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2 |
오로라 공주 - 동의하는 것과 아닌 것들
관리자(2005-12-09 16:36:20)
유괴살해에 이은 잔혹 복수극 <오로라 공주>는 간결한 문체를 사용하는 작가와 같이 긴 수사를 남발하지 않는다. 에피소드마다 속도감이 있고 흐트러진 구성을 종합할 줄도 안다. 그러나 분명 여자감독이 찍었다는 냄새를 풍긴다. 잊을 만하면 지하 셋방에 불이 나서 어린 아이가 죽는 뉴스가 실리는 오늘, <오로라 공주>는 직장여성이 갖는 육아의 위험에 대한 섬세한 경고로 읽힌다. 동의한다. 탁아와 육아의 사회적 분담 아니, 구체적으로 공공의 재정지출을 늘려야 한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니다.
감독은 한 자락 더 깐다. 여기 못된 남자들이 있는데 그 신시티의 타자들이 바로 늬들이라고. 음, 동의하기 어렵다. 엄정화의 귀와 입은 순하지 않았기에 짠한 마음이 생겨나지도 않았고. 오뉴월에 서리를 내리게 하는 '어여쁜 순정씨'는 종신형을 선택하고 자신마저 살해하는 독한 여인. 외제차 딜러에다 몸으로 변호사를 유혹할 정도로 변신을 잘하는 여자지만 남편과 아이만큼은 제대로 안 된다. 살인에는 명쾌하나 지혜에 이르지 못한 이 불행한 여자의 남편과의 소통 부재까지 내 문제로 와 닿지는 않는다. 눈이 큰 순정씨는 나쁜 나라 운동본부에 나오는 비루한 군상들을 하나씩 처치하는데, 영화 초기의 살인동기는 매우 개별적이다.
먼저 여성. 강남 고급 백화점에서 벌어진 30대 팥쥐 엄마 살인 장면은 하나의 원형으로 자리잡은 <싸이코>의 목욕탕 살인사건을 연상시킨다. 화장실에서 산적꽂이로 계모를 작살(안 죽일 줄 알았다. 맥거핀 효과처럼 관객의 관심을 딴 데로 돌리는 장치로 보였는데)내는데, 이 정/도/로/ 죽인다? 나라면, 못 볼 것 보았다고 피했을 텐데. 생각해 보자. 오늘날 가정이 해체된다지만 또 결손가정이던 이들이 재혼으로 하여 계모와 계부로 새로운 가족들이 재구성되는 사례도 많은 시점에서 이 계모 살해 장면은 아쉬운 부분이다. 피부 관리실에서 코와 입에 석고팩을 들이부어 질식사한 계급적 하대에 익숙한 매우 싸가지 없는 여성도 그렇다. 글쎄, 그렇게까지. 정말 이런 인간들은 이태리 타올과 물파스(<지구를 지켜라>처럼)로도 정신차리게 할 수 있을 텐데……
다음, 죽일 놈들. 아무에게나 껄떡거리는 뱃속에 구렁이가 서너 마리 들어있는 청담동 웨딩홀 사장 살인 사건. 참 더러운 놈이네, 하고 피했을 텐데. 미사리 조정경기장에서 죽은 택시기사 이 친구도 인간에 대한 예의가 부족한 놈 정도 아닐까. 묻고 싶다. 이 불황에 여자라고 첫 손님을 거부하는 배부른 택시 기사가 과연 있는가, 라고. 갈비집 아들, 이 너저분한 놈은 주방용 가위에 거시기를 잘려 과다 출혈로 사망. 이 놈도 무절제와 야비를 두루 갖춘 짜잔한 이웃이지 꼭 제거해야 할 놈일까 하는 의문이 드는데, 내가 남자라서 그럴까? 웬만한 분노는 유효기간이 지나면 그것이 인생에 대한 세금이려니, 아Q처럼 견디며, 살아온 탓일까?
탄식과 경고, 신음과 부르짖음, 훈계로 가득 찬 엄정화의 입말을 듣다보면 우리 사는 세상이 성적 평등의 배려가 부족한 곳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그러나 살해동기와 살인에 대한 방은진의 예외를 두지 않는 확신범적 사유방식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 아수라 지옥의 풍속화는 살인이 갖는 비장미에 치중한 나머지 살인 전 그녀의 포즈에 집중해서 에피소드별 잔인함만 남는다. 이거 참! 왜 보다는 어떤 방법으로 죽이느냐에 초점을 두었다는 말이다. 살인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조건의 탐구나 새로운 인간관계의 인식에 대한 확장으로 가야하지 않겠나? 우리의 몸과 마음 속에 내면화 되어있는 이 사회의 일상적 폭력을 좀 더 잔잔히 들여다 볼 일이다. 백년 동안의 고독이 아닌 몇 년 동안의 고독 끝에 살인극을 그린 방은진에게 오래 전 읽었을 김수영의 자조적인 시 한 편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권한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중략)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정말 얼마큼 적으냐……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butgood@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