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05.11 |
낯익은 풍경 속으로
관리자(2005-11-12 15:06:04)
글 | 이재규  (6.15 남측준비위원회 부대변인) 광장의 열기, 혁명의 나라 2005년 6월 14일. 평양공항에 남측 비행기가 내리자 북측 취주악단은 경쾌한 연주를 시작했다. 빰빠-바밤 빰빠바바밤. 빠른 템포의 행진곡으로 듣는 이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는 연주는 평양에 머무는 내내 귓가를 맴돌았다. 뭔가 격동하게 하고, 높은 톤으로 일으켜 세우는 그런 느낌. 첫 날 저물 녘. 이 고양된 느낌은 최고조에 달했다. 예정 시각보다 40여분 늦게 대행진이 시작되면서 오락가락하던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다. 막 어둑어둑해지는 평양 시가를 우비를 걸치고 걷기 시작한다. 차량에 깃발을 세우고 남북해외 각 1인이 탑승해 대열을 선도했다. 그 뒤를 이어 여성만으로 구성된 북측 취주악단 두 무리가 대열을 열고 나간다. 한쪽은 한반도 지도가 새겨진 흰 색 상의를, 다른 조는 고구려병사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붉은 색 제복을 입고 나왔다. 북과 나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 가운데 행진구간인 천리마동상-김일성경기장 인도 변은 물론 언덕에까지 꽉 들어찬 환영인파에 먼저 압도되었다. 한 5만 명 나온 것 같다고 북측 안내원이 일러준다. <우리민족끼리><조국통일>을 외치며 북측 인민들은 곳곳에서 춤과 노래, 연주를 하며 꽃술을 흔들어댄다. 북을 두드리며 대표단을 환영하는 붉은 스카프의 소년단원들, 갖가지 색깔의 한복을 입은 여성들. 조용하던 그 거리에서 이 많은 사람이 언제 모였지? 생각이 채 머물기도 전에 심장이 먼저 빠르게 응답하기 시작한다. 화면으로만 보던 그 ‘광장의 열기’ 한 복판에 실제로 서게 되자, 애써 냉정함을 유지하려던 나도 이내 그 군중의 하나로 전염되고 말았다. 몇 분이 흘렀지? 시간 감각을 잃어버린 채 걷고 뛰고 하다 보니 멀리 휘황한 불빛을 받으며 서있는 개선문이 보인다. 바로 옆이 김일성경기장. 행진의 끝이다. 1945년 평양군중대회에서 최초로 인민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김일성이 연설했던 바로 그 자리에 세워진 김일성경기장에 들어서자 ‘와’하는 함성소리가 더욱 높게 울렸다. 경기장 안에 기다리고 있던 또 다른 평양군중 5만 명이 내지르는 소리였다. 안과 밖 10만 명 사람의 물결, 함성, 북과 나팔소리, 형형색색의 깃발과 옷이 빚어내는 정치적 열기, 상상을 초월하는 그 정치드라마를 앞에 두고 나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반갑습니다. 혁명의 나라 조선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평양의 첫 인상은 그렇게 시작됐다. 잿더미 위에 선 도시 첫 평양 방문에서는 이곳저곳 바쁘게 고개를 돌리느라고 3박 4일이 훌쩍 지나버렸다. 텔레비전과 화보에서 마주쳤던 건물의 실제를 대하고 그저 퍼즐처럼 맞추어 보다가 시간이 지나버린 것이었다. 한 달 뒤, 다시 평양을 둘러보면서는 좀 여유가 생겨났다. 평양은 폭격으로 완전 초토화된 뒤 잿더미 위에 올라선 도시답게 계획도시의 면모가 뚜렷했다. 숙소였던 고려호텔 27층 객실 창에서 내려다보니 대동강을 경계선으로 왼편에 인민대학습당과 오른쪽 끝에 주체탑이 보인다. 오른쪽으로 몸을 더 돌리면 평양역과 대극장이 눈에 들어오고 거기서 왼쪽으로 꺾어 직진하다 보면 김일성광장, 조선노동당사, 학생소년궁전, 평양제1백화점, 조금 높은 지대에 만수대기념비, 천리마동상, 김일성경기장이 이어진다. 곳곳이 녹지이고 건물의 색채가 현란하지 않아서인지 차분하게 가라앉은 느낌이다. 무엇보다 자본주의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지러운 간판이 상점 몇 곳을 제외하고는 눈에 띄지 않아서 처음에는 좀 생경했지만 이내 시야가 말끔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살림집(아파트)들은 20여 층 고층이지만 지은 지 20년-30년 된 것들이고 또 최근에 도색을 하지 못해서 낡았다는 느낌을 주었다. 사람들의 옷차림이며 경전버스, 전철도 드물고 또 낡아서 전체적으로 70년대 시대극의 한 장면으로 빨려 들어간 기분이다. 