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0 |
[막걸리] 막걸리 안주와 허리둘레의 줄다리기
관리자(2005-10-13 16:15:10)
막걸리 안주와 허리둘레의 줄다리기
글 I 김학민 <한국사학진흥재단 이사장>
지인들 사이에서는 내가 청탁불문 두주불사의 ‘술꾼’으로 알려져 있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지도 않다. 청탁은 각각의 술에 어울리는 맛깔진 안주가 곁들일 때에야 불문인 것이고, 고담이 품격있게 논해지고 준론이 열기있게 펼쳐질 때에야 두주를 불사하는 것이니, 술독을 앞에 두고 게걸스럽게 퍼마시는 모습이 곧 내가 아니라는 말이다.
1970년대 중반 즈음까지 대부분 대학생들의 주머니 사정은 지극히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재학하던 학교에는 비교적 서울의 중산층 이상의 학생들이 많았지만, 가만히 눈치를 보면 그들도 대개는 등록금 등 학비를 벌기 위해 가정교사를 하고 있었다. 물론 요즈음도 어려운 대학생들이 많겠지만 학자금 융자제도가 전혀 마련되지 않았었고, 장학금 또한 다양하지 못했던 그 시절 대학생들의 ‘고난의 행군’은 동시대를 같이 산 사람들이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가끔의 술자리도 그 시대의 징표를 확실히 드러내 주는 가난한 시간이었다. 요즘처럼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거나 와인의 향기를 혀끝에 축일 수 있는 기회는 언감생심 꿈도 꿔보지 못할 일이었고, 대개는 튀김이나 라면, 그렇지 않으면 김치찌개나 생선찌개를 안주로 하여 주전자 막걸리를 마시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러한 술자리는 ‘쇼도 보고 영화도 보고’라는 종로 2가 화신극장의 영화간판 선전문구처럼 ‘술도 마시고 식사도 한 끼 때우는’ 1타2매의 실용적인 기회였지만, 여기에서는 항시 ‘마시는 기쁨의 막걸리’와 ‘씹는 즐거움의 안주’의 불균형이 참석자들 사이를 긴장시켰다. 곧 우리들의 젊은 위장은 대개는 ‘마시는 기쁨’보다 ‘씹는 즐거움’쪽에 손을 들어주는 편이었으니, 막걸리 잔이 몇 순배 돌기도 전에 이 손 저 손이 분주히 오락가락하면서 안주는 금세 바닥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궁여지책으로 바닥을 다 보인 찌개국물에 주인 눈치 보아가며 김치 집어넣고 물 붓고 하여 다음 막걸리 한 주전자를 더 마시기까지 ‘씹는 즐거움’을 가까스로 이어갔던 추억을 그 시절을 함께 한 사람이라면 모두가 한 장면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때의 ‘포한’이 남아 있어서인지, 최소한 먹을거리에 대해서는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는 요즈음도 안주에 대한 집념이 강하다. 가능한 한 맛있는 안주를 찾고, 또 나온 안주는 마지막 술 한 방울과 완전하게 일치되도록 균형을 맞춰 술자리를 끝낸다. 그러므로 내게 있어서 술에 취한다는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술이 남아서 안주를 더 시킬 수밖에 없었고, 또 그러다보니 안주가 남아 술을 더 시킬 수밖에 없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할 상황의 결과물인 것이다.
안주에 대한 이러한 나의 ‘강박관념’이 풀어진 것은 1978년 신혼여행 후 호남지방을 돌아다닐 때였다. 당시 광주나 전주의 식당에 들어가 맥주 5병을 시키면 그냥 맛깔스러운 전라도 음식을 상이 넘치도록 올려 주곤 했는데, 도대체 그렇게 해서 식당이 운영될 수 있을까 무척 궁금했다. 좌우지간 그때의 전라도 주안상은 단순히 양적 풍부함을 넘어 그 깊은 맛으로 나에게 새삼 질적 자극을 느끼게 해 주었으니, 요즈음 내가 음식 칼럼니스트라고 허명이나마 누리고 다니는 것도 그 시절 그 식당들에서 근원한다. 좀 유식하게 칼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말하자면, 이른바 양적 변화가 일정 단계에서 질적 변화로 전환하는 과정이었다고나 할까.
세상만사 모두가 먹자고 하는 일이라는 말이 있지만, 너무 이야기가 안주쪽으로만 치우친 것 같다. 이제 술 이야기도 좀 해보자. 지인들 사이에서는 내가 청탁불문 두주불사의 ‘술꾼’으로 알려져 있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지도 않다. 청탁은 각각의 술에 어울리는 맛깔진 안주가 곁들일 때에야 불문인 것이고, 고담이 품격있게 논해지고 준론이 열기있게 펼쳐질 때에야 두주를 불사하는 것이니, 술독을 앞에 두고 게걸스럽게 퍼마시는 모습이 곧 내가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허구 많은 술 중에서 막걸리를 좋아한다. 농촌에서 태어나 자라다보니 자연 막걸리로 노동의 허기짐과 고통을 씻어버리는 농민들을 보게 되고, 또 그들과 어울리다 보니 자연 그들의 술에 쉽게 입문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 한창 술맛이 당길 나이인 군대 시절 음주 선택권은 단 하나 피엑스(PX) 막걸리뿐이었던 바로 거기에서 막걸리의 인이 박히었던 것이다.
