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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 | 연재
영원하라! 하회여!
유교문화의 고장 안동 _ 한국 정신문화의 뿌리
정일관 군산의료원 정신과 과장(2005-12-09 17:19:47)

그리움

학교 앞 주점들이 개강으로 한창 들떠있을 9월의 어느 날, 나도 모교인 원광대병원 신경정신과 개강모임에 참석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은사이신 이귀행 교수님께서 반갑게 부르신다. “자네, 나랑 안동에 갈랑가?” “예? 안동엘요?” 나의 깜짝 반응에 기분이 좋아지신 교수님께서는 지난 8월 중국에 가셨던 ‘문화답사’에 대해 말씀을 해주셨다. “중국산천! 그거 동양화에서 보던 그 산천이더만. 공자묘엘 갔었는데, 안내하시던 교수님이 어찌나 설명을 잘 하시던지 누에 똥구멍에서 실 나오듯 얘기가 끝이 없더라니까. 근데 자네 50도짜리 빼갈 먹어봤는가? …이러쿵 저러쿵…” 신이 나셨다. 그런데 그 팀이 10월에는 안동에 간다는 것이다.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노라니 빛바랜 앨범에서 오래 전 친구를 만나듯, 나의 추억의 시계는 어느새 그립고도 애달픈 20여 년 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래 나에게도 답사를 다니던 시절이 있었지’ 어찌 어찌하다 보니 지금은 정신과 의사를 하고 있지만, 한때 나는 사학과를 졸업한 인문학도였던 것이다. 결국 공부는 못하게 되었지만 나에게는 항상 내가 가지 않았던 길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다. 문득 안동이 보고 싶었다. “안동이요? 가겠습니다.” 그렇게 나의 안동행은 시작되었다.


출발

2005년 10월 22일 아침, 전날 내린 비 때문에 날씨가 조금 쌀쌀해졌지만 맑게 게인 가을 하늘은 더없이 쾌청하였다. 백제기행 버스 안은 어린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로 활기가 넘쳤다. 다들 이제 막 시작하는 1박 2일의 가을 ‘수학여행’에 마음이 들뜬 듯하였다. 버스가 전주를 벗어나자 김승민 실장께서 자기소개시간을 갖자고 제안하셨다. 우리는 각자 앞으로 나와 자기소개를 하였는데, 구성원이 참 다양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 일행들은 혼자서, 부부가 함께, 가족이 모두, 따님과 둘이서, 언니와 함께, 친구와 함께, 나처럼 스승님과 같이 여행을 떠나온 것이었다. 초등학교가 쉬는 날이라 초등학생이 좀 많았지만, 연령은 초등학교 1-2학년부터 칠순의 노교수님까지 참으로 다양하였고 그래서 좋았다. 가족이 함께 오신 유상신 선생님은 자기소개를 하면서 유치환의 ‘행복’을 낭송하셨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머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Good~~!!’ 노래방에서 악만 쓸 줄 알았던 나에게는 낭낭하신 선생님의 목소리는 신선한 문화충격이었다. 듣는 이로 하여금 짧은 시간에 이렇게 확실하게 자기 존재를 각인시키는 것은 처음 봤다. 여러 생각들이 스쳐갔다. ‘아! 정말 멋지네. 나도 언제 시낭송을 배워서 이런 기회가 오면 시낭송으로…. 그런데 저 긴 시를 어떻게 외운담.’ 소풍가기 전날 밤처럼 전날 잠을 설쳐서인지 졸음이 쏟아졌다. 졸다보니 어느덧 첫 번째 목적지인 우복 정경세의 종가가 있는 상주에 도착하였다.


