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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 |
[자치단체의 문화와 전략 | 진안] “한 집에 정승, 판서가 다 있다”
관리자(2005-12-09 16:07:23)
글 | 최규영 진안문화원장 진안은 전라도에서도 변경에 속한다. 예전에는 백제 땅으로 신라와의 접경이었다. 이후로도 산이 많고 경지가 적어 주민들은 고단한 삶을 이어갔기 때문에 들녘의 다른 고장들처럼 풍요로운 문화를 구가할 겨를이 없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내세울만한 문화유산은 적은 편이다. 그런 가운데도 진안지방에는 특이한 문화유산이 맥을 이어왔으니 바로 전라좌도농악으로 일컬어지는 전라좌도풍물굿이다. 근자에 들어 <김덕수사물놀이패>의 성공에 힘입어 많은 사물놀이패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사물놀이라 함은 종래 풍물굿에서의 ‘소고’를 뺀 꽹과리, 장구, 징, 북의 네 가지를 가지고 실내악에 맞도록 구성한 4인조 악단을 말한다. 이것은 1978년에 <김덕수사물놀이패>가 그 효시였고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장르이다. 이 사물놀이가 망외의 큰 호응을 얻게 되어 이제는 우리의 전통 풍물굿보다도 더욱 대중 속에 파고들어 자리잡게 되었다. 이는 침체된 우리의 전통예술에 활력을 불어넣은 커다란 사건이다. 하지만 다른 일면 우리의 전통풍물굿이 명맥을 잇지 못하고 쇠잔해 버리고 변형된 사물놀이가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우리의 문화적 전통을 부정하는 것만 같아 우려의 시각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 풍물굿은 지방에 따라 치배(풍물굿구성원)의 수나 복색, 가락 등에 있어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중 대표적인 경우로 <웃다리풍물>과 <아랫다리풍물>로 나눌 수 있다. 웃다리풍물은 경기, 충청지방의 풍물을 일컫는 말이고 아랫다리풍물은 영남과 호남지방의 풍물을 가리킨다. 이 가운데 호남지방의 풍물은 다시 <전라좌도풍물>과 <전라우도풍물>로 구별된다. 전라좌도란 전라도 동부지방, 즉 금산, 진안, 무주, 전주, 남원, 임실, 순창, 곡성, 구례 등의 지역을 말하고 전라우도는 서부지역의 평야지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전라좌도풍물과 우도풍물의 차이점으로는 복식에 있어 좌도풍물이 전립을 쓰는데 우도는 꽃으로 장식한 고깔을 쓴다. 가락은 우도풍물이 우아하고 섬세한데 비해 좌도풍물은 경쾌하고 힘차다. 특히 좌도풍물은 상모놀이가 잘 발달되어 있어 가락과 동작이 잘 어울려 굿판에서 관중과 더불어 놀이 분위기를 잡는 데 압권이라 할만하다. 한때는 진안이 좌도풍물의 총본산 역할을 한 적도 있었다. 1946년 서울에서 열린 광복1주년기념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한귀동 상쇠가 이끄는 진안 팀이 당당히 1등을 차지한 것이다. 이어 다음해에도 이들이 1등을 차지함으로써 진안풍물(좌도풍물)의 기량과 위상을 만천하에 뽐내게 되었다. 이처럼 좌도풍물이 진안에서 만개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당시 한귀동, 장두만, 김달마, 최승표, 김수동, 최상근, 유경학, 조남주, 전왕권 등 좌도가락의 고수들이 우연찮게도 진안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들은 단순히 진안지방에서만 손을 맞추던 동네굿패들은 아니었다. 이들은 난장판 등에서 포장을 치고 돈을 받고 관객을 입장시키는 <뜬쇠>라고 하는 일종의 ‘프로’들이었으니 이들이 주축이 된 진안 팀이 연2회 전국대회를 제패한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풍물굿에는 농사의 흥을 돋우기 위한 두레굿, 주로 명절 등에 지신밟기를 하는 동네굿, 특정한 목적을 위한 경비를 걷기 위한 걸립굿 등이 있었다. 