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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 |
[자치단체의 문화와 전략 | 장수] 삼절(三節의) 고장 장수(長水)
관리자(2005-11-12 14:31:23)
글 | 강철규 장수 향토문화연구회 회장 장수는 울고 왔다 울고 떠나는 고장이었다. 산세가 험하고 교통이 불편하며 문화적인 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어 생활하기에 아주 불편하였으므로 장수에 살러 오는 사람들은 걱정이 앞서 울고 왔다가 떠날 때는 장수 사람들의 훈훈한 인심에 헤어지기가 아쉬워 울며 떠났다는 아주 인심이 후박한 고장이었다. 인심이 좋은 것은 여전하나 지금은 교통이 편리하고 문화생활을 마음껏 즐길 수 있으므로 이 이야기는 옛 이야기가 되었다. 인심이 후박하고 순진하기만한 것이 아니라 나라가 어지러울 때면 앞장서서 위기를 극복하려고 했으며 목숨까지도 초개와 같이 버리는 충직한 사람들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장수를 충절의 고장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때 진주 남강에서 왜적의 장군 모곡촌육조(毛谷村六助)의 허리를 껴안고 의암 바위에서 떨어져 순절한 주 논개(朱論介)가 있었고, 장수 향교를 불태우려고 침입한 왜적을 꾸짖어 감동시켜 향교의 원형을 온전히 보전하게 한 향교지기 정경손이 있었다. 그 외에도 임진왜란 때 왜적과 맞서 싸운 대동의병장 전기홍(全基泓), 호남의병장 문태서(文泰瑞), 호남의병 선봉장 박춘실(朴春實) 등이 있으며, 교파를 초월하여 애국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 33인 중의 한분인 백용성 조사 같은 분들이 이곳 장수 출신들이다. 장수 현감 조종면을 수행하여 민정을 시찰하다가 천천면 장척애에서 꿩이 갑작스럽게 날아가는 소리에 놀라 뛰는 말과 함께 깊은 소(沼)에 빠져 죽은 현감의 뒤를 따라 순직한 순의리(殉儀吏)도 있었다. 1846년(조선조 헌종 12년) 당시 장수 현감 정주석(鄭胄錫)은 의암 주논개 수명비를 호비정거리와 향교지기 정경손의 비각을 향교 앞에 세워 이들의 충절을 기리게 했다. 이보다 45년 앞서 최수형(崔壽亨)이라는 현감도 장척애에 순의리 타루비(墮淚碑)를 세워 이의 충절을 기리게 하였다. 조선조 헌종때 조정의 예조에서 삼강을 지켜 국민의 모범이 되는 충신 효자 열녀를 모아 저술하는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추천하는 장계를 올려 이 세 사람이 모두 게재되게 함으로써 장수현에서는 이 세분을 장수 삼절로 추앙하여 장수의 상징으로 삼게 하였다. 우리 장수에서는 주논개의 위대한 순국정신과 정경손의 충절, 순의리의 절의(節義)를 기려 장수 3절이라 하고 이들의 충절 정신을 계승하고자 온군민은 노력하고 있다. 이에 이 세 분들 3절의 행적을 장수군지를 참고하여 조금 더 자세히 살펴 보고자 한다. 충절의 표상 義巖 朱論介 1574년(조선 선조 7년) 9월 3일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주촌리(전라도 장수현 임현내면 주촌)에서 아버지를 주달문으로 하고 어머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사주가 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이고, 띠가 개해 개달 개날 개시에 태어났다고 하여 아버지 주달문은 개를 낳는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경상도 방언으로 <개를 놓다>(개를 낳다)라는 뜻이 담긴 논개(論介) 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논개의 나이 15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숙부 주달무가 지방 토호 김풍헌의 백치불구인 아들에게 민며느리 동네 앞 논 세마지기 엽전 300냥, 당포세필에 팔아 넘기자 논개 모녀는 박씨의 친정인 경상도 안의현 서하면 봉정마을로 피신하게 된다. 