단색조의 옷차림들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사람들은 어디론가 바삐 걸어간다. 그 모든 풍광들을 내가 지금 바로 곁에서 보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인민문화궁전, 만경대학생소년궁전, 4.25문화회관, 봉화예술극장, 청년중앙회관 등 다중시설은 이삼십 년 전에 지었음에도 화려한 대리석과 석재들로 장중한 느낌을 주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만경대 김일성 주석 생가는 의외로 소박했다. 평양방문의 필수 코스인 주체탑, 개선문 등의 기념건축물들까지 보고나면 평양이 하나의 거대한 혁명전시관, 이념의 성채임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광장과 가로, 살림집과 공공시설들이 질서 있게 정돈되어 있는 그곳에서도 누군가를 기다리고, 헤어지고, 울고 웃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냄새는 똑 같을 것이었다. 문득 버스에서 내려 저 군중들 속의 한 사람으로,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거리를 활보하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인민이 알기 쉽게, 더욱 통속적으로” 북에서 몇 차례의 공연을 봤다. 연회가 주로 열리는 인민문화궁전에서는 만수대예술단, 학생소년궁전은 어린 나이의 예술소조, 향산호텔에서는 국립민족예술단 공연이 있었다. 그중 청년중앙회관에서 본 <춘향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가극은 이북이 자랑하는 대표 장르이기도 하거니와 우리에게 익숙한 춘향전이어서 각별한 기대를 가지고 보았다. 민족가극 춘향전은 한마디로 ‘걸작’이었다.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직접 현장에서 목격한 화려한 무대전환, 배우들의 무르익은 연기와 노래, 군중 장면, 새로운 춘향 해석이 좋았다. 판소리나 창극 또는 영화로 마주쳤던 남측의 춘향이 주로 남녀간의 애정을 단선적으로 그려가며 해학과 풍자에 중심을 둔다면 북의 춘향전은 춘향을 둘러싼 현실에 대한 정치사상적 이해를 중심으로 리얼리즘으로 승부한다. 북의 문예이론인 ‘종자론’에 비추어보면 춘향이 몽룡과 인연을 맺었다가 천출이라는 이유로 몽룡의 한양행에 동행하지 못하는 신세를 한탄하는 것으로 끝나는 1막의 종자는 ‘아 빈부귀천이 원쑤로다’ 이다. 춘향이 절개를 지켜내며 고생한 끝에 행복한 결말을 맺는 2막은 ‘고생 끝에 낙이 왔네’가 종자다. 남측의 공연에서 그저 가볍게만 묘사되는 춘향모 월매는 조선양반사회의 한계를 분명히 깨닫는 상당한 기품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된다. 굵은 선의 전개, 대사의 품격도 좋았고 특히 남녀 주인공의 아리아가 굉장히 아름다워서 공연이 끝나고 오래 서서 박수를 쳤다. 새롭게 발견한 것도 있었다. 그동안 탈춤은 북측에서 별로 평가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는데, 농민들이 양반을 조롱하며 신세를 한탄하는 대목에 탈춤이 등장해서 한바탕 놀아 제끼는 장면을 보았던 것이다. 이런 나와는 달리 남측 관람객 중에서는 북의 무대예술에 대해, 너무 상투적이고 단조로운 톤이라고 낮춰 평가하는 사람도 적진 않았다. 북쪽의 큰 건물 안과 외벽에는 어김없이 김주석과 김위원장을 그린 대형그림들이 걸려 있다. 대개는 지도자가 인민대중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장면을 극사실주의로 그린 것들이다. 식당들에는 모두 대형풍경화가 걸려있는데 그것도 충실한 사실주의 기법을 따랐다. 북측의 미술정책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만수대창작사>를 둘러봤을 때에도 같은 느낌이었지만 북의 예술은 복잡하지 않고 단순 명쾌하다. 인민들이 보거나 들었을 때 쉽게 이해하고 직접적인 감흥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통속성’의 원리가 관철된다. 밝고 높고 빠르다. 늘여 빼기 보다는 휘몰아치는 편이고 모호하지 않고 쉽다. 통속적이어서 대중에게 직접 호소한다. 인민대중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지향과 목표를 제시하고, 공공을 위하여 헌신하는 모범을 세워 그를 따라 배우게 하는 대중노선은 북쪽 모든 영역의 조직원리이고 이것이 예술에도 의연히 관철되는 것이다. 