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2 |
제7회 백석문학상 수상한 시인 정 양
관리자(2005-12-09 16:28:39)
“시인으로 태어나
백석(白石) 하나면 되었지”
글 | 김선경 문화저널 편집위원
시인이라는 호칭도, 교수님이라는 호칭도 나는 잘 못하겠다. 그냥 선생님으로 부르는 게 좋겠다. 예전부터 정양 선생님은 내게 ‘선생님’이었다. 문학회 모임이 있거나 수련회를 가거나 가끔씩 술자리를 같은 데서 나는 정양 선생님의 숨겨진 모습을 훔쳐보곤 했는데, 특유의 거칠고 묵직한 통성으로 내지르는 대중가요는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대중가요를 판소리처럼 내지르는데도 전혀 어색하지가 않고, 그것이 그렇게 매력적일 수가 없다. 내가 나이 들어 머리가 희끗희끗해지면 똑 저렇게 노래하고 싶다, 는 생각을 정양 선생님을 보며 자주 하곤 했다.
뿐만 아니다. 나는 몰래몰래 선생님께 빚진 게 많다. 선생님의 시나 산문에서 몇 구절을 훔쳐다가 내 글에 쓰기도 했고, 나의 ‘미니홈피’에는 선생님의 시집 제목에서 훔쳐다 쓴 폴더가 있기도 하며, 심지어는 선생님께 허락도 받지 않고 한 방송 프로그램에 선생님의 시를 대문짝만하게 올리기도 했다. 선생님이 아신다 한들 뭐라 하시겠는가마는,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연구실을 찾아가면서 괜시리 졸여지는 마음을 어쩌지 못했다.
백석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 참이었다. 워낙이 남들 앞에 드러내놓고 뭐라뭐라 떠드는 것 싫어하는 성정이시기에, 사실 뭐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선생님이 참말로 반가운(?) 말을 하는 것이었다.
“1968년도에 신춘문예로 데뷔를 했는데 당시에도 수상 소식 듣고 참 염치가 없더라. 당선 시에 백석의 시에서 그대로 따온 구절이 있었거든. 백석 시인의 시에 보면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는 구절이 있는데, 내 당선작품에도 거기에서 따온 ‘높고 가난하고 또 쓸쓸한’이라는 구절이 있었거든. 그 구절이 너무 좋아서 그대로 내 시에 쓴 것인데, 그 시가 당선됐다고 하니 괜히 염치없더라고.”
선생님도 나처럼, 백석의 시에서 좋은 구절을 몰래 빼다가 인용했다는 것이다.(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1960년대 무렵부터 일제시대 잡지 등에 실린 백석의 시를 찾아 읽었다는 선생님. 문학청년시절부터 가슴에 담아온 시인의 이름을 건 상을 받았으니 그 감회가 어찌 남다르지 않으랴. 선생님은 수상소감문에서 그 소회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끊을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 담배를 꺼내어 막 불을 붙이기 직전에 수상소식을 알려주는 전화를 받았다. 신춘문예 당선통보를 받던 38년 전과 어쩌면 이렇게 느낌이 비슷한지 어안이 벙벙한 중에도, 시방 내 나이가 몇인데 이렇게 어린애처럼 기분이 좋은가 싶어 스스로 계면쩍기도 했고, 나로서는 가늠하기 한참 어려운 백석 시의 높이를 되짚어 떠올리면서, 내가 평소에 다가가고 싶어하는 선후배 동료 시인들의 시를 떠올리면서 나는 또 자꾸만 얼굴이 달아올랐다. 소년시절의 되풀이되었던 가출처럼, 몇차례나 시쓰기를 그만두었다 말았다 했던 부끄러운 내 시의 길을 돌아보면서, 낯을 붉힌 채, 담배에 다시 불을 붙인다.”(『창작과 비평』 2005년 겨울호)
1942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한 정양 선생님. 그것으로는 성이 안 찼는지 77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으로 당선돼 주목을 받았다. 당시에는 떠오르는 문단의 신인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선생님은 그리 부지런히 시를 쓴 편은 아니다. 『까마귀떼』, 『수수깡을 씹으며』, 『빈집의 꿈』, 『살아있는 것들의 무게』, 『눈 내리는 마을』에 이어 이번에 수상한 시집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문학동네)를 펴낸 것이 전부다. 시력(詩歷) 40년을 바라보는데, 이만한 과작(寡作)도 드물 듯싶다.