우복종가

서애 유성룡 선생의 수제자로 영남 사림의 한 축을 이루는 우복 정경세 선생의 종가는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자그마한 다리를 건너 종가로 들어갔는데, 다리 위에서 본 시냇물이 너무도 투명하고 맑았다. 그 물로 차라도 한잔 끓여 마시면 내장까지도 깨끗해질 것 같았다. 
우복종가는 자그마한 남쪽언덕에 자리하고 있었다. 대문 앞의 사랑채는 기단을 높이 쌓아 지은 관계로, 밖에서 집을 쳐다볼 때 우러러 보게 되어 있어 자연스레 종가의 위엄을 보이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사랑채의 대청마루에 올라오니 인근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음, 명당은 명당인 듯…’ 종가에는 여전히 그 후손들이 살고 있었는데 선생의 15대 종손이 나오셔서 선생과 종가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종손은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시골 농부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설명 중간 중간에 선생과 당신의 집안에 대해 엄청난 자긍심을 갖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곳은 영조대에 임금님의 하사로 집이 지어졌고, 우복선생의 불천위가 모셔져 있심다. 요새는 5-6대만 되어도 종손이라고 하는데 저희는 15대라예. 영의정? 그까이꺼, 이 지방에서는 쳐주지도 않심다. 학문이 높은 대제학을 쳐주지예. 우리 할아버지 대제학 했심다.” 나의 조상이 어디서 어떻게 지내셨는지 잘 모르는 나로서는 그 ‘자긍심’이 부러웠다.  


부용대

우복종가를 둘러보고 우리는 부용대로 향하였다. 부용대는 하회마을 건너편의 깎아지른 절벽으로, 그곳에 오르면 하회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이번 백제기행의 안내자이신 사진작가 이흥재 선생님은, 하회마을 답사는 가을에 그것도 부용대에 올라 하회를 전체적으로 조망한 다음에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부용대를 올랐다. 게으른 몸에 땀이 조금씩 배어나올 무렵, 갑자기 앞이 탁 트이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아! 부용대인 것이다. 나는 말이 안 나왔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하늘, 노오란 은행나무와 가을들녘, 갈색의 운동장과 초록의 소나무 숲, 하얀 백사장과 푸른 물줄기, 검은 기와집과 황토색의 초가. 이 모든 것들이 가을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나는 눈앞에 펼쳐진 풍광에 머리가 어질어질하여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마을이 그냥 있어준 것만도 고마웠다. 
I LOVE YOU!, 영원하라! 하회여! 


