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0 |
[순창] 산수가 수려해 인불도 많아라
관리자(2005-10-13 16:30:44)
산수가 수려해 인물도 많아라
글 I 양만정 <향토사학자>
자연환경
순창은 전라도의 중앙부에 위치한 고을이었는데, 전라남북도로 나뉘어진 이후로는 전라북도의 남단에 있는 변두리 고을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도 순창은 전라남북도의 경계지에 있으면서 양쪽의 교량역할을 하고 있다.
순창은 산천이 수려하여 옛날부터 명승지를 탐사하는 나그네가 떨어지지를 아니했으며 명현 달인이 많이 배출된 고을이었다. 순창의 자연환경을 살펴보면 전라도가 모두 그러하듯이 순창도 노령(蘆嶺)산맥의 한줄기가 뻗어와서 순창을 에워싸고 있다. 곧 진안의 마이산(馬耳山)에서 곰치재를 거쳐 완주(完州)와 임실(任實)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슬치재(瑟峙)로 내려와서 두 줄기로 나누어진다. 남쪽으로 뻗어간 줄기는 임실읍을 거쳐서 청웅면과 덕치면쪽으로 달려갔고, 서남쪽으로 뻗어간 줄기는 중간에 북으로 거슬러 올라가 모악산(母岳山)을 만들었고, 다른 한줄기는 남으로 달려가서 정읍(井邑)과 순창의 군계를 이루면서 내장산(內藏山, 763m)을 만들었다. 여기에서 산줄기는 여러 가닥으로 갈라지는데 서남쪽으로 뻗은 줄기는 고창(高敞)의 방장산(方丈山 )을 만들고, 거기에서 다시 북상한 줄기는 곁으로 부안(扶安)의 변산(邊山)을 만들고 잔산으로 읍터를 만들었다. 우리 순창의 산들은 모두가 이 내장산에서 갈라진 산줄기에서 뻗어 나왔는데, 곧 한줄기는 거기에서 다시 북상하면서 구림면의 무이산(武夷山)을 만들고 순창의 최고봉인 회문산(回文山, 839m)을 만들었다. 또 다른 한줄기는 순창의 광덕산(廣德山)을 만들고 여기에서 다시 한줄기는 담양(潭陽)의 추월산(秋月山)을 만들었다. 광덕산에서는 동북쪽으로 한줄기가 뻗어서 순창의 금산(錦山)을 만들고 금산에서는 다시 북상하여 임실과의 경계를 이룬 갈재로 올라채서는 거기에서 다시 한줄기는 동으로 뻗어 인계면의 상여봉, 두류봉을 만들었고, 다른 한줄기는 남하하여 건지산(乾芝山), 장덕산(長德山)을 만들었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슬치재에서 임실읍으로 뻗어간 줄기는 청웅과 덕치를 거쳐 동계면에서 용골산(龍骨山, 634m)과 무량산(無量山, 586m)을 만들었다. 또 광덕산에서 동남쪽으로 뻗은 한 줄기는 아미산(峨嵋山, 515m)을 만들고 거기에서 남하하여 순창과 곡성의 경계를 이룬 설산(雪山)을 만들었다.
다음은 하천을 살펴보기로 한다. 순창의 모든 하천은 유등면의 행가리에서 섬진강(蟾津江)으로 모여 합쳐진다. 섬진강은 그 근원을 진안에 두었는데 거기에서 오원강이란 이름으로 임실과 관촌을 거쳐 운암에 이른다. 여기에는 옥정저수지(玉井貯水池)가 막아져서 노령산맥을 뚫고 서쪽인 호남평야의 농업용수로 쓰여지고 있다. 이 옥정저수지에서 내려가는 섬진강은 임실의 강진면과 덕치면을 거쳐 동계면 귀미 옆을 지나 적성면에 이른다. 이곳을 적성강이라 부른다. 예부터 적성강은 경치가 좋고 선유놀이를 하기에 알맞은 곳이라 하여 이곳을 통과한 관원들은 이곳에서 하루를 머무르고 지나갔다고 한다. 한편 임실 오수쪽에서 흘러온 오수천(獒樹川)은 동계면의 물들을 모두 받아 적성면 귀암 앞에서 섬진강과 합수된다.