“내가 10월 유신 때부터 글을 쓰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한 칠팔 년 동안 술만 퍼먹고 살았어. 그 뒤로도 그렇게 열심히 쓰질 않았지. 이번에 상을 준다는 얘길 듣고 퍼뜩 국민학교 4학년 때가 생각나더라고. 그때가 6·25 이듬해였는데, 시절이 시절인지라 도통 학교에 가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한 열 번도 넘게 결석을 했거든. 그런데 연말에 선생님이 개근상을 주는 거야. 그때 정말 염치없더라고.”
그럼 앞으로는 ‘농땡이 안 치고’ 시를 열심히 쓸 것이냐고 묻자, 선생님은 이렇게 답변하신다. “그래서 5학년 때는 진짜 개근했지. 선생님이 참 고맙더라고. 아마 내가 너무 액상(불쌍)해 보이니까 일부러 격려하기 위해서 개근상을 줬던 것 같아.”
어떤 시이길래 개근상을, 아니 우등상을 주었을까?
흐린 하늘 밑
들 건너 마을이 자꾸 멀어 보인다
눈에 묻힌 길은 아예 잃어버렸다
들판을 무작정 가로지른다
발목이 아무 데나 푹푹 빠진다
잃어버린 길 위에 까마귀떼
까마귀떼도 길을 잃었나보다
어디로 날아가지도 않고
눈밭에 우두커니들 서 있거나
느릿느릿 서성거린다
길이 보여도 길을
잃어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고
길이란 잃어버리려고 있는 거라고
구구구구 두런거리며 눈 덮인 들판을
조금씩 비켜주는 까마귀떼
들끓는 검은 피에 취하여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눈길을 여는 까마귀를 따라간다
또 눈이 오려는지
먼 마을 연기가 낮게 깔린다
-「눈길」 전문
58여 편의 시가 모여진 이번 시집은 고향 이야기를 담은 ‘마재 시편’들과 지금 현재의 일상을 담은 시편들로 채워져 있다.
“우리는 한 번은 미치고, 들끓어오른 피의 잔열로 나머지 삶을 견딘다고 말하는”(김병용의 발문 중에서) 선생님의 시편들은 들여다볼수록 아리고 슬픈 구석이 있다. 길에 대한 여러 가지 표현들이 많고 많지만,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는 표현처럼 슬픈 표현을 나는 지금까지 보지 못한 것 같다. 놓인 길조차 잃어버리고 싶은, 그 속 깊은 곳의 뜨거움과 불화를 아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1부의 시들은 “이제는 벌써 옛일이 되었다기보다 차라리 다른 나라 이야기가 되어버린 한 시대 전의 농촌풍물을 비애와 해학의 언어로, 다시 말해서 푸짐한 전라도 방언으로 엮고 풀어낸 시들”(백석문학상 심사평 중에서)도 있다. 읽다 보면 저절로 미소가 번지고, 만일 누가 옆에 있다면 같이 배꼽잡고 웃고 싶은 시들도 있다. 책 소개가 아니기에 시를 더 거론하기는 그렇지만, 「제삿날 며느리」같은 시는 꼭 누구에게 들려주고 싶은 시다.
더러는 예전에 썼던 시를 다시 손본 것들도 있다. 선생님은 “시는 공동의 작업이다.”라고 말한다. 예전에는 누가 시에 손을 대면 그렇게 기분이 나쁘고 그랬는데, 지금은 싫지가 않단다.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겠지, 싶다고.
“내가 쓴 시이니 죽기 전에 내가 고쳐야지 누가 내 시를 고쳐주겠어. 못난 놈들이 눈에 띄면 내가 고쳐야지. 한번 써서 발표한 시이니 손을 안 댄다는 의견에 나는 반대야. 내가 책임을 지는 것이 마땅하지. 내가 만든 것이니 내가 할 수 있을 때까지 A/S를 해줘야 될 것 아니냐고.”
A/S라는 말에 또 한번 푸하핫, 웃음이 터져 나온다. 선생님 안에는 항상 유쾌한 농담들이 숨어 있다. 근엄하기 짝이 없는 외모를 하고 그렇듯 유쾌한 농담을 뱉어낼 때면 그 언발란스함 때문에 유쾌함은 두 배가 된다.
