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1 |
그림 권하는 男子
관리자(2005-11-12 14:48:47)
글 | 김선경 문화저널 편집위원
1996년 겨울, 나는 러시아 상트 페테르스부르그에 있는 에르미타쥬 미술관 안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세계 3대 미술관 중 하나라는 그 미술관에서 나는 무엇을 보았던가? 유감스럽게도 지금 내게는 아무 기억도 남아 있지 않다. 김흥수 화백의 ‘승무’가 그곳에 걸려 있어서 의아했던 기억뿐. 그리고 러시아 사람들의 문화 행태를 이해하기 힘들었던 기억도.
러시아 사람들(물론 극히 일부라는 단서를 달고)은 가난한 한국 유학생을 대상으로 강도짓을 해야 할 정도로 궁핍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에르미타쥬 미술관에서도 차이코프스키의 오페라가 올려졌던 마린스키 극장에서도 그들은 나타났다. 미술과 오페라에 열광하며, 3시간 반 동안의 공연이 끝난 후 기립박수를 치는 그들을 보고 나는 그들의 정신이 궁금해졌다. 그것이 바로 ‘러시아의 저력’이라고 말한 이도 있었지만, 나는 경제적 궁핍 속에서도 미술관과 오페라를 찾는 그들의 정서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가을날 오후 3시의 햇살은 맑고 따스했다. 막 물들어 가는 단풍 숲 속에 도립미술관은 고요히 놓여 있었다. 사무동 2층에 있는 관장실. 벽에는 아무 그림도 걸려 있지 않았다. 책이 수북히 쌓여 있는 책상과 간단히 손님을 맞이할 수 있는 응접용 소파. 단순한 방 배치 속에서 눈에 띈 것은 숲으로 향해 난 커다란 창이었다. 창은, 올망졸망 물들어 가는 단풍들로 인해 거대한 화폭처럼 보였다. 그 어떤 그림도 액자도 필요치 않을 것 같은 풍경을 옆에 두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문화저널 창간 18주년이라는 말에 대뜸 최효준 관장은 대뜸 “그간 구독자 수는 많이 늘었냐?”며 말문을 열었다. 그저 인사치레일 수도 있지만, 요즘 그가 어느 지점에서 고민하고 있는지 조금은 엿볼 수 있었다. 그만저만하다고, 도립미술관은 어떠냐고 질문을 돌렸다.
“지난 10월 14일에 개관 1주년 행사를 치렀어요. 작품을 기증해 주신 분들께는 평생 가족 무료입장권도 드리고....뭐 흡족하진 않지만 무리 없이 잘 치렀죠.”
1년 동안 10번의 전시회를 열었다. 참 큰일을 하셨다고 말을 보태니, 방심하거나 자만은 금물이라고, 자만하기 시작하면 금방 무너진다고 자기다짐 같은 주문을 외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미술관이 대중문화와 경쟁할 수 없다는 것이 최효준 관장의 생각이다.
“미술관에서 기획한 전시로 사람들을 동원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샤갈전 같은 ‘블록버스터’가 아닌 이상 대중들을 불러모으기가 쉽지 않아요. 제가 서울시립미술관에 있을 때 밀레전을 기획한 일이 있는데요. 그런 경우는 미술관에서 일을 한다기보다는 기획사에 전적으로 일을 맡겨버린다는 말이 맞죠. 그래야 수익이 맞으니까요.”
수익은 나중으로 치고, 지역민에게 서비스하는 차원에서라도, 전북에서도 그런 유명화가 전시회를 열어보고 싶은데, 기획사에서 거부를 한단다. 지역정서며 인구수며, 모든 것이 시장성이 맞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우선은 지난 1년간 도립미술관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궁금했다.
“주변에서 많이 칭찬을 해줍니다. 주로 전문성과 대중성을 잘 조화했다는 평이 많은데요. 특히 어린이 기획전에 대한 호응이 아주 높았습니다. <전북미술의 맥> 같은 전시회도 이 지역만의 정체성을 잘 부각시켜서 좋았다는 평이었구요. 지역 내 뿐만 아니라 외부의 미술사학자들이 좋은 평가를 내려줘서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소기의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한 것 같아요.”
미술계와 평론가의 평이 괜찮아서 <월간미술>상에 추천도 됐지만 심사위원들이 전시를 직접 보지 못한 관계로 아쉽게 탈락했다고.