이에 김풍헌은 장수현감에게 고발하고 논개 모녀를 송사에 회부한다. 장수 현감 최경회는 <무고한 사람을 무고해서 괴롭히는 처사는 다시는 있어서는 안된다>는 판결을 내리고 무죄방면했다. 최경회(崔慶會)의 부인 나주 김씨는 논개 모녀에게 내아에 머물면서 병약한 자신을 돌보게 하였다. 김씨는 자신이 생명을 길게 유지 못할 것을 알고 자색과 미모를 겸비한 논개를 자기를 대신해서 남편을 보필할 측실로 맞이 할 것을 권유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1591년 봄 최경회의 측실로 부부의 연을 맺게된다. 그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최경회는 경상우병사가 되어 의병 3000명과 함께 진주성 싸움에 참여하게 되는데 논개도 며칠 후 여러 고난을 겪으며 진주성에 입성하여 합세한다. 2개월이 지난 그해 6월에 왜적과의 치열한 전투 끝에 진주성은 함락되고 최경회는 창의사 김천일, 복수장 고종후 등과 함께 패전의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하였다. 논개는 왜병들이 승전연을 베푼다는 소식을 듣고 진주 기생들의 협조를 얻어 연회에 참석하게 된다. 승전에 도취된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게에게 접근하여 게야무라를 혼몽대취하게 하여 둘이 연회석에서 빠져나와 남강 기슭에 있는 바위까지 유인하여 춤을 추는 척 하면서 껴안고 혼신의 힘을 다하여 강물 속으로 밀어 같이 떨어져 순국하셨다. 장수에서는 논개생장향수명비(論介生長鄕竪名碑)를 세우고 순절일인 7월 7일을 기해 제향을 거행하였으나 조국광복 후 장수 남산 아래 의암사(義巖祠)를 짓고 사당에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탄신일인 매년 9월 3일에 엄숙하게 제향을 모시고 있다.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에는 의암 주논개님의 생가가 복원되었고 생장유허비(生長遺墟碑)가 세워졌으며 동상추모비각이 이건되어 의암 주논개님의 유덕을 숭모하는 교육의 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왜장도 감복한 忠僕 丁敬孫 정유재란 당시 거침없이 육십령을 넘어 장수에 도착한 왜병들이 성현들의 도의교육과 구국정신의 본산인 향교를 불태우고자 장수향교에 침입하게 된다. 왜적들이 가는 곳 마다 유림이나 교직이 도망쳐 버리고 빈 성전만 있었는데 장수 향교만은 정문의 계단에 전복(殿服)으로 정장한 정경손이 단정히 앉아 추상같은 호령을 하였으니 <여기는 성전이니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된다. 꼭 들어가려거든 나를 죽이고 들어가라>고 하는 공의 늠름한 기세와 그 담대하고 용감한 기풍에 금수와 같은 왜적들도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대를 지휘하던 왜장은 공의 충성심과 늠름한 기상에 감복하고 즉시 지필묵을 챙겨 <이 성역에는 들어가지 말라>는 글을 쓴 신표를 공에게 주었다. 이 글을 향교 정문에 붙여 놓은 후에는 왜적들이 이것을 보고는 향교에 들어가지 않으니 왜란 중에도 유일하게 장수 향교 건물만이 세상에 남아 있게 되었다. 정경손 공의 목숨을 아끼지 않은 수호로 불타지 않고 보존할 수 있었으니 조선조 건축사에 정수라 할 수 있는 다포형(多包型) 맞배집이 우리들에게 전승되어 오게 되었다. 공의 이름은 경손(敬孫)이며 성은 정(丁)씨이고 관향은 창원이다. 