겸암정사

부용대에서의 감격을 뒤로하고 내려오는 길에 겸암정사에 들렀다. 이곳은 서애 유성룡의 형인 겸암 유운룡 선생이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쓰던 곳이라고 한다. 겸암정사는 부용대보다는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집 앞을 흐르는 낙동강의 유속을 느낄 수 있었고, 하회의 모습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부용대에서의 빛나는 풍광에 비해 은은하고 차분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안정감을 주었다. 옛날에 학문을 하던 곳이라고는 했지만, 뜨거운 여름날 이곳 대청마루에 누워 낮잠을 잔다든지, 달빛을 벗하며 술 한잔 한다면 정말 그만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생각, 저 생각, 즐거운 상상들을 하며 버스로 돌아오는데, 길가의 가을 정취가 장난이 아니다. 노오란 가을 들녘(벼 잎사귀가 어찌나 노랗던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흐드러진 억새,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찰랑 찰랑거리는 햇빛. 버스에 올라 말없이 창밖을 보다가 우연히 교수님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우리는 환하게 정말 환하게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이것이 이심전심(以心傳心)이란 것인가?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병산서원
진한 감동을 가슴에 안고 우리는 병산서원으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이흥재 선생님이 병산서원에 대해 극찬을 하신다. “병산서원은 서애 유성룡을 모신 서원으로 그의 수제자 우복 정경세가 세웠는데 서원의 아름다움은 자연과 인공미의 조화로 우리나라 서원건축의 백미입니다. 건축을 전공하는 사람은 병산서원의 아름다움에 그저 눈물만 흘린다고 합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서원이?’ 잔뜩 기대를 안고 서둘러 버스에서 내렸다. 그런데,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고 했던가? 병산 서원을 처음 본 느낌은 그저 ‘좋다’라는 정도. 나에게는 눈물이 아니라 콧물도 안 흐르니, ‘아! 슬프구나! 나의 무식함이여!’ 하지만 이흥재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조금이라도 병산서원의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계셨다. 만대루에 올라 서원 앞의 병산과 낙동강을 바라보게 하시고, 입교당에서 다시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하시고,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가을 햇살에 따라 또 달라지는 병산과 낙동강을 느껴보라 하셨다. 그리고 서원 구석구석을 돌아다니시며 절묘한 서원의 공간 구조를 설명하셨다. ‘아이쿠, 이렇게 고마울 수가!’ 이런 좋은 곳에 와서 감상하는 것만도 고마운 일인데, 더 많이 보고 느끼라고 저렇게 열심히 설명까지 하시니. “감사합니다. 선생님! ^^ ” 선생님의 설명을 열심히 들으면서 ‘무식(無識)의 눈’이 조금씩 열리는 듯하였다. 하지만 거기까지. 나의 눈물은 끝내 보이지 않는다. 
병산 서원은 정면에서 봤을 때, 우선 높게 솟은 만대루가 인상적이었다. 7칸으로 길게 늘어선 만대루는 그 모습이 약간 고집스러우면서도 당당하여 바라보는 이를 압도하고 있었다. 만대루에 올라 앞을 바라봤을 때는 병산과 백사장이 은은히 눈에 들어왔고, 뒤를 돌아봤을 때는 병산서원의 모습이 전체적으로 품에 안기는 듯했다. 그리고 사방이 툭 터져 있는 만대루는 건물 안에 있으면서도 건물 밖에 있는 느낌을 주었다. 병산서원이 선생님이 말씀하신대로 ‘자연과 인공미의 조화’라고 했을 때, 만대루는 자연의 병산과 인공의 서원이 만나서 교류하고 있는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만대루 아래를 지나 서원 안으로 들어오자, 자그마한 마당을 중심으로 정면에 강당인 입교당이 그리고 그 양쪽으로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었다. 내부 모습들은 정갈하고 단정하여 마치 조선의 선생님들을 만나 뵈는 듯 했다. 서원은 전체적으로 자그마하지만 빈틈없이 꽉 찬 느낌이어서, 딴 짓 못하고 공부만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평소 ‘공부’보다는 ‘딴 짓’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이곳에 살면 좀이 쑤실 것 같았다. 병산서원을 구석구석 돌아본 우리는 병산을 몸으로 느껴보자는 선생님의 제안에 따라 서원 앞 백사장으로 나갔다. ‘조선의 선비들은 이곳 백사장에서 무얼 하고 지냈을까? 선탠? 기마전? 수영? 축구?’ 즐거운 상상들을 하며 백사장을 거니는데, 어느새 어둑어둑 해가 지고 있었다. 배도 고파왔다. 오늘 저녁은 간고등어가 나온다는데, 그래, 내가 다~ 먹어치우겠다. 하회로 가자!


접신(接神)
우리는 해가 완전히 진 다음 하회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에서 제일 크다는 민박집에 저녁식사가 마련되어 있었다. 배가 고팠던 나는 간고등어를 반찬으로 저녁식사를 맛있게 먹어치웠다. 슬금슬금 옆 사람 눈치를 보며 두 그릇씩이나. 식사 후, 우리의 접신(接神)의식을 위해 동지를 규합하였다. 사람들이 모이자 우리는 문화체험을 한다며 먼저 안동소주를 주문하였다. 그런데 내 입맛에는 ‘참이슬’이나 그보다 10배 비싼 ‘안동소주’나 별반 차이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평소 술 좀 마신다는 나로서는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았다. “아! 깨끗해요. 깨끗해. 안동소주 좋은데요….” 어설프게 안동소주를 맛만 본 우리는 막걸리를 마시기 시작했다. ‘역시 나한테는 막걸리가!’ 술이 몇 순배 돌자 마음도 뿌듯해지고 이야기도 풍성해진다. 우리는 밤이 늦도록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음날 깨보니 무슨 얘기를 했는지,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분위기만은 참 좋았던 것 같았다. 그때 즐거운 시간을 함께한 모든 분들에게 전하고 싶다. 
Good luck to you!


