격에 따라 실무연락을 취할 필요가 있을 경우나 기자단의 보도지원 용도인 경우에 한정된다. 번호만 일러주면 남측에서도 직통으로 평양으로 연결된다.
내 경우는 기자들의 평양취재 지원이 주 업무였기에 직통전화와 국제전화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물론 비용이 만만치 않기에 실제 전화사용은 꼭 필요한 실무처리에 그쳤다. 공적인 일이기도 하지만 남과 북 보안기관이 동시에 관리하고 있을 전화에다 대고 사적인 용건을 주절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화면 송출이 필요한 방송사 기자들은 행낭 전달을 통해 실제 촬영 테이프를 보내는 경우도 있지만 급한 뉴스 꼭지는 인공위성을 이용해 화면을 송출한다. 조선중앙텔레비전방송국의 협조를 받아 예약된 시간에 인공위성으로 화면을 송출하는 비용은 대략 10분에 우리 돈 200만원이 든다. 며칠 체류하며 하루에 두세 차례 위성사용을 예약하고 뉴스를 내보내면 1, 2천만원이 훌쩍 넘는다. 펜 기자들의 원고는 팩스로 남측 프레스센터에 전송하는 방법이 간단하지만 정확한 원고를 보내기 위해서는 파일 전송이 필요한 때가 많다. 사진기자의 디지털파일 전송은 더욱 그런데 인터넷에 일단 접속해야 파일을 보낼 수 있기 때문에 우회하는 방법을 써야 했다. 평양은 인터넷망을 필요한 기관에서 연결해서 쓰고 있지만 남측처럼 어디를 가나 쉽게 접속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기자들이 찾아낸 방법은 기자실 국제전화를 노트북에 연결해 중국 인터넷망에 접속하는 것이다. 인터넷로밍이라고 외국 출장이 잦은 사람들이 인터넷 환경이 열악한 오지에서 쓰는 방법을 평양에서 응용한 것인데 남측의 데이콤이나 나우콤 비슷한 중국 통신회사에 다이얼업 방식으로 접속한다. 56K 정도의 속도가 나온다. GRIK 로밍 등에 사전 가입해두면 편리하게 쓸 수 있다. 물론 적지 않은 국제전화 요금쯤은 감수해야 한다.
사람과 사람
자연 풍광이나 건축물에서도 북녘의 사람살이를 느끼게 되지만 역시 북쪽 사람들과의 대면에서 얻는 느낌이 훨씬 생생하고 풍부하게 이북 사회를 실감하게 해준다. 북측을 방문하다보면 가장 일선에서 자주 마주치게 되는 사람들이 그쪽의 안내원들인데 대체로 서글서글한 성격에 달변인 경우가 많다.
민간 사회문화 교류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정치 분야 관계일꾼 못지않게 당성이 좋은 엘리트 출신들이어서 정치적 식견이나 생각이 빈틈없이 잘 정돈되어 있다. 주요 참관지의 해설원이나 접대원 동무들은 특히 자기가 맡은 분야에서 거침이 없다. 음식에 대해 물으면 산지에서, 재료, 요리법, 어디에 좋은가, 독특한 향내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제에 답을 준다. 건축물이나 역사적 기념물 해설을 맡은 동무들은 돌이 몇 미터에 몇 톤, 하는 식으로 정확한 수치에 관련 일화까지 설명을 곁들인다. 만경대, 개선문 등 평양방문의 필수 코스를 반복 참관하게 되면서 이번에는 설명을 어떻게 하나, 귀를 세우고 들어보기도 했는데 똑같은 내용인데도 리듬을 타가면서 청중을 사로잡는 말솜씨들은 정말 기가 막혔다. 여성 동무들은 노래를 청하면 한두 번 빼다가 마이크를 잡는데 한결같이 고운 음색에 경쾌한 몸짓으로 듣는 이를 즐겁게 해주곤 했다.
어디나 사람살이는 마찬가지인 모양. 공식적인 설명 자리가 끝나고 한 순배 술이 도는 연회석이거나 긴 시간 이동하는 버스 옆자리에서 던지는 농담들은 남북이 다 같았다. 작가대회에 참가한 안도현 시인이 북측 안내원 ‘홍’과 버스 안에서 열심히 주고받는 우스개를 엿듣고 있자니 다름 아닌 남측의 그 유명한 ‘○도, ×새’ 이야기가 아닌가. ‘홍’이 열심히 메모까지 하면서 경청하고 있는 품새를 보노라니, 어이구 남정네들이란 그저,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안도현 시인이 어설프게 들려주는 ‘노가리’를 일부 교정하느라고 나도 끼어들긴 했지만.