선조는 중국 당나라에 살았었는데 853년에 고구려의 후신인 발해로 들어와 살았는데 고려 초부터 말엽까지 명문가를 이룬 혁혁한 양반의 가문이었다. 그러나 공의 연대에 와서 천역(賤役)으로 신분을 격하시킨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짐작컨대 이성계의 거사에 항거하던 수절신(守節臣)의 후예이거나 조선조에서 고려의 명관들을 유배시켜 배소에서 죽게 하였으니 그 후손들이 갈 곳이 없어 천역 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하여간 양반가문의 후예임에는 틀림이 없다. 공은 기구한 운명으로 장수 향교의 교직이라는 천역을 감수하고 성묘(聖廟)를 지키는 것을 천직으로 알고 충실히 책임을 완수 하였다. 정공은 왜란이 끝난 후 장수현의 호장(戶長)으로 발탁되어 그 공을 포상 받았으며 군민의 존경을 받으며 여생을 마쳤다. 수명비각은 1976년 장수향교 정화사업으로 장수향교 정문인 부강문의 좌편에 이건되어 새롭게 단장되었다. 현감 따라 목숨 버린 殉義吏의 節義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고  하면 임금과 스승, 아버지는 한가지로 존중 되어야 한다는 뜻인데 현대사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으나 군신(君臣), 주종(主從)의 관계가 명확하던 조선조에서는 군신의 관계와 주종의 관계는 동일시하는 것이 정상적이었으며 이것을 가르치고 권장하여 사회의 질서를 확립하였으니 봉건사회의 노복(奴僕)제도는 제도 자체는 문제가 있었으나 실제 제도를 운영 하는데는 그 나름대로의 법도가 필요하였으며 규율이 있어야 했다. 당시의 노복제도에는 사노(私奴)와 관노(官奴)가 있었다. 일반 개인이 거느릴 수 있는 것이 사노이며 관청에서 거느리는 것이 관노인 것이다. 고을의 수령인 현감에게는 삼노라는 관노를 거느렸는데 호창(呼唱), 사령(使令), 통인(通引)을 말하는 것으로 이 세가지 직책에 있는 관노는 항시 현감의 좌우에 대기하여 주위를 벗어 날 수 없었다. 삼강록과 장수지(長水誌) 건(乾) 권지삼(券之三)에 제35장 절의편에 기록된 순의리의 조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성명은 잊어버려 전하지 아니하였다. 숙종조 무오 3월 22일 형조의 아전으로써 현감 조종면을 배행하여 완산의 감영으로 가던중 장척애를 지나다가 꿩의 울음소리에 놀란 말이 놀라 뛰는 바람에 현감과 말이 함께 단애 밑 깊은 소에 떨어져 죽었다. 배행하는 아전은 하늘을 가리키며 통곡하면서 가로되 나는 나의 현감을 잃었으니 내가 어찌 살아 있기를 바라리오 하고 손가락을 깨물어 꿩과 말의 그림을 바위의 좌편에 그리고 다시 타루(墮淚) 두자를 깎아 지른 절벽 오른편에 혈서를 쓰고서 이내 물로 뛰어 들어 순사 하였다. 피의 흔적이 완연히 남아 랑랑하게 빛나더라 충절이 천추에 환하게 빛날 것이다. 지나간 임술년에 현감 최수형이 그 상황을 살피고 유적이 민모되는 것을 한탄하여 돌을 깎아 타루비라 써서 새겼으며 다시 조그만 비각을 세웠다> 순의리는 1678년(肅宗 4년 戊午) 당시 장수현감 조종면의 수하에 있었던 아전이었으나 그 성명이 실전(失傳)되어 누구인지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고 있다. 다만 백(白)씨 혹은 박(朴)씨로만 전해 질 뿐이다. 장척애 근방에 비석에 비각이 건립되고 화려하게 단청되었으며 매년 3월 22일 군수 주재로 제향을 올려 무명의 순의리와 비명에 간 조종면 현감의 영혼을 달래고 있다. 강철규 | 장계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했다. 현재는 장수 향토문화연구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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