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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 |
저작권은 박물관으로 가야하나?
관리자(2005-12-09 17:11:04)
KBS, MBC, SBS 그리고 EBS(교육방송) 등 4-5개의 지상파 채널만이 있던 시대를 꽤 오래 살았다. 그런데, 지난 10여년 사이에 종합유선방송, 위성방송 등 새로운 방송사업자들이 시장에 들어옴으로 인해, 가용채널은 두 자리 숫자를 훨씬 뛰어 넘어 버렸다. 12월 중에 개국될 DMB 방송은 핸드폰으로 지상파방송을 보고 들을 수 있게 되어, 기존 방송매체들이 잔뜩 긴장하고 있다. 한편, 전국에 강력한 통신망을 구축하고 있는 한국통신(KT)이 오래전부터 눈독을 들이고 준비하고 있는 IP-TV의 경우 이론상 전 세계의 모든 채널을 안방에서 다 볼 수 있게 되는데, 이와 같은 통신업체의 방송시장 진입에 대하여 기존 방송매체들 뿐만 아니라, 방송인허가의 주무관서인 방송위원회가 이례적으로 절대불가 방침을 천명하고 나섰다. 매체들 간의 싸움이야 어떠하든지 방송소비자(시청자) 입장에서는 방송콘텐츠와 방송매체의 홍수 속에 빠져 즐거운 비명을 지르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방송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음원을 고정하는 기술 역시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여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많이 볼 수 있었던 LP와 카셋테이프는 이제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대신 그 자리를 CD, DVD가 차지한 지는 오래되었고, P2P 방식의 음원공유를 가능하게 하는 MP3 파일 재생기인 MP3 플레이어는 주 음악소비층인 청소년을 비롯한 젊은 층에서 필수품이 되고 있다. 더 나아가 아직도 음반을 사서 듣고, 영화를 극장에서 돈을 주고 보느냐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으레 음악과 영화는 인터넷에서 요령껏 다운받아 사용하는 것으로 요즘 젊은 층 사이에 인식이 퍼져 있다. 저작물 유통에 관한한 다매체, 인터넷 시대가 도래하였는데, 이것이 기술적으로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콘텐츠의 디지털화”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디지털 시대에 들어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정보의 공유를 주장하게 되고, 저작권 또는 저작권법을 기술발전에 따른 수혜를 방해하는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저작권질서는 과거 아날로그, 종이출판시대의 것으로서, 디지털, 온라인시대에는 맞지 않으며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된다고 하는 것이 그 주장의 요지다. 과연 이 주장이 옳은가? 크게 보면, 이러한 주장은 일부 맞는 면이 있기도 하고 틀린 부분이 있기도 하다. 저작권을 둘러싼 법률관계의 주체는 크게 보면 창작자와 이용자로 나누어 볼 수 있지만, 시장논리에서 조금 더 세분하면, 생산자인 창작자와 소비자인 대중, 그리고 이들을 매개하는 ‘공급 및 전달자’로서 각종 저작인접권자들이 있다. 저작물이 유통되는 시장의 관점에서 보면, 전에 비하여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저작물이 시장에 공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새롭게 창작되는 저작물의 양이 늘어난 점도 있지만, 그보다는 소비자 입장에서 볼 때, 공급(전달)자의 증대로 인하여 저작물에 접할 기회가 전에 비하여 획기적으로 늘어났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다시말해, 소비자 입장에서는 전에 비하여 엄청난 공급의 증대가 있는 것이다. 한편, 생산은 거의 그대로인데 공급이 획기적으로 늘었다고 할 경우, 수요가 같은 비율로 증가하지 않는다면, 수요공급의 원리가 가격을 결정하는 시장경제 하에서는 가격이 떨어져야 맞다. 그런데, 저작권자들이 공급의 증대에도 불구하고 종전의 가격(단가)을 유지하게 되면, 늘어난 공급물량에 대하여 단가를 적용한 금액(이하 "A"라고 한다)은 전적으로 저작자들의 몫으로 되어 그들의 전체적인 수입이 급증하게 된다. 