북측 사람들의 입담도 결코 뒤지지 않아서 그중 기억나는 이야기 하나. 김대(김일성대)를 나온 북측 보장성원(남측으로 말하면 국정원, 또는 통일부 직원쯤 된다) ‘임’이 엄숙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꺼내자 다들 귀를 쫑긋 세웠다.
구 소련을 ‘말아먹은’ 고르바쵸프가 어느 날 러시아 마피아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차 안에 있는 온갖 물건들을 다 내던져 주어도 쫓아오던 마피아들이 고르비가 마지막으로 내던진 말에 줄행랑을 쳤다. 무슨 말이었게? “니네들. 더 이상 따라오면 다시 공산주의 할 거야!” 순간 뒤집어지며 남과 북의 일행들은 배꼽을 잡았다. 웃음은 이내 그쳤지만 공산주의 진영이 붕괴하고 혹은 변화하면서 거의 홀로 남은 사회주의 국가 한 복판에서 그런 농담을 듣자니 묘한 느낌이었다. 자기 체제의 입장에서 보면 ‘불경스러운’ 농담을 ‘임’은 너무도 천연덕스럽게 했다.
그러면서도 ‘장군님’과 자기들의 ‘체제존엄’을 해치는 행위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말을 할 때에는 강한 결기를 보이던 30대 중반의 대남일꾼 ‘임’은, 작년 서울 행사때 남측 동무들이 어찌 술들을 먹이던지 너무 힘들었지만 새벽까지 끝내 버텼다고 했다. “임선생. 왜 그랬어? 술에 무슨 포한이 졌나.” “다른 동무들은 다 자리에 없고, 그래 내가 쓰러지면 이제 사회주의가 쓰러지는 것이잖아. 그래서 아침까지 버텼지 뭐. 돌아가는 우리 비행기에서 완전히 뻗었어. 토하고 난리났댔어.” 하하하. 모두들 즐거운 웃음 소리에 개성 자남산 여관 식당의 공기가 오래 출렁였다.
남측의 방문단을 일선에서 대하는 안내원과 보장성원들이 격의 없고 소탈한 모습을 보인다면 북의 고위층 인사들은 거동의 품위와 말의 정연함이 돋보인다. 조직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받은 오랜 훈련과 거듭된 ‘총화’ 때문에 그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작년에 중국을 방문해서 중국공산당의 국제관계, 당교육 관계자들을 만나는 자리에서도 느꼈던 것이지만 강력한 정치적 중심을 유지하고 있는 사회의 사람들은 정치적 견해가 위 아래 할 것 없이 정돈되어 있다. 거침없는 대화술에 익숙하고 여러 방면에 밝다. 북의 사람들이 대화를 마감하는 이야기는 어김없이 ‘장군님 없었으면 이 정세를 어찌 돌파해왔겠느냐’ ‘우리가 중국과 소련과 달랐던 것은 외풍과 양풍에 휘둘리지 않고 민족중심주의를 유지해왔기 때문이다’는 것으로 모아진다.
남북작가들의 만남
2005년 7월 20일 백여 명의 작가들이 평양에 발을 내디뎠다. 명칭은 <6.15공동선언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 남과 북의 문인들이 분단 60년 만에 한자리에 만나는 자리였다. 대회장인 고은 시인에 백낙청, 신경림, 염무웅, 신세훈, 남정현, 황석영, 김원일, 송기숙, 임헌영, 현기영, 김종철, 황지우, 김훈, 도종환, 김영현, 성석제, 김하기, 안도현, 정도상, 방현석, 김재용, 은희경, 공지영, 김인숙, 신경숙 등 참가 문인들의 면면을 보자니 말 그대로 한국문학전집이 움직이는 셈이었다.
작가들의 방북은 6.15 5주년 행사 직후에 이루어졌다. 6.15민족통일대축전이란 행사 자체가 남북공동선언 5주년을 기념하는 정치적 의미가 컸고, 실제 이 행사를 계기로 당국간의 채널이 복구되면서 한반도 정세는 급격하게 전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만큼 6월의 평양은 정치적 열기로 가득차 있던 공간이었다.
6.15민족축전 기간 중 여러 차례 반복된 남북해외 대표자들의 연설도 <우리민족끼리><민족자주, 반전평화, 통일애국의 3대 공조>로 <외세에 의한 핵전쟁의 참화를 막자>는 데 집중되었다. 물론 남과 북의 차이는 분명했다. 6.15남측준비위 상임대표인 백낙청 선생의 연설은 목청이 낮은 대신 다른 울림을 주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민간교류를 지속해야 하는 것이며 무엇보다 당국의 자주적 결단을 촉구했다. 전쟁을 막고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노력을 강조하되 평화를 위협하는 외부 시도에 맞서서 평화지향세력과의 연대가 중요함을 지적했다. 백선생의 메시지는 우리민족끼리 단합하고 교류하되 <세계와 더불어>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뉘앙스의 차이가 남북의 차이, 또 남측 민간통일운동 내부의 인식과 실천의 차이가 나는 지점이기도 했다.