이런 풍물굿의 경비는 터를 울려주는 대가로 집집마다에서 약간의 곡식 등을 부담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이미 풍물가락이 고도의 경지에 이른 고수들은 제 신명을 이기지 못하여 동네굿 정도에 만족하지 못하고 제가락을 뽐내기 위하여 각지로 떠돌며 재주를 펼치게 된다. 그래서 장막을 치고 요금을 받고 관객을 입장시키는 <포장걸립>이라는 흥행방법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풍물굿만으로 관객을 모으는데는 한계가 있어 당시 이미 쇠퇴기에 들어선 남사당패의 남은 무리와 자연스럽게 제휴가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즉, 풍물은 풍물패가 담당하고 줄타기, 접시돌리기 등 다른 재주들은 남사당패가 부리고 수입금을 나누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 남사당패와 제휴(또는 연합)한 풍물패에게도 자연히 뜬쇠라는 명칭이 붙여지게 된 것이다. 이처럼 ‘프로’화된 풍물굿은 당연하게도 관객을 의식해 놀이방법이 더욱 재미있게 꾸며지고 기교는 더욱 발전해 갔다. 더구나 좌도풍물굿은 보여주는 놀이로는 제격이었다. 우도풍물이나 웃다리풍물은 본시 상모놀음이 없거나 발달치 못하였으나 좌도풍물은 상모놀음이 곡예로 발달되어 이 점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화려했던 진안좌도풍물은 그 뒤를 잇지 못하고 만다. 6·25를 거치면서 명인들은 죽거나 흩어지고, 전쟁 후에도 사람들은 살기에 바빠 제 앞가림하느라 풍물굿 같은 것은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다. 더군다나 광복 후 우리의 전통문화는 천시하고 외래문화를 숭상하는 풍조 속에 풍물굿이 존재할 여지마저 잃어갔으므로 따라서 진안풍물굿의 화려한 전통도 기억에서조차 희미해 갔다. 이런 가운데서도 진안좌도풍물의 제 가락을 지켜온 분이 있었으니 이 분이 김봉열(1995년 82세로 별세) 상쇠이다. 이 분은 앞서의 ‘프로’들에는 참가한 적이 없었지만 오로지 스승들로부터 전수받은 가락을 농사일 등 생업에 종사하는 틈틈이 인근 치배들과 손을 맞추면서 전통의 가락을 온전히 보존해 왔다. 또 한 분 조병호(2003년 71세로 별세) 상쇠라는 좌도가락 보유자가 있었다. 그러나 조씨가 보유하고 있는 가락은 김봉열씨의 가락과는 큰 차이가 있다. 또 가락도 김씨가 두렁쇠인데 비하여 조씨는 <뜬쇠>이다.  조씨는 어려서 뜬쇠생활을 하던 부친을 따라 포장걸립을 하면서 전국을 떠돌던 때의 경험을 간직하고 있다. 그 경험은 씨로 하여금 다양한 가락과 몸짓으로 관객을 휘어잡는 연출솜씨를 길러주었다. 김봉열씨는 그 맥을 <전라좌도 진안중평굿>이라 하여 전수자들이 가락을 지켜오고 있고, 조병호씨는 <전라좌도 뜬쇠굿>이라 하여 전수자들이 가락을 지켜오고 있다. 김봉열씨의 가락은 제대로 보존된 좌도풍물의 전통가락이며, 조병호씨의 가락은 좌도가락에 바탕하여 응용된 가락과 연희(演戱) 솜씨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처럼 진안지방에는 “한 집에 정승, 판서가 다 있다”는 말처럼 풍물에 있어서는 빛나는 전통과 다양한 갈래가 이어져 왔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말이 김덕수 사물놀이패의 성공으로 대두된 것처럼 진안의 풍물굿도 과거의 전통을 복원하여 육성한다면 찬란한 예술로 승화될 것이며 값진 문화자산이 될 것이다. 풍물 같은 예술적 재능은 어려서부터 교육을 해야 제대로 꽃피울 수 있는 것이므로 지방자치단체와 교육당국이 적극적으로 육성책을 강구해야 될 일이다. 이런 일들을 하자면 열악한 지방재정형편으로는 힘겨울 수도 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는 영국인의 말처럼 문화와 예술은 물질적 가치와 비교되지 않는 참된 가치가 있는 법이다. 전라좌도 풍물굿이 진안에서 되새김질되어 살아날 때 진안은 전통문화의 메카로서 자랑스러운 예술의 고장이 될 것이다. 최규영 | 진안향토사연구소 소장과 진안향토문화원 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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