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0 |
양순실전
관리자(2005-10-13 16:47:10)
문학적인 상상(想像)의 Still Life
글 I 김미선 전북대 강사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낯선 그림을 마주했을 때 그림에 대한 대단한 감식가(鑑識家)나 애호가가 아닌 이상 맨 먼저 자기 자신의 심상으로 그림을 바라보고 이해한다. 그리고 이런 우리들에게 ─ 비약적으로 말하자면 ─ 그림은 대략 2부분으로 나뉠 것이다. 그중 하나는 우리에게 편안하게 다가오는 그림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심기(心氣)를 불편하게 하는 그림일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지난 9월 전주 서신갤러리에서 있었던 양순실의 그림은 앞에서 언급한 평범한 우리들에게 부드럽고 편안하게 다가올 수 있는 전시였을 것이다.
양순실의 이번 전시는 지난 1998·1999·2003년도에 이은 4번째 개인전이다. 첫 회부터 꾸준하게 이어온 작가의 관심은 초현실주의적인 화풍 안에서 작가자신의 내면적·외면적 삶을 암시적이고 은유적으로 탐구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초현실주의적인 화풍이란, 양순실의 그림을 통해서 알아보자면, 전혀 연결성이 없어 보이는 다양한 소품들 ─ 기하학적으로 최소화된 집들, 외롭게 부유하는 회전목마, 간결이 정리된(추상화된) 나무, 어린아이가 떠나고 혼자 흔들거리는 그네, 어디론가 연결된 듯 사라져버리는 계단과 구부러진 길의 선(line)들, 연극무대와 같이 보이는 고풍스러운 식탁, 그리고 지평선인지 수평선인지 불분명한 수수께끼 같은 황량한 공간(background) ─ 등 이 거의 단색의 단순하게 처리된 배경 화면에서 독립적이고 개별적으로 주위를 환기 시키면서 등장하는 방법일 것이다. 여기에서 장면은 시간과 공간적 사건을 초월하면서 언제나 세계 저편의 상상의 세계에서 자신들이 살아있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양순실의 일루전(illusion)적 표현방법은 이전 20세기 초 서양의 현대미술을 주도했던 초현실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했던 수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양순실의 작품을 초현실로서 바라보기 전에, 작가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을 같은 카테고리 안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의해야 될 점이 있다. 그것은 먼저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있어 예술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생의 신비, 비밀, 놀라움에 대한 의식을 창조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는 초현실주의의 대가였던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가 초현실주의 미술에 관한 저술과 함께 다양한 활동을 했던 S. 알렉산드리안에게 보낸 편지글이나 초현실주의의 주창자였던 시인 브르통(Andre Breton)의 통저기(通底器)에서 진술을 보면 초현실주의 미술가들의 생각을 정확히 알 수 있다.
“나는 색채의 실질적인 외관이 사라지고 시적 이미지가 나타나도록 색채를 배열하는 과학이 바로 회화라고 생각하네. 내 그림에는 주제나 테마란 게 없지. 상상적인 이미지로 가득 차 있는 내 그림에서 나오는 시는 알 수 없는 것, 알려지지 않는 것을 알려진 것으로 회복시켜 주는 셈이지.” - 마그리트
“시(詩)를 낳는 중요한 요소는 서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두 개의 사물에 대한 비교, 혹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돌발적이고 충격적으로 이 둘을 대치시키는 것이다.” - 브르통
이러한 당시의 초현실주의자들의 작업 태도에 대해서 S. 알렉산드리안은 그의 저서 『초현실주의 미술』에서, 그들은 단순한 장인(匠人)이나 심미주의자가 되기보다는 ‘신들린 사람’이나 ‘도박꾼’이 되고자 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즉,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특별한 감정, 또는 서정적 요소 없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리학적 충격을 주기위해 일상생활의 낯익은 사물들을 전혀 생소한 어떤 이질적 요소로 탈바꿈시키는 시각의 변증법적 편집광(偏執狂)들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가 예술의 혁명(革命)을 주장했던 초현실주의적 정서로서 주요하게 양순실의 화면과 ‘그림밖에 그릴 줄 모른다’는 작가의 소박함을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거칠고 즉흥적일 것이다. 양순실의 화면은 자연에 대한 시(詩)적인 내면의 반사작용으로서 획득할 수 있는 투명성(혹은 감수성(感受性))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양순실의 작품은 전혀 다른 종류의 완화(緩和)된 접근법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대안은 ‘문학적인 상상’에 의해서 일 것이다.
문학은 지어낸 것(fiction, 허구)이라는 의미에서 ‘상상적인(imaginative)’ 글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또한 문학은 언어를 특별한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을 근거로도 정의 될 수 있다. 이는 문학이 사실의 증언이나 유사종교, 혹은 심리학이나 사회학이 아니라 언어의 특수한 조직 그 자체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정의는 1910년대에 활동한 문학연구들, 특히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문학적인 것’의 정의이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문학작품을 ‘장치(기법)들’의 다소 자의적인 집합으로 보는데서 출발하여, 나중에서야 이 장치들을 총 텍스트 체계 내에 있는 서로 관련된 요소들 혹은 ‘기능들’로 보게 되었다. ‘장치’들에는 음·이미지·리듬·구문·음보(音步, metre)·운(韻)·서술기법들 등 그야말로 문학의 형식적 요소들 모두가 속하는 것이고, 중요하게 이 모든 요소들이 공통으로 가진 것은 ‘생소하게 하는(estranging)’ 혹은 ‘낯설게 하는(defamiliarizing)’ 효과였다.
즉, 이는 문학언어의 특수한 점으로서, 문학언어를 일반적 담론형식들로부터 구분해주는 점이자 문학언어가 일상언어를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시킨다(deform)’는 밝히는 것이다. 게다가 이 변형된 언어들은 습관적인 반응들을 새롭게 하고 사물들을 ‘그림과 같이’, 더욱 ‘인식 가능하도록’ 환기시킨다.
이제 양순실의 화면은 이러한 문학적인 상상력의 도움으로 회화의 문학적 풍경을 이룩하였다. 그래서 작가의 문학적인 풍경은 ‘인식 가능하도록’ 환기되어진 가장(假裝)의 세계이자, 실재를 보는 듯이 섬세하게 조직되어진 각본임이 드러난다. 그러나 양순실의 풍경은 우리 주변의 흔히 널려있는 소소한 일상을 주제로 평면성과 환영이라는 회화의 근본문제를 접근함으로서 더욱 순수하고 특별하다. 결론적으로, 작가의 개인적 심상으로부터의 출발한 문학적인 풍경은 인간적 이해의 한도를 넘는 정신적이고 영원한 미지(未知)로서, 마치 움직이지 않는 기물(器物)을 그린 정물화처럼, 우리의 순수한 내면이 ‘정지해있는 삶(still-life)’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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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선 | 전북대학교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숙명여자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졸업했다. 서울시립미술관 제1회 인턴과 갤러리창(서울 인사동), 갤러리 서화(서울 첨담동) 큐레이터로 일했다. 현재는 전북대에 출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