바로 이점에서 저작물의 단가를 고집하려는 저작자단체(예컨대 한국음악저작권협회)와 이를 떨어뜨리려고 하는 이용자단체(예컨대 정보공유연대)간의 힘겨루기가 발생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저작인접권자단체(예컨대 한국음원제작자협회)도 제몫 찾기에 가세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 3자간의 균형점을 어떻게 잡느냐 하는 것은 오늘날 저작권을 둘러싼 모든 문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균형점을 찾는 과정에서 쉽게 범할 수 있는 오류 두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저작권을 포함한 지적재산권법에 있어서 부당이득금지의 원칙은 일종의 근본정신에 속한다. 이는 일반적으로는 저작물 창작에 전혀 기여한 바가 없는 자의 무단사용을 금지시키는 이론으로서 기능하는데, 이를 횡재로 표현함으로써 저작권자 보호를 위한 명분을 삼기도 한다. 무단사용자의 횡재는 큰 문제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창작자 입장에서도 횡재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앞에서 설명한 "A" 부분을 저작권자들이 다 가져가겠다는 것은 횡재일 수 있다. 이 점에서 기술발전의 혜택을 저작권자들이 다 가로채려 한다는 비판과 저작권자들이 기술발전을 저해한다는 주장은 일맥상통하는 것으로서, 동전의 앞뒷면에 해당한다. 기술발전이 가져다 준 인류의 행복을 왜 저작권자들이 다 가져가려 하느냐는 주장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대목이다. 여기에서 대두되는 것이 ‘적절한 몫의 배분’이다. 기술발전에 따른 공급의 증대로 인해 창출된 총효용(“A”)에 대한 대가 또는 부에는 저작자들의 몫도 있고, 기술발전을 도모한 공급자들의 몫도 있으며, 나아가 소비자들의 몫도 있다. “A”부분에 대한 ‘적절한 몫의 배분’은 앞서 말한 균형점 찾기와 같은 말인데, 이를 위해서는 경제 및 통계학적 접근이 필요하다. 둘째, “A” 부분에 대한 저작권자들의 독식을 막는 과정에서 지나치다 보면 저작권자들이 기존에 누려온 경제적 이익까지도 박탈하려는 경향이 있을 수 있다. 즉, 저작권법 또는 저작권법질서 자체를 부정하려는 경향이 그것이다. 공급 및 전달의 증대에 따른 이용자들의 저작물소비 기회의 증대는 과거보다 더 많은 저작권침해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점에서 저작권은 인터넷과 디지털을 매개로 하는 시장에서 더욱 보호의 필요성이 강해졌다고 할 수 있다. 보호의 정도("A" 부분의 적절한 배분)와 보호의 필요성을 혼동한 나머지 저작권자들을 대중의 공적(公敵)으로 생각한다거나 저작권질서를 낡은 질서로서 타파되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카피레프트(copyleft) 운동이 여기에 해당한다. 역사발전의 각 단계가 있듯이, 오늘날 서구의 지적재산권제도가 있기까지 그들 사회에서 거쳐 온 역사가 있다. 침해 방임과 보호의 시기를 번갈아 오면서 오늘날에 이른 저들의 역사를 우리는 다른 분야에서도 그렇듯 단기간내 급속한 성장을 통해 단축시켜 왔는데, 그 과정에서 인식은 그에 못 미치고 있다. 이와 같은 급속한 불균형성장이 때로는 성장의 전략이 될 수도 있으나, 근대화의 오류처럼 사회가치관의 혼란은 장기적으로 볼 때 바람직하지 않다. 지적재산권법, 법경제학, 법제사 등 분야의 학자 또는 실무연구가를 중심으로 우리의 지적재산권에 관한 깊이 있는 철학을 정립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난 해 동남아일대를 휩쓸어 버린 쓰나미는 그 연해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인도네시아 앞바다 해저 깊은데서 출발한 쓰나미가 동남아를 넘어 인도와 아프리카 해안까지 전달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엄청난 힘에서 비롯된다. 저작권법, 특허법 등 지적재산권법 분야의 거의 모든 이슈의 출발점은 지적재산권의 철학에서 비롯된다. 지적재산권 철학에 대한 깊은 연구 없이 유행만을 좇는 연구와 토론은 해표면의 파랑만을 보고 해저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도저한 흐름을 놓치는 것과 일반이다. 소리바다, 벅스뮤직과 같이 사회적으로 이목을 끄는 사건이 있을 때마다 TV 토론에서 양쪽으로 첨예하게 나뉜, 늘 같은 설전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연세대 법대 교수, hdn@leek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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