가장 ‘히트 친’ 전시는 가정의 달 기획전으로 마련한 <미술관 속 동물원 전>. 전문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만족시킨 것으로 평가받는 이 전시회는 최관장의 혜안이 큰 몫을 했다. 전문 미술가가 아닌 목수 김진송, 반쪽이 화가로 알려진 최정현씨 등 비전문가를 전시회 메인으로 초대했기 때문. 당시 그들은 미술가도 아닌데 무슨 미술관 전시냐며 난색을 표명했고, 미술관의 특성상 화가에게 사례금을 지원할 수 없기 때문에 실비 정도만 지급하고 그들의 작품을 의뢰해야 했기에 고충은 더 컸다. 거의 억지를 부리다시피 해서 겨우 전시를 성사시켰는데 당시 가장 크게 어필한 작품은 두 사람의 작품이었다. 작가의 독창성을 살리기보다는 조합과 배치, 구성에 더 치중해서 예산을 절감했고, 작가의식의 드러냄보다는 수용자들의 향수(享受)에 더 초점을 맞춘 최관장의 생각은 주효했다.
올 2월에 열린 <중국미술의 오늘전>도 최관장의 작품. 중국에 가서 몇날 며칠 발품을 팔아가며 140점의 작품을 골랐다. 작품 선택의 기준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충실한 작품과 아카데미즘적 성향의 작품들. 과연 전북에서 먹힐까 하는 우려가 없지도 않았지만, 구멍난 속옷을 걸친 중국의 서민들이 전시회장을 찾아 미술을 감상하는 것을 보고 생각을 고쳐 먹었다. 중국의 문화적 저변이 그렇게 넓었던가, 에 대한 놀람과, 우리도 그러해야 한다는 자각이 최관장의 머릿속에 채워졌다.
“사회든 미술이든 다양한 것들이 공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험적인 작품이나 설치작품 일변도로 가는 것이 지금 미술의 현실이라고 해도, 고전적인 작품들, 극사실주의적인 작품들도 함께 공존해야 진정한 미술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그래야 시장도 활성화되고 작가들의 활동영역도 넓어지게 됩니다.”
또한 전시관 기능만 하는 미술관의 기능에도 최관장은 의문을 제기한다. “서로 홍보물을 달라고 사정할 정도로 좋은 작품을 유치해서 관객들의 소유욕을 발동시키는 것”이 최관장의 목표다. 관객들에게는 좋은 작품을 보여주고 작가들에게는 살길을 마련해줘야 한다는 것. 작가들을 위해서는 미술관이 어떠한 짓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이 최관장의 신념이다.
그렇다면 어떤 작품이 관람객의 소유욕을 발동시키는 작품일까? 기준은 의외로 간단하다. “너 비싼 돈주고 이 그림 사고 싶냐?”고 물었을 때 “사고 싶다.”고 답변할 수 있는 그림이 좋은 그림이라는 것이다. 대가를 지불해야 할 때 그 사람의 눈은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고 그래야 좋은 작품을 고를 수 있다는 것이다.
최관장이 생각하는 미술관의 기능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지역작가들의 작품을 보여주는 것이고, 둘째는 지역민에게 외부의 우수 작품들을 가져와서 보여주는 것. 아직은 대중들이 순수미술을 관람하기 위해 미술관이나 전시장을 찾는 풍토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단은 “파이부터 키워야 한다”는 것이 최관장의 생각이다. 미술관이라는 것이 가까이에 있고 언제든 들를 수 있는 공간이며 삶과 밀착된 곳이라는 생각을 갖게 해야 그 다음 단계로의 진입이 가능하다는 것. 미술관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서 질문은 던질 새도 없이 일사천리로 쏟아내는 최효준 관장의 이력은 조금 이채롭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MBA 경영학 석사과정을 마칠 정도로 화려한 학력의 소유자.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미술이 좋았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으나 일찌감치 창작에는 소질이 없다는 걸 깨닫고(이것은 그가 미술에 대한 매우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는 것을 우리는 감안해야 한다. 그가 그린 김충순 화가 초상화는 전문가의 수준이었다.) 미술에 대한 애정을 미술 컨설팅 쪽에서 발휘하기 시작했다. 80년대 후반부터 미술 관련 일을 시작한 최관장은 미술 작품을 구입하고 경매하는 분야에서 특유의 수완을 발휘, 서울시립미술관 관장까지 역임하는 등 확고한 명성을 쌓았다.