<손수건 100장이 필요하다> <자박자박 경계를 넘어가는 발자국 소리> <달빛 밝으면 삼천리가 한 마을>. 6월의 뜨거운 정치 열기에 이어 진행된 7월 작가대회에서 남측 문학인들이 들고 간 현수막의 구호들이다. 구호라기보다는 시의 한 구절 같은 이 독특한 감수성이 남측 문학의 폭이기도 했다.
남쪽 작가들은 대부분 5박 6일 동안의 제한된 일정, 행선지에 불만을 표시했다. 어느 곳을 돌아보아도 혁명유적지요, 모든 설명은 수령체제와 연결되는 정치교양이었으니 쉼 없이 이어지는 동어반복에 갑갑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도리어 그것이 이상할지도 몰랐다.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부흥전도인파로 가득한 교회에 다녀온 기분, 너무 따분하다는 느낌이 낯빛에 써져 있었다.
남측 일부 작가들의 불편한 심사는 민족작가대회 본대회에서 일치감치 예견된 것이었다. <애국애족의 필봉을 높이 들고 6.15공동선언 실천에 떨쳐 나서자!> 민족작가대회에서 주요하게 제기된 6.15 시대 작가의 임무에 선뜻 마음이 가지 않은 남측 작가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저 지나가는 의례적이고 상투적인 공식문건 정도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스타벅스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홀짝이고, 어두워가는 도시 풍경을 바라보며 감미로운 재즈를 듣는, 그런 감수성에 익숙한 작가들에게 ‘필봉을 들고 떨쳐나서라’니.
북의 문학인들은 문학에서도 우리 민족끼리의 이념이 구현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종자와 형상이 좋아도 민족의 입맛과 향에 맞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혼혈잡종의 문학을 배격하고 민족성을 옳게 구현하는 것이 민족문학이라는 주장이다. 우리 작가들에게 반전평화, 통일애국투사가 될 것을 요구하는 북의 문학론, 문학에 대한 당의 지도를 당연시하는 북의 문학현실에 국가와 민족, 사회라는 거대담론 보다는 개인의 내면 풍경을 중시해온 남측의 일부 젊은 작가들은 영 입맛이 맞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북의 역사인식과 문학관은 명쾌하지만 거기에는 울림이 적었다. 남측의 감수성을 파고들지는 못했다. <잉크가 아닌 애국의 피로 써야 한다> <민족과 더불어 살고 통일과 더불어 영생하는 작가> <6.15공동선언의 생활력을 문필로 보여야 한다> 무거웠던 북쪽의 언어에 비할 때 남측 문인들을 대표해 발언한 고은 선생의 연설은 또 그만큼 북측 문인들의 화법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고은 시인은 작가의 역사적 의무를 환기시키는 대신 우리 모국어의 우수성을 예찬한 뒤 ‘문학은 살아 있다.’ 한마디 구호로 남측 문학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대변했다.
일월성신이 함께 한 백두산
백두산 정상 부근에는 김정일 위원장의 친필 글씨로 ‘백두산은 혁명의 성지입니다’라는 대형 글씨판이 있다. 그 말 그대로 백두산은 북측에서는 ‘고난의 행군’의 상징이자 북한 지도력의 출발점이다. ‘밀영’이라고 부르는 항일빨치산 사령부가 있던 귀틀집을 둘러보면서 북한체제 60년을 끌어온 신화를 북측이 어떻게 재생산하고 그것을 인민통합의 방편으로 관철하고 있는지 오래 생각보았다.
북이 백두산을 가까운 근세의 ‘실화전설’로 숭앙한다면 남측 인사들에게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원형이 숨쉬고 있는 신화의 땅이다. 남과 북이 서로 다르게 서 있는 입각점을 이어주는 고리는 물론 ‘민족’이다. 그 민족신화의 영산(靈山)에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기 위해 우리 일행은 새벽 2시 반에 일어나 버스로 3시에 출발했다. 구상나무, 자작나무(봇나무), 다양한 수종의 침엽수로 가득 찬 구불구불 산길을 돌아드니 이내 아무런 나무도 자라지 않는 초지가 이어진다. 남측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4시 30분 백두산 정상 근처를 오르니 꼬리를 물고 여명의 새벽을 달려오는 차들의 행렬이 보인다. 05시 5분 해는 떴다.