맑스레닌주의의 정치한 이론서에 견주어보면 김일성 주석의 글은 너무 싱겁게 쉽게 읽힌다고 한다. 김주석의 문풍(文風)은 그가 제창한 대중노선에 정확히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 교시에 따라 모든 노래는 경건하며 높고 장중하게 인민의 바른 생활을 묘사한다. 모든 문학은 매시기 당의 노선에 따라 인민내부의 비적대적 갈등을 올바르게 해소하며 통일단결시키는 데 복무한다. TV, 라디오, 영화, 가극 모든 문화예술영역에서 경건함은 차고 넘친다. 그런데 남측사람들에게 이렇게 날마다 ‘바른생활’ 을 강조한다면 어떨까? 어떤 대의명분이 뒤따른다 해도 그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탈주하는 사람들이 상당수일 것이다. 1970년대는 한때 비슷한 방식으로 통제되기도 했지만 수십 년의 시간 동안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조직되어 온 남북 양 사회. 그것이 가져온 감수성의 차이도 상당한 간극이 느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어쩔 수 없는 차이를 뼈아프게 인정하면서도 북이 오랫동안 고집스레 지켜온 것들 중에서 우리가 흔쾌하게 인정할 부분은 인정하자는 생각이다. 예를 들면 학생소년궁전 미술실에서 데생을 하는 학생들의 석고 모델은 다 조선 인물들이었다. 이름도 어려운 ‘아그리파’만을 옮겨 그리며 서양인의 형상으로 미술을 시작해온 우리들에 비해 북이 훨씬 민족적 감수성을 지켜온 것이지 않은가. ‘노크’보다는 ‘손기척’이라는 우리말이, 원양어업 보다는 ‘먼바다 고기잡이’가 훨씬 생동감 있지 않은가. 그런데 저 흉측한 80년대에는 이런 독백을 누설하는 것만으로도 캄캄한 지하실에 끌려가 자생간첩으로 엮어지는 고문을 자처하는 길이 되었다. 우린 얼마나 이상한 야만의 시절을 보냈던 것인가.   평양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관람하는 일정이 만경대학생소년궁전 극장에서 어린 학생들의 공연일 것이다. 본 사람 누구나 절로 아하, 탄성을 내지를 만큼 아이들의 공연 그 자체는  ‘아름답고 눈부실’ 정도의 수준 높은 것이다. 성년 가수 못지않는 음량으로 목을 꺾으며 부드럽게 넘어가는 노래들이며 패랭이춤, 재주넘기, 드럼과 개량가야금 공연을 보노라면 ‘징그럽게’ 잘한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 아이들은 지나치게 잘하고 넘치게 성숙했다. 그런데 그 공연장의 상당수 남측 관람객들은 공연시간 동안 어딘지 모를 생경함과 불편함에 몇 번이고 자세를 고쳐 앉는 사람이 적지 않다. 북측 아이들의 한결같은 웃음과 절제된 완벽한 동작에서 ‘집단주의’의 그늘을 우선 보는 것이다. 북측 예술의 전혀 다른 색채와 음색, 템포, 표정이 아이들의 똑같은 웃음과 겹치면서 그런 이질감을 강하게 느끼는 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이들만 그런 ‘똑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무대에 올라온 북측의 예술인들은 한결 같이 높고 밝은 톤으로 노래를 불렀고, 아이들처럼 똑같이 미소 지었다. 그런데 60년대까지 우리 남쪽의 노래도 그렇게 높고 고운 음색으로 부른 노래들이 많았지 않았던가. 지금 다시 그 시절의 방송 테잎을 틀어보면 어조며 복장이 한결같이 ‘유치찬란’하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누가 더 많이 변한 것일까. 우리 민족적 감수성의 원형은 어떤 것이었는지, 또 이북과 이남의 문화적 차이가 각기 다른 체제와 결합되면서 어떤 식으로 분리, 가속화되었는지 이런 저런 생각들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평양에 머무는 내내 머리 속이 복잡했다. 수령과 지도자의 광장 두 번째 방문에서 묘향산 국제친선전람관을 볼 수 있었다. 묘향산 입구 쪽에 위치한 전람관은 김주석과 김정일 위원장 선물관 두 곳으로 나뉜다. 각 전람관마다 50여개의 방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각각 10여개의 방을 둘러보았다. 위병이 지켜 서 있는 전람관 출입구 문은 동문인데 한 짝에 4.5톤이나 나간다고 한다. 문짝의 부조는 김정일, 김일성화다. 덧신을 신고 가만가만 걸어서 전시물들을 살펴보는데 항습항온장치 때문인지 한여름인데도 서늘했다. 건물은 거의 대부분 대리석인데 평산온천 쪽의 돌이라고 한다. 