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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 |
[자치단체의 문화와 전략 | 진안] 산간부의 역사적 격동과 투박성이 빚어낸 좌도풍물(左道風物)
관리자(2005-12-09 16:11:40)
진안은 호남의 동북부 산간부에 위치하여 ‘진안고원’으로 상징되는 특이 지형을 이루고 있다. 금강과 섬진강이 마이산을 중심으로 태극을 이루며 뻗어나가는 형세인 바 내륙이면서도 물길이 풍부한 곳이다. 역사적으로도 국난이 있을 때는 최후 보루의 역할을 하였고, 난을 피하거나 곤경에 처한 삶에 피난처를 제공하기도 했다. 또한 평야부의 여건도 갖추고 있어 농경생활의 전통이 독특하게 형성되고 산천의 호방함과 함께 역동적이면서도 투박한 기질이 생활풍습에 배여 이 곳만의 자생적 토착문화가 자연스레 틀을 갖추고 이어져왔으니 바로 ‘좌도풍물(左道風物)’이다. 진안을 비롯한 무주, 장수 등 무진장 지역을 중심으로 한 전라북도 동부산간지역과 섬진강 동편, 지리산 북동부권은 호남의 동쪽 즉 전라좌도라 일컫는 지역이다. 전북을 동서로 나누어 지금의 충남 금산과 무주, 장수, 진안, 전주, 임실, 남원, 순창을 좌도라 하고, 김제, 부안, 정읍, 고창, 군산, 옥구, 익산 지방이 우도에 속한다. 전남지방은 곡성, 구례, 순천, 광양, 여수, 화순, 고흥 등지가 좌도에 속한다. 동부에서 진안, 장수의 좌도풍물과 서부에서 김제, 정읍의 우도굿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쌍벽을 이루어 왔다. 호남굿 하면 좌도굿과 우도굿을 포함한 포괄적인 말이다. 그 중에서도 진안이 좌도굿으로 유명한 것은 진안이 좌도굿의 발상지답게 좌도굿의 명인들이 여러 곳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진안의 좌도굿은 해방 직후 전국적인 명성을 구가하였는데, 1946년 광복 1주년 기념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1등(대통령상)을 비롯하여 1948년 전라북도대회 우수상, 1947년 광복 2주년 기념 농악경연대회 1등상과 개인 연기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그 후 6·25동란으로 침체를 겪은 이래 사회적 격동과 산업화로 농경문화의 고유성 회복이 어려워지면서 오늘날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최근 좌도굿 무형문화재 7-5호로 지정된 바 있는 조병호(趙炳鎬) 선생이 작고하여 기능보유 명인이 상실되었다. 옛부터 전라도는 문화예술의 고장이요 풍류의 터전으로 곡창지대인 호남벌의 넉넉함이 멋과 맛의 운치를 자아내게 하였던 것이다. 우리 고유의 판소리도 여기서 비롯되었는데 전라도 서쪽 해안, 평야 지대를 중심으로 형성·발전된 것이 서편제(西便制) 가락이라고 한다면 호남 동부산간지역 및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산간지역에서는 이른바 동편제(東便制)가락으로 형성된 것처럼 진안을 중심으로 장수, 무주, 전주, 남원, 임실, 곡성, 구례, 금산 지역 등 호남 동부 산간지역에서는 좌도풍물이 형성되었다. 좌도풍물과 우도풍물의 차이는 좌도풍물이 전립(戰笠)을 쓰는 반면 우도풍물은 꽃으로 장식된 고깔을 쓴다. 가락에 있어서는 좌도풍물이 경쾌하고 힘찬 데 비하여 우도풍물은 우아하고 섬세하다. 좌도굿은 치고, 돌리고, 돌고, 밀고, 당기고, 춤추고, 노래하는 일곱 가지의 완벽한 기본을 경쾌한 리듬으로 좌도굿만이 지닌 남성적인 호방함을 맛볼 수 있고 우도굿은 섬세성과 아기자기한 놀음놀이가 여성적인 매력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좌도풍물은 상모놀이가 잘 발달되어 있어 가락과 동작이 어울려 굿판에서 민중과 더불어 놀이 분위기를 이끄는 압권이라 할 수 있다. 힘차고도 경쾌한 좌도굿의 진원지인 진안에서는 해마다 좌도굿 경연대회와 공연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어 한때 침체되었던 토착문화의 맥이 점차 되살아나고 있다. 풍물굿의 유래 풍물굿은 지난날 농경생활의 원동력이었다. 풍물굿 문화의 유래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한민족이 농사를 시작한 삼국시대 이전으로 추측되며 제천의식(祭天儀式)에 풍물놀이가 수반되었고, 고려시대에는 매우 성행하였다. 