전라북도와의 인연은 아들이 맺어 주었다. 장애(자폐)를 가진 아들을 위해 부안 내소사 입구로 이사를 온 것이 7년 전. 작고한 부친이 고창 해리 삼양염업사에 평생 근무하기도 했었지만, 철들어 전북 땅을 밟은 건 가족이 이쪽으로 이사오면서부터였다. 서울시립미술관 관장으로 있으면서 주말마다 부안에 내려왔고 도립미술관 개관과 함께 관장으로 부임, 이제는 아이도 많이 좋아졌고 이곳에서 사는 것이 참 편해졌다는 최관장.
하지만 미술관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해결해야 할 일들 투성이다. 미술관 내에 아트센터도 갖춰야 하고 초기에 생각했던 대로 까페테리아 등의 편의시설도 마련해야 한다. 너무 많은 전시 때문에 학예사들의 불만도 만만치 않다는 걸 안다. 하지만 “일단은 미술관의 볼륨을 키워서 ‘적어도 도립미술관이라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관행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 최관장의 신념이다.
또 최관장은 소외된 계층의 미술작품 향유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절대로 그냥은 미술관에 오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시골학교, 대안학교, 달동네 공부방 등을 찾아다니며 미술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생각대로라면 자활후견기관 사람들도 모셔와서 관람하게 하고 싶고 노인들을 위한 체험 프로그램도 만들고 싶다.
“오늘날 현대미술의 가장 큰 문제점은 대중과 소통이 잘 안 된다는 겁니다. 물론 미술이라는 것이 생래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측면도 있고, 대중과의 단절이라는 극도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새로운 사조가 생겨나는 것도 인정을 합니다. 하지만 무엇이든지 한편으로만 치닫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관람객들이 작품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무시하지 말고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감안하고 그에 맞는 설명을 곁들이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마치 장님이 눈을 떠가듯이 쉬운 것부터, 익숙한 것부터 보여주면서 점차 다른 세계로 이끌어 가야 하는 것이죠.”
다양한 미술관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 최관장은 후원회 조직을 염두에 두고 있다. 전시장의 기능이 아니라 복합문화센터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스페셜 프로그램들을 기획하고, 그럴 경우에는 외부 인력을 충분히 활용해야 하는데 공립미술관의 특성상 예산을 집행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 후원회라고 해서 꼭 재정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데 도움을 줄 만한 부분이 있다면 누구든지 참여할 수 있게 열어놓을 생각이다. 말하자면 후원회가 시민들과 미술관을 잇는 가교 역할을 병행하는 셈이다.
“인구의 4분의1이 한 영화를 본다는 것이 저는 무시무시합니다. 예술영화는 금방 간판이 내려지지 않습니까? 대중문화를 폄훼하는 것은 아니지만 ‘균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삶의 질이 유지가 됩니다. 구소련에서 밥을 굶는 서민들이 클래식을 향유했듯이 문화의 건강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순수예술 분야가 해내야 할 몫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걸 시장에만 맡겨놓으면 승부는 뻔하죠. 제도적인 지원과 내용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합니다.”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답게 그는 ‘시장의 실패’를 언급한다. 시장은 만능이 아니며 특히 문화만큼은 시장논리에 맡겨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조금은 물질적으로 결핍되더라도 질적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도립미술관이 그 ‘질’에 일조했으면 하는 것이 최관장의 바람이다.
그림 한 점 걸려 있지 않은 하얀 벽이 궁금해서 최관장님은 어떤 화가를 좋아하느냐 물었다. 빈센트 반 고흐를 좋아한단다. 그의 그림에서는 진정성이 느껴진다고. 그러면서 조만간 전시실 안에 의자를 다량 설치할 계획이라고 덧붙인다. 너무 푹신한 의자말고 등받이가 없는 조금은 불편한 의자. 의자의 용도는 “좋아하는 그림을 한없이 바라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너무 푹신하면 다른 사람에게 기회가 적게 돌아 갈까봐 조금은 불편한 의자를 선택했다고....
다시 나는 10년 전 러시아의 미술관 안으로 돌아간다. 허름한 차림의 사내와 여자가 의자에 앉아서 한없이 그림을 바라보고 있다. 무엇이 그들을 하루종일 그림 앞에 앉아있게 만들었을까? 적어도 돈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떤 명예나 욕망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염없이 그림에 빠져들 시간도 없고, 그럴 이유도 모른 채 그저 살아가기에 바쁜 우리들. 문득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나 의문이 생긴다면 도립미술관의 작은 의자에 앉아 보시길. 그곳에서 만나게 될 세상은, 분명 지금의 세상과는 다른 모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