한편 앞서 말한 내장산에서 갈라진 산줄기가 끼고 도는 추령선(秋嶺川)은 복흥면에서 발원하여 쌍치면을 지나서 운암강으로 들어가 섬진강과 합수한다. 그리고 경천(鏡川)은 광덕산에서 발원하여 순창읍을 거쳐서 유등면에서 섬진강과 합류하는데, 이 세강을 순창의 삼대천이라 부른다. 이밖에도 크고 작은 내가 많이 있어서 옛날에는 은어를 비롯한 맛있는 물고기 등이 밥상을 장식하여 주었는데 근래에는 강물이 오염되고 댐 등이 막아져서 더욱 그 정도가 심해져서 그 물고기들이 올라오지를 못하여 잡을 수가 없다.
이렇게 우리 순창에는 이름 있는 산과 내가 많아서 예부터 살기 좋은 곳으로 이름이 있었다. 더욱이 인걸은 지령(地靈)이라 하여 산수가 수려하면 반드시 인물이 배출된다고 하였다. 이것이 순창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순창에서 배출한 여암 신경준(旅菴 申景濬)
위와 같이 산수가 수려한 순창에서 인물이 배출되지 않을 수가 없다. 순창에서 배출한 인물로는 고려시대에는 문랑공 설공검(文良公 薛公儉)의 형제와 옥천부원군 조원길(玉川府院君 趙元吉)이 있고, 조선조에는 중종조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이계 신공제(伊溪 申公濟)와 임지왜란에 창의하여 국가를 구한 중도승지 어은 양사형(漁隱 楊士衡)과 도암 이재(陶庵 李縡)의 문인으로 성리학의 대가인 백수 양응수(白水 楊應秀)와 조선말기에 조선유학의 6대가의 한사람으로 꼽힌 노사 기정진(盧沙 奇正鎭)과 최근의 인물로는 대한민국 초대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街人 金炳魯)가 있는데, 여기에서는 영정시대에 실학자로서 우리 학계에 우뚝 솟은 여암 신경준을 소개하고자 한다.
신경준은 세조, 성종때에 영상을 지낸 신숙주(申叔舟)의 아우인 귀래정 신말주(歸來亭 申末舟)의 10대손인 내( )의 아들로 숙종 38년(1712)임진에 순창읍 남산대의 본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한번 들으면 잊지 않고 모두 기억하였다. 15세에 시경(詩經)을 읽었고, 조금 자라서는 널리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그 집 뜰에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여러 해 동안 열매가 열지 않으매 글을 지어 꾸짖으니 그 해에는 나무가 무성하여 열매가 여니 고을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겼다. 그는 사람됨이 마음이 깊어 큰 뜻이 있어 일찍이 말하기를 ‘대장부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천하의 일이 모두 내가 할일이니 한 가지 물건이라도 알지 못하면 수치이고 한 가지 재주도 펴지 못하면 병이다’하고 드디어 그로부터 성인의 책을 읽고 마음 깊이 궁구하여 그 큰 뜻을 깨쳤으며 모든 가르침을 익혔으니 천관(天官), 직방(職方), 성율(聲律), 의복(醫卜), 역대헌장(歷代憲章), 해외기벽지서(海外奇僻之書)를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특히 우리나라의 산천도리(山川道里)에 이르러서는 더욱 환하게 눈속에 있었다. 1738년(영조14), 그의 나이 27세에 경기도 소사(素沙)로 이사를 하여서는 소사문답(素沙問答)이라는 책을 지었는데, 그 내용은 소(素)는 흰색을 말하고, 사(沙)는 모래를 말하는데, 색깔과 물질을 주제로하여 문답한 철학서로 많은 사람에게 감명을 주는 저서이다. 소사에서 다시 충청도 직산(稷山)으로 이사를 하였다. 1744년(영조20년)에 다시 순창으로 되돌아갔다.
