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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 |
[막걸리] 신석정 선생님과 막걸리
관리자(2005-10-13 16:16:31)
신석정 선생님과 막걸리 글 I 오하근  <원광대학교 국어교육학과 교수> 60년대 말쯤 전주에 직장을 옮기게 되어 막걸리 집에서 더러 선생님을 뵐 수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지인들과 맥주를 마시더라도 2차로 막걸리 집에 들리셨다. 당시의 막걸리 집은 질퍽하고 푸짐했다. 비록 방에서 따로 상을 차려 둘러앉는 것이 아니라, 하도 닳아서 윤기나는 긴 의자에 양쪽으로 무리져 늘어앉아 마시기는 해도 온갖 안주가 다 나왔다. 신석정 선생님은 50년대 말 고등학교 시절의 은사님이시다. 나는 그 무렵 시를 씁네 하고 제법 설치던 때라 선생님을 가끔 댁으로 찾아뵙곤 했다. 그러다가 졸업 후 대학에서도 시학 강사로 출강하시는 선생님께 지도를 받았다. 대학 시절부터 선생님 댁을 방문하면 거의 항상 사모님께 술상을 차리게 하셨다. 사모님께도 죄송하고 하여 안 마신다고 해도 막무가내이셨다. 보통은 청주(정종)였지만 때로는 과일주도 내오셨다. 한번은 정종에 복 지느러미를 태워서 넣은 술이라고 복술(히레주)이라고 권하셨는데 그 귀한 술이 촌놈인 나에게는 냄새가 이상하여 영 입맛이 당기지 않았다. 선생님께서는 그 무렵 자녀의 학비 때문에 무척 어려우셨는데도 제자들을 그렇게 끔직이 사랑하셨다. 어떤 친구는 고등학교 시절 밤거리에서 마침 술집에서 나와 귀가하시던 선생님을 뵈었는데 길거리에서 껴안고 뽀뽀해 주셨다고, 지금도 그 향긋한 술 냄새와 입김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자랑한다. 한 번은 선생님께서 술이 거나해서 하숙하는 학생을 찾아 대문에서 이름을 부르자 방문에 키스하는 장면이 실루엣으로 비치고는 곧 전등이 꺼지더라고 오히려 즐거워하셨다. 나도 교사가 된 뒤에 선생님처럼 제자를 사랑하는 스승이 되었으면 했지만 그 10분의 1은커녕 100분의 1에도 미칠 수가 없었다. 60년대 말쯤 전주에 직장을 옮기게 되어 막걸리 집에서 더러 선생님을 뵐 수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지인들과 맥주를 마시더라도 2차로 막걸리 집에 들리셨다. 당시의 막걸리 집은 질퍽하고 푸짐했다. 비록 방에서 따로 상을 차려 둘러앉는 것이 아니라, 하도 닳아서 윤기나는 긴 의자에 양쪽으로 무리져 늘어앉아 마시기는 해도 온갖 안주가 다 나왔다. 처음부터 두릅 같은 햇나물, 뱅어 같은 해물, 붕어조림 같은 냇물고기, 돼지고기 구이와 찌개 등이 차려져 있지만 주모는 계속해서 안주를 내오면서 부침개를 부쳐댔다. 술은 도가니에 가득하고 주전자는 주둥이가 탁 터졌고 사발은 철철 넘쳤다. 선생님께서는 잔을 들고 나와 팔을 걸고 마시기도 하셨다. 그렇게 제자 사랑을 표현하셨다. 그러면서도 술을 많이 마시면 실수하기 마련이니 절제하라고 당부도 하셨다. 술자리에서는 일제와 전쟁과 독재를 겪으면서 당한 슬픔과 분노를 독설로써 표출하기도 하셨다. 춘원의 배신을 원망했지만 그 사랑의 인성을 칭찬하기도 하셨다. 어느 봄날 춘원 댁에 갔는데 뜰에서 아들이 아버지에게 꽃에 앉아 있는 나비를 잡아달라고 하더란다. 춘원은 이를 잡는 체하다가 쫓아 보내곤 하더란다. 만해의 절개도 그런 자리에서 나왔다. 어느 겨울 만해 댁을 찾았는데 그 추위에 냉방에서 떨지도 않고 꼿꼿이 앉아 있더란다. ‘님의 침묵’ 같은 명작을 어떻게 썼느냐니까 그런 정도는 하룻밤에도 다 쓸 수 있다고 웃더란다. 그 암울했던 시절 사랑의 스승님은 지금 어디 계신가. 그 가난했던 시절 풍요의 막걸리는 지금 어디로 갔나. -------------------------------------------------------------------------------------------- 오하근 | 원광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김소월 시 어법연구』, 『정본 김소월전집』, 『원본 김소월전집』등이 있고, 논문으로 「김소월 시의 어구 생략」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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