고려시대 문헌에는 풍물굿패들이 머리에 쓰고 돌리는 지금의 상모를 전립(戰笠)이라 했고 굿을 칠 때 입는 옷을 전복(戰服) 또는 치복(治服)이라 하여 풍물굿의 뿌리가 군악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풍물굿이 군악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는 그럴만한 뒷받침으로는 자그만치 1500년 전부터 사용된 상모에 달린 검정 덧끈을 훈련 끈에 ‘軍’자를 수로 새겨 사용해 왔던 것과 세발창(三枝槍)을 꽂은 영기(令旗)가 지휘체계를 의미하고 있고, 풍물굿(놀이)의 형태가 병영(兵營)에서 있을 진법(陳法)을 그대로 재현한 놀이로 이뤄지며, ‘호호굿’, '각진(角陳)굿', '오방진(五方陳)굿'이니 하는 것과 적을 감시하고 경계하는 ‘도둑잽이’며, 적과 일진일퇴(一進一退)하는 것과 같은 ‘미지기굿’과 같은 것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것은 모든 놀이 형태에서부터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와 같은 오행(五行)에 따라 조화된 쇠, 징, 장구, 북, 소구 그리고 일월(日月)과 같은 음양(陰陽)에 따라 짝이 되어 하나로 조화되고 가림새, 이음새, 끼음새, 맺음새와 같은 순서에 따라 이어지는 굿가락들의 오묘함은 하늘과 땅, 그리고 자연과 신과 인간이 화합하지 않고는 질서의식 속에서 신명의 마당은 불가능하리라 본다. 따라서 전 구성원이 하나가 되어 치고, 돌고, 돌리고 밀고 당기며, 춤추고 노래하는  풍물굿은 지역마다 풍속에 따라 약간씩은 다르다 하겠으나, 공통된 우리 민족의 대중예술로 자리 매김 되어 왔다. 좌도굿의 특성 쇠, 징은 소리꾼이고 장구, 북은 고수라고 한다면 소구는 무용수라고 풀이할 수 있다. 따라서 소리꾼과 고수, 그리고 무용수가 삼위일체가 되어 치고, 돌리고, 돌고, 밀고, 당기며, 춤추고, 노래하며 풀고 조이는 가락에 맞추어 판을 이루는 것을 ‘판굿’이라고 한다. 이 같은 좌도굿의 특성과는 달리 전통적으로 좌우도가 쌍벽을 이루어 왔던 것은 우도굿은 힘을 요구하는 좌도굿과는 달리 고깔을 쓴 승려의 차림새나 나긋나긋한 가락과 아기자기한 율동은 여성다운 반면 좌도굿은 가락이 경쾌하여 동작 또한 남성적이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좌도굿은 상쇠 가락의 조화에 따라가는 반면 우도굿은 쇠보다는 장구가락을 앞세운다. 우도가락은 느리게 조화해 가는 반면, 좌도굿은 느렸다 빨랐다 하는 고저장단(高低長短)과 강약의 조화가 특징이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도굿이 좌도굿보다 널리 보급되어 알려진 데에는 까닭이 있다. 좌도굿은 1960년대 초에 명인들이 기능을 남겨놓지 못한 채 기울어 간 반면 우도굿은 1960년대 중반기 각종 여성농악단이 창단되어 경향 각지를 돌며 흥행위주의 걸궁이 성하여 각 지방마다 우도굿이 보급되었다. 전형적인 고깔굿이 상모굿으로 바뀐 것도 여성농악단들에 의한 것이다. 아무튼 우도굿이 좌도굿과는 달리 전형적 고깔굿이라고 한다면 지금의 빠른 가락과 경쾌한 동작 또는 차림새에 이르기까지 특히 장구잽이들이 머리에 수건을 동이고 옆으로 비스듬히 꽃을 단 모습과는 달리 많은 개발과 발전을 다져온 모습이 역력하다. 그러나 지난 한 시대에서 세인으로부터 각광을 받으며 영호남 지방에서 중부 충청지방까지 좌도굿의 영향력을 끼쳤던 진안, 장수의 좌도굿이 한때 명성을 떨쳐온 것과는 달리 파란 많던 시대적 질곡에서 후진 양성은 엄두조차도 낼 수 없었고, 기왕  좌도굿을 접해온 남은 기능인들마저도 생활고에 시달려 생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좌도굿을 풍물굿의 원조라고 하는 그 근거로 아직도 부안, 고창 등지의 해안지방까지도 ‘질굿’과 ‘마치굿’, 그리고 좌도굿만이 지녀온 ‘영산가락’과 같은 가락의 맥이 흐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기세배놀이로 유명한 금마지역에서는 ‘잦은마치’, ‘이채질굿’과 같은 가락을 엿볼 수 있고 심지어는 ‘반다드래기’ 가락의 맥을 짚어볼 수 있다. 따라서, 좌도굿의 뿌리는 진안·장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난날 진안과 장수는 좌도굿의 아성(牙城)이라 할 만큼 명인들의 생활터전이 되어 왔다. 상모짓에서 ‘열두발 상모’하며 ‘좌반뒤집기’와 같은 묘기는 가히 환상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고도의 기예(技藝)와 연희(演戱)는 좌도굿만의 유일한 종합예술적 가치라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한재철 | 진안문화원과 진안문화계 회원, 마이산 닷컴 관리자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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