1754년(영조 30), 그의 나이 43세에 비로소 과거에 응시하여 을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처음에 휘릉별검(徽陵別檢)에 제수되고, 이어 성균전적, 병예조랑, 사간원정언, 이조랑, 사헌부장령, 승정원동부승지 등의 내직과 서산, 북청, 강계군수와 부사를 지내고, 말년에는 제주목사에 나갔다. 그는 관리로서의 치적도 두드러진 것이 있지만, 영조에게 인정을 받아 여지편람 감수와 문헌비고의 찬수에서 여지고(輿地考)를 맡았다. 이와같이 왕명에 의하여 편찬한 것 외에 개인이 펴낸 책을 들어보면, 의표도(儀表圖), 부앙도(俯仰圖), 강계지(疆界志), 산수경(山水經), 도로고(道路考), 일본언운(日本諺韻),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 거제책(車制策), 병선책(兵船策), 수차도설(水車圖說), 논선거비어(論船車備禦), 장자변해(莊子辨解), 사연고(四沿考), 가람고(伽藍考), 군현지제(郡縣之制) 등이다. 이상의 저서는 문자학(文字學), 성운학(聲韻學), 지리학(地理學)을 중심으로 다방면에 걸쳐서 업적을 남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훈민정음운해는 송학(宋學)의 시조의 한사람이라는 소옹(召雍)의 황극경세성음도(皇極經世聲音圖)를 본보기로 하여 일종의 운도(韻圖)를 만들려고 전개한 이론이기는 하였으나 훈민정음 창제 이후 가장 깊은 문자이론을 전개한 학술적인 업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와 같이 평생을 벼슬길에서나 집에서나 학문에만 힘쓴 그는 영조께서 승하한 이후로는 집에서 소식을 하고 번번이 영조의 일을 생각하고 말하며 잊지를 않았다. 그러다가 1781년 정조 5년 5월 21일에 졸하니 향년이 70이었다. 그는 그날을 두었는데 2남을 두었는데 큰 아들은 재권(在權), 둘째는 두권(斗權)이라하였으며, 딸은 셋이 있는데 장녀는 이영갑(李永甲), 둘째딸은 이호연, 셋째딸은 윤치정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정조조에 양관대재학(兩館大提學)을 지낸 홍양호(洪良浩, 1724~1802)는 여암이 과거에 응시할 때에 시관이 되어서 그를 뽑은 일이 있었는데 그것이 인연이 되어 나이로는 그보다 12년이나 아래였지만 매우 친숙한 사이가 되었는데 그의 묘갈명도 그가 지었다. 거기의 첫말이 ‘신순민(申舜民)은 천하의 선비이다. 그 학문은 통하지 않은 바가 없으며 그 재주는 족히 크게 받아 밝은 임금을 만나 사랑을 받았으나 마침내 쌓은 바를 펴지 못했다.’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그의 재주와 학식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서 순민(舜民)이란 그의 자이다. 옛날에는 이름 대신에 자를 많이 썼기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의 이들 저서의 원본은 최근까지 그의 후손가인 순창읍 남산대에 본존되어왔는데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가 1940년대초에 남산대에 찾아와서 학문연구차 필요하다고하여 빌려달라고하여 빌려주었는데 그가 6·25후에 납북되어 다시는 못오고 말았기에 책도 영영 못찾고 말았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여암 신경준은 순창뿐이 아니라 우리 한국이 낳은 위대한 학자로서 전무후무한 박학박식으로 우리 후학에게 많은 가르침을 남겨 주었으니 어찌 숭모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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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만정 | 25년간 교장으로 지냈다. 향토사학자로 전북향토문화연구회 회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