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5 | [사람과사람]
닮은 꼴이라는 재즈와 우리 소리
정정렬제 춘향가 채보 작업한 재즈 연주가 이형노씨
황경신 문화저널 기자(2003-04-07 15:31:16)
몇 달 몇 년을 배우고도 조금만 쉬어버리면 금새 잊혀지고, 선창을 하는 선생이 없고서는 '독학'으로는 배워내기가 힘든 우리의 소리. 그래서인지 소리를 익히는 옛 어른들은 세찬 물줄기가 쏟아지는 폭포수아래서, 깊은 산중에서 몇 년을, 몇십년을 그렇게 부르고 또 불렀나보다.
지난 3월 이 지역 국악계는 소중한 작업의 결실을 맺었다. 다름아닌 '정정렬제 춘향가 악보집' 발간이 그것. 까다롭기가 여간 아닌 정정렬 바디의 맥을 잇고 있는 최승희 선생의 가장 큰 소망이자 의무이기도 했던 이 작업은 최승희 선생 문하에서 소리를 배우던 제자의 노력으로 감행된 것이었다. 악보 채보 작업을 한 주인공은 바로 이형노씨(38세).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지역 '국악판'에서 그의 이름은 낯설게 느껴진다. 이형노씨가 국악을 전공하거나 무대에 오르는 국악인이 아닌 까닭일 터.
"소리를 접하게 된 건 국악을 공부하고 있는 아는 동생이 권해서 도립국악원에서 거문고와 소리를 배운 것이 전부예요. 그중에서도 우연하게 선택한 반이 최승희 선생님의 정정렬제 소리반이었죠."
그는 '재즈 연주가' 였다. 피아노를 전공한 형덕에 어릴 적부터 음악에 익숙했던 그는 90년 초반까지 지역을 무대로 친구들과 팀을 꾸려 재즈를 연주했었다. 주 무대는 까페나 야간업소의 밤무대. 그런 그가 쉽지 않는 판소리 악보 채보를 하게 된 '경위'는 무엇이었을까.
"처음에 소리를 배우는데 참 많이 놀랐어요. 서양음악을 하던 저는 악보 없이 음악공부를 한다는 게 이해가 잘 가지 않더라구요. 마치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우는 기분이었어요. 수강생들은 저마다 판소리 사설에 높고 낮음과 강약을 표시하면서 외우는 거였죠."
그가 나름의 기호로 사용한 것은 '음표'들. 후창을 하며 후다닥 후다닥 음을 표시해갔다. 재즈 연주를 하던 그에게는 악보로 꾸며 소리의 음감을 익히는 것이 훨씬 편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나 어려움이 많아보였어요. 서양음악과 달리 합리성이나 일치성이 많이 떨어진다는 아쉬움이 크더라구요. 소리에는 악보가 정말 없을까하는 생각에 자료들을 찾아보면서 이 일을 한번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소리에도 악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6, 70년대 작업된 판소리 악보들을 찾아냈지만 수강생인 그가 봐도 악보와 소리가 잘 맞지 않았다. 채보자가 대개 소리를 모르는 서양음악 전공자들이 음반이나 녹음테잎만을 듣고 한 것이 한계였다.
강습시간 마다 열심히 뭔가를 그리고 받아적는 그의 모습이 최승희 선생의 눈에 띄었고 어려운 대목을 수강생들에게 가르칠때면 곤혹스럽기도 했던 선생도 악보 정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와 함께 본격적인 채보작업에 들어갔다.
"음도 랩도 아닌 중간점의 소리들이 있어요. 표현이 어려운 부분들은 비확정음, 묵음, 막는 소리 기호들을 사용해 채보를 했죠. 최승희 선생님이나 저나 이 채보작업에 매달린 것은 소리가 소수의 전유물이 아닌 민요처럼 불리어지길 원하는 마음이 컸습니다."
그렇게 채보한 악보는 96년 완성이 되었고, 얼마전 컴퓨터 작업과 감수작업을 거쳐 한권의 책으로 엮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재즈 연주가'로 돌아왔다. 현재는 서울에서 '독학'으로 재즈 공부를 하고 있다. 재즈곡 악보를 그대로 복사해보기도 하고, 나름대로 소품곡을 작곡해보기도 한다.
"재즈와 우리 소리에는 공통점이 있어요. 자유와 다양성을 상징하는 서양의 음악이 재즈라면 우리 소리는 사람에 따라 개성과 다양성이 확보되고, 변형도 가능하다는 겁니다. 채보 작업을 한 것도 멀리는 제가 공부를 마치고 무대에 서게 될 때 우리 것과의 접목을 시도할 수 있는 분야가 바로 소리가 될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득공'을 이루는 날, 그는 다시 전주를 찾을 계획이다. 국악과 클래식이라는 양분된 음악의 편식에 '재즈'의 맛을 더하고 싶다. 락같은 파워나 클래식 같은 엄격함은 없지만 사람의 향기가 물씬 묻어나는, 닮은 꼴이라며 우리 소리와 재즈의 만남을 주선하겠다던 그의 재주 연주가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