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1 |
18주년을 맞이하며
관리자(2005-11-12 13:4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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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의 「흰 바람벽 있어」라는 시가 있습니다. 시인이 흰 벽을 바라보는데, 이런 글자가 지나갑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시인의 운명이란 그런 것이라고 선선히 동의할 수도, 그럴 필요는 없다고 항변을 할 수도 없게 만들어 버리는 이 태도의 비장함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런데 이 구절은 절묘하게 변주됩니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잠깐,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이 하늘에서 내려와야 합니까?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을 바치는 것은 위대한 시인과 동시대를 살도록 허락받은 우리들이 시인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요?
난데없이 첫머리에 백석의 시를 일부 인용했습니다. 백석을 가난한 시인의 전형으로 보아서 소개한 것이 아닙니다. 식민지 시대와 견주면 우리는 풍요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왜곡된 풍요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겠지요. 백석 시의 아름다움이 가혹한 시대를 견디게 한 자양분이었다는 진술이 분식으로 들립니까? 시의 생산과 그것을 독자와 공유하는 작업은 별개입니다. 좋은 시는 언젠가 읽히게 된다고 말하는 것은 누군가의 직무유기일 것입니다. 가난한 시인을 이웃으로 삼아도 좋지만, 좋은 시를 가난하게 만들지는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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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토론회에서 지역과 지방이라는 용어를 두고 적합성을 따지게 되었습니다. 서로 내 사전에는 그런 용례가 없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겹치는 부분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지역감정과 지방시대라는 복합어들을 바꾸어 조합해 보면 지역과 지방은 각각 어울림의 자리가 다른 것 같습니다. 여하간 지역 또는 지방이 새삼 주목을 받는 것은 중앙 또는 수도권 집중의 폐해가 이제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서울의 일부에서도 지방에서나 들릴 법한 하소연이 들리고 있습니다. 전북의 경우에도 전주권 집중은 심각한 상태입니다. 집중은 불균형을 가져오고, 불균형은 필연적으로 붕괴에 이르게 됩니다. 임박한 붕괴를 미루기 위하여 쏟아 부어야 할 자금과 노력의 일부로도 불균형은 충분히 해소할 수 있습니다. 아마 지금이 바로 그런 시점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전반적인 수준이 낮아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 지 모르는 시기에는 선도적 역할이 강조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도 선택과 집중은 유효한 전략으로 인정받는 추세입니다. 그러나 선택의 기준이 모호하거나 합의를 생략한 채 일방적으로 선택한다면 집중의 효과를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집중의 역효과가 바로 오늘 우리가 말하고 있는 지역의 소외와 낙후일 것입니다. 합의에 이르는 과정이 일의 추진에 선행해야 한다는 교훈을 우리는 아직도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과가 결코 절차적 정당성의 확보를 사후 승인할 수 없음은 자명합니다. 무리한 추진으로 인한 부작용에 대해서는 그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하게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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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8주년을 맞아 독자, 필자, 그리고 도와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변함없이 맡겨주신 소임을 다하겠습니다.
| 정철성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