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1 |
메소포타미아에도 칠검을
관리자(2005-11-12 14:52:23)
<촉산>, <소오강호>, <황비홍>, <신용문객잔> 등의 별자리를 창조한 이가 바로 당신 서극(徐克)이지요. 당신은 꼭 다문 입술의 중성 미인으로 카리스마가 빛난 임청하의<동방불패>를 제작했고 <영웅본색>에는 출연도 했지요. 할리우드에 초대를 받았지만 별 재미를 못 본 당신이 <칠검>을 들고 왔네요. 당신의 무협 신을 내 어찌 비디오로 보겠습니까. 당연히 와이드 스크린으로 보아야지요.
‘뭐든지’에 도전하는 상상력에의 결과가 무협물이지요. 전광석화의 장면으로 가득 찬 이 베니스 개막작, 역시 서극이었습니다. <와호장룡>같은 칼의 노래는 아니었지만 드라마는 <황야의 7인>처럼 명쾌했지요. 와이어를 사용하지 않고 중력의 범위 안에서 벌어지는 아크로바트 액션은 힘이 넘쳐났습니다. 또 사운드와 동작의 매치 편집은 하나도 흐트러짐이 없었어요. 그러나 솔직히 둔탁한 칼 부딪히는 소리와 가와이 겐지의 음악은 끝까지 귀를 자극하더군요. 인터넷과 휴대폰을 끄고 동양의 정취에 취하고 싶던 서양친구들이 주인공을 놓고 누가 누군지 얼굴 구별도 쉽지 않았을 듯합니다. 지중해 물의 도시에 모인 그들은 아마 내가<레이더스>나 <글라디에이터>를 보던 눈으로 보았을까요. 삼국지는 못 읽었겠지만 카르타고 점령에 관한 이야기를 읽은 사람들에게는 호기심이나 재미를 넘진 못했을 성싶네요. 말과 술을 작살내서 시간을 버는 작전이나 칼을 피리처럼 다루라는 제법 멋진 말들은 양우생 원작에 기댄 힘이었다면, 너무 야박한가요?
강호의 의리가 어디 동서가 다르던가요. 곡식 한 톨이라도 건지려는 농민이 있는데 악당은 꼭 수확기에 찾아오는 것 또한 고금의 스토리 아니겠어요. 씨푸(사부)와 대협은 과거의 인연을 버리고 천산에서 고행중인데 추수기 농민의 목숨을 구하자는 사형의 전갈이 옵디다. 결국 하산하여 검으로 하화중생(下化衆生)하다가 목숨을 잃는 호민관에 대한 이야기는 인류전형이 되고도 남지요. 당연히 〈7인의 사무라이〉를 떠올렸습니다. 이 구로자와 영감님이 만든 흑백필름에 감탄한 것이 있다면, 그래, 사람은 잘 안 죽는다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칠검의 선수들은 협(俠)이라는 명분 아래 처음부터 끝까지 막 썰어대고 쑤셔댑디다. 또한 현상금 사냥꾼 풍화연성이라는 캐릭터는 큰칼만 옆에 찼지 깊은 시름을 할 줄 모르는 자였어요. 허무와 우수가 없다고 서운해하는 서양 사람들이 떠올라집디다. 나이트클럽 넘버 쓰리나 될 만한 얼굴이던데.
베니스에서 레드 카핏을 밟던 화사한 모습의 김소연이란 백두산족 여인이 화면에서 눈물지어도 고향 사람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내가 외국에 나가 고생을 안 해봐서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둔탁한 칼부림의 팽팽함을 늦추기 위해 삽입한 녹주의 사랑 역시 그냥 베어지고 뿌려지고 마네요. 중국에 노예로 팔려간 조선인이라는 설정이 거슬린다는 못난 한국인의 비판은 무시해도 좋지만 한복의 선은 공부 좀 하시지 그랬습니까. 중국 남자배우의 어색한 (성의 있지만) 조선말이나 김소연의 제법 오랜 시간의 장면 할애는 투자자에 대한 예의였겠지요. 그러나 한류가 얼굴만 파는 것 아닌 조선 사람의 마음과 그 선을 발견할 때 동과 서가 고개를 끄덕일텐데요. 김희선이 나온 <신화-진시황릉의 비밀>도 역시 얼굴만 파나 봅니다. 첸 카이거의 무협 영화에 나온다는 장동건은 그러지 말아야 할텐데요.
호모 파베르에게 검을 쥐어 호모 스워드의 별자리를 창조한 당신! 캐릭터가 평면적인들, 스토리가 좀 딸린들 어찌 서극이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B급의 즐거움이라 해도 사극은 현재극 아니던가요? 옛날을 통해 이야기하는 ‘무엇’이 협이라면 ‘어떻게’가 무(武)일 텐데, 미안하지만 액션 밖 협의 걸음은 더디기만 하군요.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야수들의 세상이 청나라나 이라크가 어디 다르겠습니까. 강호의 의리가 바닥난 오늘, 할리우드가 있는 나라를 생각합니다. 당신의 황비홍 이연걸이 할리우드에서 쇠꼬챙이 바비큐로 만들어졌을 때, 제일 서운한 사람은 당신이었을 것입니다. 그 동네 절정 고수 부시가 전혀 반성을 모르는 오늘, 메소포타미아 그 주위에는 정녕 칠검은 없는 걸까요.
총총.
butgood@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