길고 복잡한 회랑을 따라 걸어가니 김위원장이 다른 나라 외교관을 접견하는 장면을 담은 조선화가 보인다. 문을 열고 들어간 첫 번째 방에 김위원장의 대형 좌대전신상이 있다. 링컨기념관의 링컨좌상이 떠올랐다. 해설원은 세계 163개국 53,419점의 선물이 있다고 한다. 사진 촬영이 엄격히 금지되어 화려한 명품들을 눈으로 새겨 둘 수밖에 없었다. 38kg짜리 사하라 천연 돌꽃, 리비아의 가다피가 보낸 장검은 금은세공이 뛰어났다. 아랍권은 대체로 멋진 보검들을 선물로 보낸 경우가 많다. 갖가지 보석이 박힌 작은 손칼에서부터 장검까지 다양한 디자인의 칼은 각별한 느낌을 주었다. 전두환 시절 한국을 방문하여 여러 가지 후일담을 남긴 봉고 대통령이 86년에 보낸 수정, 러시아 푸친의 사냥총, 리후락이 1972년에 선물한 라전공예 서류함,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에 이어 김대중 대통령의 ‘실사구시’ 글자가 새겨진 접시 등은 눈에 띄는데 김영삼 대통령 것만 없었다. 전두환은 1983년에 라전화장품도구함을 보낸 데 이어 1986년에 청자기 꽃병, 은칠보 차그릇 등을 보냈다. 그 시점에 한참 몰아쳤던 공안정국을 떠올리자니 참 씁쓸했다. 남의 일부사회단체와 언론사에서 보냈다는 선물은 통상 주고받는 선물을 가져다 놓는 것이다. 그 선물들을 보고 있는 중에 확 눈에 들어오는 물건이 1998년 동아일보사에서 보낸 금박동판이었다. 1937년 보천보 전투소식이 실렸다. 이게 왜 있지? 슬쩍 다른 글을 옮겨 와 보자. 대중은 독립운동 진영의 거듭된 패배와 일제의 기세에 눌려 패배주의에 빠져 있었다. 이때 김일성은 보천보 진공작전을 통해 “조선은 죽지 않았다, 조선은 살아 있다!”고 외치고 싶었던 것이다. 김일성이 이 전투를 통해 얻으려 했던 것은 몇몇 일본군을 잡는 것이나 국경지대의 작은 도시를 점령하는 것이 아니었다. 김일성이 원했던 것은 패배주의에 빠진 대중에게 독립의 희망을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순수하게 군사적인 면에서 본다면 내세울 만한 전과를 거두지 못한 보천보전투를 이북의 역사가들은 물론 일본제국주의자들이 큰 충격으로 받아들인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사실 전과의 면에서 본다면 김일성 부대가 추격해온 일본 경찰대를 궤멸시킨 구시산전투나 일본군 74연대에 대승을 거둔 6월30일의 간삼봉전투가 훨씬 더 큰 전과를 거둔 전투였다. 그렇지만 정치적 의미에서 보천보전투는 유격대의 총알이 미치지 못하는 곳까지 유격대의 존재를 알린 대사건이었다. 우리의 역사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기, 독립군의 활동이 희미한 옛 기억으로 사라져가던 시기에 홀연히 나타난 김일성 부대의 총성은 그 뒤 반세기가 넘게 우리 역사에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김일성의 등장을 알리는 사건이기도 했다. 보천보전투를 통해 김일성이 전국적인 인물로 떠오르는 데는 언론, 특히 <동아일보>의 공이 컸다. 1936년 여름의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는 폐간되고, <동아일보>는 무기정간을 받았는데, <동아일보>는 보천보전투 사흘 전인 1937년 6월1일치로 복간되었다. 일제의 탄압으로 무기정간을 당했다 풀려난 <동아일보>는 보천보전투가 일어나자 신이 나서 두 차례나 호외를 발행해가며 연일 대서특필한 것이다. 물론 보도에 사용한 언어는 “공비들의 살인, 방화, 약탈”이었지만.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독립운동을 폄하한 당시 신문들의 친일적 보도태도라고 비판하는데, 필자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지하신문이 아닌 이상 합법적으로 발행되는 신문으로서의 한계는 인정해야 한다. 더구나 우리 민중은 아무리 합법신문들이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재주가 있지 않았던가? 1998년 10월 김병관 당시 사장 등 동아일보 방북취재단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선물로 준 것은 바로 보천보전투의 기사를 보도한 <동아일보> 호외를 황금으로 만든 것이었다. 이 황금 호외 선물은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난 8월 만경대 파문 당시 ‘오마이뉴스’가 특종 보도하여 네티즌 사이에 큰 화제가 되었다. 