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2 |
애송 여록
관리자(2005-12-09 16:32:06)
내 마음을 울린 시
압천(鴨川)
압천 10리 벌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날이 날마다 님 보내기
목이 잦었다… 여울물 소리…
찬 모래알 쥐어짜는 찬 사람의 마음
쥐어짜라 바시어라 시언치도 않어라.
역구풀 우거진 보금자리
뜸부기 홀어멈 울음 울고,
제비 한 쌍 떴다.
비마저 춤을 추어.
수박 냄새 품어오는 저녁 물바람.
오량쥬 껍질 씹는 젊은 나그네의 시름.
압천 10리 벌에
해가 저물어… 저물어…
※ 위의 원시(原詩)를 여기 옮겨 적을 때, 사투리와 어투 이외는 한글 표기법에 따랐음을 밝힌다.
이것은 내 ‘문학청년’기에 만난 정지용의 작품이다. 8·15 광복 이듬해인가에 읽었던 기억인데, 나에게는 소월의 시보다도 더 끌리던 것이 사실이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거의 직후라서 무슨 모더니즘에는 내 서먹한 처지였지만, 이른바 신세대에 속하던 내 감각과 정서에 정지용의 시가 더없이 와닿은 것 같다.
이 시 <압천>에는 무엇보다 한스런 서정이 서려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압천은 일본 경도를 흐르는 시내이름이다. 그래서 제목이 일명 <경도압천(京都鴨川)>이기도 한데, 1927년 발표된 것이라 한다. 그는 경도의 동지사대학 수학 시절, 해질녘이면 시냇가에 나와 앉아, 망향의 설움을 달래곤 했으려니 싶다.
역구풀 우거진 보금자리
뜸부기 홀어멈 울음 울고, (제4연)
이 무렵에 그의 시 <향수(鄕愁)>도 발표되었고, 8·15 광복 이후에는 또 하나의 대표작인 <고향>과 함께 작곡되어 오늘날 노래로 불리어지게 되었지만, 그는 오랫동안 대한민국에서 이름조차 쉬쉬 지워져버려야 했다. ‘월북’문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정지용의 월북 문제에 대해서는 ‘자진(自進)’월북이다, 아니 ‘납북’이다로 한때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의 잠적이 ‘6·25’전이라면 자진 월북이라 하겠지만, 그것이 모호하다. 누군가의 말대로 한국전쟁 당시 곧 ‘6·25’때 자수하러 정치보위부에 나갔다가 납치된 것이라면, 자의반·타의반의 월북이라 함이 더 옳을 것 같다. 서울을 떠나지 않고 ‘자수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자진’일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광복 이후의 이남 문학 단체의 실상이다. 좌익 계열의 ‘문학가동맹’과 우익 계열인 ‘문학인협회’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정지용은 전자에 속해 있었다.
내가 지난 2001년 남북 공동 행사에 참가했을 때, 거기 북측 문인들과 술자리를 같이하게 되었는데도, 월북 문인들에 대해 알아보지 못한 것이 새삼 후회스럽다. 하기는 물어보아도 시원스런 응답을 듣기란 어려웠을는지 모른다. 젊은 문인들이었기에 더욱 그렇다.
어쨌든 정지용은 8·15 전 ‘시문학’의 동인으로서 이른바 ‘순수시’를 표방했던 것만큼, 이데올로기와는 거리가 먼 시 세계였다. 그래서 월북해서도 소시민적 성정(性情)을 탈피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더구나 국토가 갈라진 조국 건설의 그 혁명기에는 월북 문인 임화나 이태주처럼 오히려 껄끄러운 존재였을지도 모르지만, 이는 내 개인적인 추측일 뿐이다.
한가지 더 곁들여둘 것은, 정지용과의 내 만남이란 오직 그의 작품들만에 그치고 있다는 일이다. 얼굴 한번 본 적조차 없다. 모두에게도 말했듯이 내 문학청년 시절, 그의 한스런 서정에 끌려서 암송까지 하게 된 작품들 중의 하나가 이 <압천>이다.
압천 10리 벌에
해가 저물어… 저물어… (끝 연)
해질녘의 서정을 나에게 이것처럼 자근거려준 표현은 일찍이 없었다. 하지만, 한 시행의 명령형 시구, 그러니까 제3 연의 ‘쥐어짜라 바시어라 시언치로 않어라’만은 아무래도 거슬리는 과장이 아닐 수 없다.
최 형 | 전북 김제에서 태어났다. 동국대학 출신으로 교직에 종사하다가, 1984년 자원명예 퇴직했다. 이후에는 집필 생활을 하며, 사회운동단체에서 활동해오고 있다. 주요저서로는 장편 서사시 『푸른 겨울』, 『다시 푸른 겨울』과 서정 시집 『두 깃발』, 『강풀』, 『돌길의 풀꽃』, 『들길』외 다수이고, 소설집 『건널목 햇살』이 있으며, 수필·산문집으로는 『해와 강의 숲』, 『들바람 부는 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