도산서원
전날 접신이 과했는지 아침에 일어나서도 머리가 어질어질. 좀 더 잠을 청하는 바람에 하회마을 투어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못내 아쉬웠던 나는 아침 식사를 급히 마친 후 혼자 하회마을을 돌아봤다. 마을이 참 예뻤다. 강둑에 올라가 전날 엄청난 감동을 준 부용대도 보고 백사장으로 내려가 하얀 서리가 입혀진 모래밭을 거닐기도 했다. ‘이렇게 상쾌할 수가!’ 
우리는 다음 답사 장소인 도산서원으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이흥재 선생님께서 조선사림의 계보와 그들의 사상인 이기론(理氣論)에 대해서 설명해주셨다. 어려운 내용이지만 어찌나 예를 잘 들어가며 설명을 하시는지 이야기 듣는 재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선생님 설명에 푹 빠져있는 사이 버스는 도산서원에 도착하였다. 
주차장에 내려 도산서원으로 오르는데, 오른편의 시원한 낙동강과 왼편의 푸른 숲 그늘이 참배하는 이의 마음을 맑게 하였다. 우리는 퇴계선생이 말년을 보내셨다는 도산서당을 먼저 둘러보았다. 작은 방과 마루, 부엌으로 이루어져 있는 서당은 너무도 단출하였다. 선생님의 방은 한사람이 누우면 알맞을 정도였고 부엌은 두 사람이 일하기 힘든 공간이었다. 기름기가 전혀 없는 모습에 마음이 숙연해지면서 잔잔한 감동이 밀려왔다. 나는 도산서당의 모습이 너무도 좋아 빛바랜 툇마루를 쓰다듬어 보고 문고리를 잡아보기도 했다. ‘아이쿠, 이런 식으로 또 감동을 먹다니.’
그리고는 서당 뒤편의 도산서원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이름 모를 나무 앞에 자그마한 팻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박정희 대통령 기념식수.’ 옛날에 늠름하고 당당했을 팻말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듯, 그 모습이 귀엽고 애교스럽기까지 했다. 도산서원은 관광객이 많아서인지 전체적으로 자그마하지만 빈틈없이 꽉 찬 병산서원에 비해 크지만 좀 산만한 느낌을 받았다. 유물 전시관에서 선생님의 일대기를 보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알았다. 선생님이 과거시험에서 세 번 떨어졌다는 것이다. 학자의 경지를 넘어 성인으로까지 추앙 받는 선생께서 시험에서 세 번이나 떨어지시다니, 기출문제를 안풀어보셨나? 아무튼 시험에서 세 번이나 떨어지신 퇴계선생께 더 정이 가고 친근해지는 것 같았다.


봉정사
점심식사로 이 지방의 별미인 헛제사밥을 먹었다. 막상 먹어보니, 우리 집 제사밥과 비교해 더 맛있는 것도, 그렇다고 못할 것도 없는 평범한 음식이었지만, 하나라도 이 곳의 멋과 맛을 소개하고자 하는 운영진들의 노력을 느낄 수 있었다. 점심밥을 고맙게 먹고 우리는 봉정사로 갔다. 
봉정사는 전체적으로 단정한 느낌을 주었다. 단청 또한 요란하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이어서 푸근하고 좋았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건물인 극락전은 설명서에 배흘림 기둥, 주심포 양식, 맞배지붕 등 교과서에서 본 용어는 다 나왔지만, 나는 안타깝게도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었다. 어딘가 모르게 답답하고 고지식해 보였다. 반면 대웅전은 풍체가 당당하면서도 안정되어 있어, 내 눈에는 극락전 보다 훨씬 더 멋있어 보였다. 
봉정사를 둘러본 우리는 부속암자인 영산암으로 올라갔다. 영산암의 문루에는 초서로 ‘雨花樓(우화루)’라고 씌어진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이름 한번 정말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화루 아래를 통하여 영산암에 들어서니, 자그마하고 맑은 마당이 나왔다. 마당에는 부채살처럼 펼쳐진 향나무와 여러 관상수 들이 있었고 주변은 스님들의 방들이 빙 둘러져있었다. 마루에 걸터앉아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싹 가시는 듯한데, 옆에 앉아 계신 교수님께서 한 말씀하신다. “햐~좋다.”


집으로
전주에 도착하니 사모님께서 마중 나와 계셨다. 전날 전주 올 때도 당신의 차로 태워다 주셨는데, 이렇게 고마울 수가. 백제기행 일행들에게 감사의 작별인사를 드리고 익산으로 돌아왔다. 그냥 집으로 가기가 아쉬웠던 나의 마음을 아셨는지 교수님께서 또 한 말씀하신다. “자네, 매운탕 좋아하는가?”

정일관 | 정신과 전문의. 현재 군산의료원 정신과 과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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