출판기념회 자리에서 나눠준 시집 맨 앞 장에는 “지상의 도처에서 미제국주의를 몰아냅시다 - 정양 드림‘이라는 만년필 글씨가 씌어 있다. 시집을 나눠주면서 ‘미제국주의를 몰아내자’고 쓰는 사람은 아마도 우리나라에(제3세계에는 혹시 있을지 모르니) 정양 선생님밖에 없을 것이다. 선생님을 잘 모르는 사람은 아마 선생님이 꽤나 외골수 과격분자인 줄 알겠지만… (한참 생각해보다가) 실제로 선생님은 과격분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80년대는 자기의 안위나 일신의 영달은 뒤로 한 채 어떤 추상적인 열정에 다같이 매진했던 시기 같아. 그런 시절이 다시 올까 싶어. 도눅놈은 시끄러운 판이 좋다고… 나는 80년대가 좋았던 것 같아.”
우석대학교 운동권의 배후조종자로 알려졌고, 그것을 절대로(!) 부인한 적도 없는 정양 선생님. 지금도 선생님의 마음을 먹고 자란 제자들이 선생님의 양쪽 귀퉁이를 든든하게 떠받치고 있고, 선생님의 걸음걸음마다에는 시대를 담은 무게가 실려 있다.
“내 생각에 시인은, 일생에 시집을 두 세 권 정도만 내는 게 맞을 것 같아. 윤동주나 김소월은 단 한 권의 시집밖에 없지 않아? 요즘엔 이상하게 시집을 여러 권 내는 게 유행처럼 되어서 나도 벌써 여섯 번째 시집을 냈지만, 나는 시집 많이 내고 싶은 생각은 없어.”
그렇다면 앞으로는 상에 대한 욕심을 비웠다는 것인가? 상이라면 아직 많고도 많은데…
“누가 주면 별 수 없이 받아야겠지만, 내 생각대로 하자면 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시인으로 태어나서 백석 하나면 되었지.”
이미 제9회 모악문학상과 제1회 아름다운 작가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는 정양 선생님. 아름다운 작가상은 소속돼 있는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청년분과인 ‘젊은작가포럼’에서 준 상인데, 젊은 작가들이 “버릇없이 선배들을 골라서” 주는 상이다. 그러니까 후배들에게 인정을 받는 상인 셈인데, 상금도 없고 달랑 몽블랑 만년필 하나와 ‘아름다운 작가’라고 씌어진 상패가 전부. 그 상이 지금까지 받은 상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상이라고 한다.
물론 무게로 따지자면야 백석 만한 무게가 있겠는가? 모든 시인들이 부러워하는 상을 받고도 몹시도 부끄러웠다는 정양 선생님. 오죽하면 사르트르가 노벨상을 거부했던 마음을 알겠더라고 한다. 그때 사르트르가 선생님식 표현으로 하면 “내가 애긴 줄 아냐?”고 했다는데, 손자들 앞에서 상을 받자니, 상을 줘야 할 사람이 상을 받는 것 같아 계면쩍었다고.
근황 몇 마디 주고받은 것으로 공식적인 인터뷰는 서둘러 끝내고, 비공식적인 자리가 길게 이어졌다. 올해 함께 백석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안도현 시인, 이번 시집 발문을 써서 주목받은 김병용 소설가, 늘 따르는 후배인 송준호·정동철 교수 등과 함께 한 점심식사 자리. 아침을 늦게 먹었다며 굳이 당신은 식사를 주문하지 않은 채, 기어코 가장 비싼 꼬리곰탕으로 메뉴를 통일시킨다. 상금도 받았겠다, 후배들 몸보신용으로 쏘겠다는 것인데… 고추 양념을 더 넣어라 어째라 일일이 코치를 하면서 후배들 밥술 뜨는 양을 지켜보시는 걸 보고 송준호 교수가 한마디 거든다. “고향집 내려온 자식들 밥 멕이는 것같이, 보고만 있어도 그렇게 뿌듯하지요?” 말없이 웃기만 하는 정양 선생님. 선생님이 있어서 전북의 문단이 이렇게 따뜻하고 오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