남북 작가 일동은 바로 눈앞에 펼쳐진 구름바다, 그 사이를 뚫고 불끈 솟아오른 붉은 해를 마주하고 또 그와 똑같은 높이에서 백두대간을 내려다보는 보름달을 등지고서 ‘통일문학의 새벽’행사를 진행했다. 일월성신이 함께 하는 참으로 우주적인 그 시공간에서 남북작가 일행은 ‘민족문학 만세’를 불렀다. 북측 작가들과 똑같은 포즈로, 손을 들어 만세를 부르는 남측 문학인들의 섬세한 촉각에는 지금 어떤 파동이 일고 있을까. 고은의 절규와 드넓은 세계, 황석영의 장대한 유랑. 신경숙 등의 섬세한 응시. 이 모두가 다 한국문학을 풍성하게 하는 것들일 터였다. 북측의 완고한 민족문학, 인민문학 또한 우리 문학영토에서 결코 함부로 지워질 수 없는 소중한 영역일 것이었다.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면서 나는, 우리의 21세기 통일문학은 어떤 모습일까 생각했다.
공존의 삶, 천천히 가는 통일
평양대극장, 평양역, 김책공대를 지나면서 버스에서 내려다보자니 7.27 전승축하(북은 한국전쟁 휴전일인 이날을 ‘미제의 침략으로부터’ 북부 조국을 수호해낸 승리일로 기념한다) 준비가 한창이다. 여러 구호 중에 <우리를 건드리는 자 죽음을 면치 못한다>가 눈에 들어왔다. 백두산 삼지연 근처의 시골에서나 <미제를 축출하자>는 구호를 보았을 뿐(마치 우리가 산골에 가면 70년대의 ‘반공방첩’이 낡은 글씨로 남아 있는 것처럼) 전반적으로 이전에 비해 구호의 수나 직접성이 많이 완화되었다고 하는데 이 구호만큼은 각별하게 읽혀졌다.
구호가 보여주듯 북 사회는 아직도 전시체제이다. 북은 아직도 혁명중이다. 그것이 북이 생존해온 오래된 방식이기도 하다. 남측의 많은 사람들이 휘황한 네온사인과 거대한 욕망의 마천루에 살면서 많은 시간 잊고 살지만, 대한민국 역시 휴전체제 아래 성립되어 있는 과도기 공화국이다. 전쟁의 참화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낯선 손님처럼 느닷없이 다시 찾아올 수 있다. 우리 삶의 시간은 곳곳이 지뢰밭이다.
고은 선생은 최근 한 강연에서 “미우나 고우나 우리는 북한 없이, 또 북한 역시 남쪽 없이 살아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선생은 “다른 장기가 다 건강해도 췌장이 나쁘면 죽는다”는 ‘내장 공동체 이론’을 꺼내기도 했다. 남과 북, 북과 남은 60년의 세월동안 적대적 공존체제를 유지해왔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기대면서 각각 상처 난 체제를 밀어붙여 왔다. 이제 적대적으로 맞대었던 등을 반대편으로 돌려야 할 시간. 각기 다른 곳만을 보고 있던 얼굴을 상대방쪽으로 돌려 찬찬이 서로의 얼굴을 어루만져야 할 시간대가 왔다. 남과 북이 오랜 적대체제를 뒤로 돌리고 협력적 공존체제로 확실하게 나아갈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이 한반도를 근현대사 100년의 시간동안 가장 극적인 체제대립이 진행되었던 현장이자 또 가장 극적으로 냉전체제가 강요해온 질곡을 안에서부터 부숴버리고 자주적 통합발전의 길을 민족역량의 단합으로 개척해나간 곳으로 기억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둘러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남과 북의 영토적 통일은 쉬운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통일은 그런 모습이 아닐 것이다. 오랜 내상을 앓아온 사람들의 통일, 우리 내면의 통일은 천천히 자연스럽게 마음에서 마음으로 진행되어야 할 일이다. 버스칸에서 짓궂은 농담을 주고 받고, 술잔을 채우고, 어깨를 걸고 함께 오래 울어본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게 많아져, 어 언제 통일 되었지, 그렇게 자연스럽게 다가와 있는 통일, 그런 통일이 가장 좋은 통일의 모습일 것이다.
남쪽에서 나를 기다린 것은 수십 통의 밀린 이메일과 문자 메시지였다. 그 허접한 디지털 더미를 뒤지는 동안 내 귓가에는 삼지연 공항에서 듣던 새소리가 환청처럼 오래 맴돌았다. 전쟁의 포화와 열기, 안개 자욱한 거리에서 붉은 스카프를 목에 맨 소년단복을 입고 어느 골목으론가 사라지는 우리 아이들의 환상. 자꾸 그런 화면이 빈 망막을 스치는 것을 느꼈다. 깊은 잠에 취해 세상 모르고 자는 우리 아이들의 얼굴을 매만지면서 나는 오래 오래 평양 풍경을 떠올렸다. 서로 서있는 자리가 뒤집어져 어쩌면 내가 살았을지도 모를 그 반쪽의 삶, 오래 보아온 듯 낯익은 풍경 속에서, 내가 낡은 인민복을 입고서 평양 시내를 걸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