이 황금 호외 선물은 <동아일보>쪽이 김일성의 명성이 널리 퍼지게 된 데 자신들의 기여가 컸음을 이북의 지도부에 과시하려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한홍구의 역사 이야기 2001>중에서 김일성 주석의 해방 이후 행적과 한국전쟁에 대한 평가, 현재의 북한체제에 대한 평가는 일단 접어놔 보자. 우리 어렸을 적에 그 수많은 반공웅변대회의 단골주제는 ‘가짜 김일성’ ‘마적두목 김일성’이었다. 진짜 독립운동을 했던 ‘김일성장군을 사칭한 김성주란 사람이 당시 북한의 수괴’라는 등식에 한 점 의심도 하지 않았던 그 때의 어린 학생들에게 이름 높은 역사학자들은 어떤 A/S를 해줄 것인가. 김일성과 북한체제를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기조에 서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동아일보는 왜 이런 금판을 보낸 것일까. 누군가 일부러 흐트러놓은 역사의 미로에서 우린 아직도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김일성 주석의 전람관은 1978년에 문을 열었다고 한다. 알제리에서 보낸 사하라 모래장미, 수단민족회의에서 보낸 상아로 만든 코끼리행렬 등도 진기했지만 무엇보다 눈길을 끈 것은 역사적 가치가 높은 소장품들이었다. 스탈린이 1950년 10월 26일, 한국전쟁 중에 보낸 승용차 ‘지스’, 말렌꼬프가 보낸 ‘짐’, 역도산이 1962년에 선물한 ‘벤즈’를 실물로 대하니 시간이 급격하게 거꾸로 요동치며 주변이 흑백으로 변한다. 1945년 해방직후 스탈린이 선물했다는 전망차(열차)는 열차 두세 량이 그대로 옮겨와 있다. 전람관 안에서 어떻게 이것을 조립 했나 싶을 정도로 객차는 크고 길었다. 방탄철갑 안에 화려한 유럽식 객차를 집어넣은 이 전망차를 보고 있자니 한 쪽 귀에서 전쟁과 혁명을 달려가는 숨 가쁜 기적(汽笛)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해설원이 안내한 마지막 방은 ‘장백산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으로 이어지는 김일성 찬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양팔을 벌리고서 김주석 랍상이 서 있었다. 방의 한 쪽에서 인공 바람이 불어와서 랍상 주변의 장식품이 흔들리게 장치를 만들어 사실감을 극대화하고 있었다. 랍상을 올려다보던 북측의 젊은 여성 해설원은 그저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오래 흐느꼈다. 그 울음이 너무 깊어서 우리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다른 곳을 응시하며 몇 분간을 침묵했다. <태양의 역사는 영원히 흐른다>는 구호를 뒤로 한 채 전람관을 나서는 남쪽 사람들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북의 어느 곳을 가더라도 마주치는 구호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단순한 정치구호가 아니었다. 지난 60년의 세월동안 북쪽 인민들 생활의 중심을 관철해온 원리가 거기에 있었다. 북에는 정치와 경제, 사상과 일상이 따로 분리되지 않고 김주석의 존재를 중심 고리로 단단하게 구조화되어 있었다. 남쪽의 삶에서 익숙한 잣대를 가지고 북쪽 인민들의 정서를 간파하고 그 이면을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들 중의 누군가 북쪽 어느 인민 가정을 불시에 방문하고 시장과 농촌을 아무리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하더라도 결국은 똑같은 출구, 수령과 지도자의 광장으로 나와야 했을 것이다. 어느 곳을 가더라도 광장의 열기로 가득한 사회, 혁명의 나라에서, 나는 남북 모두가 아직도 매듭지지 못한 앞 세대의 유산을 등에 짊어지고 힘겹게 걷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 백두산의 풍경과 남북의 작가들을 지켜본 방북기 (하)편이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 이재규 | 6.15남측준비위원회 부대변인. 6.15공동선언발표 5돌기념 민족통일대축전(2005.6.14-6.17)과 개성 실무접촉(7.12-7.13), 민족작가대회 (7.20-7.25)를 다녀왔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