막걸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고유의 술이다. 그리고 막걸리는 전국에 널리 퍼져있는 만큼 그 이름도 여럿이다. 우선 빛깔이 탁하다고 해서 탁주, 탁배기, 색깔이 희다고 해서 조경사에 부조를 할때는 ‘백주(白酒)’라 적으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술이라는 뜻에서 국주(國酒), 집마다 담그는 술이라 해서 가주(家酒), 농촌의 필수적인 술이라는 점에서 농주(農酒)라고 부르며, 그밖에 지방에 따라 사투리 이름도 즐비하다.
또 막걸리는 주조방법이 간단하고 알코올 도수도 낮기 때문에 누구나 부담없이 마실 수 있는 술이었다. 그래서 1980년대까지 막걸리는 각 지방마다 그 특색을 대표하는 명물로 위세를 자랑하며 술꾼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찾는 술이었다. 곧 산업화 이전의 농업중심 사회에서 막걸리 양조장과 정미소는 지역사회의 풍요로움을 드러내주는 하나의 코드였다.
그러나 80년대 이후 산업화가 가속화되면서 소득 수준이 올라가자 국민들의 입맛은 막걸리 일변도에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막걸리보다 상대적으로 비싸지만 약간은 고급스러운 맥주가 대중화되기 시작했고, 더한 자극을 찾는 산업사회의 풍조는 급격히 고알코올의 소주로 서민들의 술자리를 평정시켰다. 그리고 권위주의 정부 아래서 특혜로 부를 쌓은 자본가들은 그들의 계급의식을 반영하듯 비싼 양주로! 양주로! 진군하여 갔다.
그러나 맥주와 소주의 대중화가 막걸리를 몰락시켰다는 제로섬적 분석은 결과로써 원인을 설명하는 전도적 논리이다. 국민들의 술 취향의 변화와 함께 정부의 막걸리에 대한 규제와 과보호가 막걸리 산업을 무너뜨린 측면이 큰 것이다. 주세가 대부분인 술값에서 막걸리는 가장 낮은 세금이 부과됨으로써 값싼 싸구려 술이 되었고, 소규모의 양조장들이 각각의 영업구역을 배타적으로 보호받는 특권에 도취되어 규모의 경제를 이루지 못하여 그 체질이 허약해지고 쇠미해져 결국 막걸리 산업이 붕괴한 것이다.
요즘 우리의 전통술 막걸리가 긴잠을 깨고 부활하는 기미를 보이는 것 같다. 계속된 풍작으로 인한 쌀의 술 원료 사용, 포장과 저장, 유통과정의 개선, 독주에 대한 기피와 웰빙 문화의 유행이 그 이유들이란 점에서의 긍정성과 함께 연이은 경기침체로 어쩔 수 없이 싼술을 찾는 현실의 안쓰러움이 막걸리의 부활에 착찹함을 교차시킨다.
최근 이런저런 일로 전주에 내려갈 일이 많았었다. 나는 전주에 갈 때마다 삼천동이나 평화동의 막걸리 골목을 찾는다. 그곳에 가 발길 닿는 대로 어느 집이나 쑥 들어가면, 맛깔스러운 전라도 음식 한 상 공짜에 3천원 막걸리 한 주전자로 전주 인심을 만끽한다. 그러나 좋은 것이 있으면 나쁜 것도 있는 법. 말걸리 골목의 그득한 주안상은 30여년 전 가까스로 잠재웠던 안주에 대한 나의 ‘포한’을 일깨워 연신 “아줌마, 막걸리 한 되 더!”를 외쳐버리니, 등산으로 가까스로 사수하고 있던 나의 허리둘레 32인치 유지작전이 무참하게 무너져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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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민 | 배재고등학교와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으며, 대학 재학 중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된 이래 1970, 80년대 민주화 운동과 민중문화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민중문화운동협의회 실행위원, 경기문화재단 문예진흥실장 및 2002년 수원 월드컵 문화행사자문위원장을 지냈으며, 현재 사단법인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지역감정연구》(편저), 《독재의 거리》(번역), 《정본 백범일지》(주해), 《564 세대를 위한 변명》 등이 있다. 《한겨레 21》에 우리 음식을 문화인류학적으로 분석한 칼럼 〈김학민의 음식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다.